몇 번이고 스쳤던 이름. 그저 듣기만 해도 본인이 아는 사람이라 단언하기에 손쉬운 독특한 그 이름.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내가 아닌 최하나 씨가 있다.
처음에는 학부 시절 건축 공모전 수상자 명단에서 종종 보았다. 후원하는 작은 단체의 기부자 명부에서 발견하고 적잖이 놀라기도 했다. 괜스레 검색해 본 내 이름과 건축이라는 조합의 결과물에서 꽤 자주 등장하는 사람이다. 나의 신상과 사진은 여러 곳에서 공개됐지만, 같은 이름을 쓰는 이의 개인적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 대상과 드디어 마주쳤다.
방심한 순간 읽게 된 가장 낯익은 이름. 얼마 전, 건축 실무를 위해 온라인 교육을 수강한 덕분이다. 지인도 수강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나마 얼굴을 뵙나 하는 마음에 참여자 리스트를 훑어보던 터였다. 수없이 듣고 썼던 세 글자. 그분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실체를 접하니 어찌 그리 반가운지. 나만의 내적 친밀감이라서 딱히 표현할 방도가 없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저 혼자만의 놀라움은 아니었으리라 바라볼 뿐이다.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소통법은 여러모로 효과적이다. 세상살이에 귀속되어 상호작용을 시작하는 존재라면 그를 소개하는 '호칭'을 가진다. 인간이 성명을 가지는 것은 당연함에 가까운 일이다. 태중에서 있을 때조차, 꼬물이를 위하는 마음 눌러 담아 태명을 빚어낸다. 크고 작은 네이밍 공모가 끊이지 않는 것은 더 많은 영향력을 갖고 싶어서 일 것이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 둘만의 애칭을 붙여 특별함을 선사하는 것도 뿌리 깊은 곳에서 나온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정 욕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건축물에도 작명한다. 쉬운 예로 궁궐 건축에서 기능별 구획화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간마다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부여한다. 일종의 애정이 어린 주소이자, 진정한 꽃이 되도록 그 의미를 북돋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 생물이나 무생물 분별없이 무언가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본인이 중요시하는 가치관을 살펴볼 좋은 기회이다. 자크 라캉의 거울 이론을 야트막하게 빌려다 붙여보자면, 드러난 것으로 나를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평소 네이밍을 즐기는 편이다. 지인에게 별명을 들이밀거나 모임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 각종 업무에서 필자가 제안한 네이밍이 채택된 경험도 다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로는 소중한 사물에까지 특정 음파를 지속해 제공한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의 이름을 짓고 부른다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를 더 알아가며 더 나은 생각과 행동을 도모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으로, 어떠한 공간을 원하는지 구체화하는 방법 중에 비전문가적이지만 효과적인 방향이 있다. 상상하는 곳의 이름을 지어보는 것이다. 광활한 시작점에서 조금씩 좁혀가면 결국 근본적인 바람에 생각의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고민하고 고민해 보니, 이 아이의 이름은 '최하나'라고 지어야겠어. 라는 결론을 내린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