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어떻게 키우세요?"
이 질문에 저는 늘 같은 대답을 합니다.
"저, 불효녀예요."
오늘도 손주들을 부모님께 맡기고 아침 출근길에 오르는 워킹맘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이를 친정에 보내고 '주말 엄마'로 지냈던 3년 동안, 밤마다 아이의 영상을 보다 잠이 들곤 했습니다.
유치원에 들어갈 무렵 우여곡절 아이를 데리고 왔지만, 온전히 아이의 등하원을 책임지지 못하여 양가 부모님께서 번갈아 가며 도와주셨습니다. 엉성한 톱니바퀴처럼 아슬아슬했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라 믿었습니다.
둘째 아이가 생기니 더 이상 결심을 미룰 수 없었습니다. 입주 시터를 알아보기 시작했으나, 한 달에 사백만 원을 웃도는 비용을 감당하며, 조건과 마음이 맞는 시터를 찾는 일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고민이 깊어지던 어느 날, 엄마가 결심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딸, 더 이상 고민하지 마. 엄마가 갈게.”
그 한마디로 친정 부모님은 마흔을 넘긴 딸의 어린 자녀들을 키워 주시고자 매주 지방에서 올라오기 시작하셨습니다.
아침 6시, 일흔을 앞둔 아빠는 가장 먼저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곤 주방 불도 켜지 않은 채 계란 두 개, 방울토마토 일곱 알, 사과 두 조각을 비닐에 담아 식탁에 놓아두셨습니다. 혹여 불빛이 방 문틈으로 새어 들어갈까,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손을 움직이시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셨습니다.
그렇게 챙겨주신 아침을 가방에 넣어 조용히 출근길에 나설 때면, 저의 어린 10대 시절이 겹쳐졌습니다. 매일 등굣길에 삶은 감자와 조각 사과를 챙겨주시던 아빠. 그리고 지금, 40대가 된 제게 여전히 그때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아침을 건네주시는 아빠. 그러한 아빠가 얼마 전 묵직한 고백을 하셨습니다.
"딸, 아빠는 엄마 때문에 딸 집에 와 있는 거야.
엄마가 아프면 안 되잖아.
그리고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편한 사람이 아빠잖아."
그랬습니다.
엄마는 제가 짊어져야 할 무게를 대신해 주셨고, 아빠는 그 곁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내 딸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그 마음 하나로, 엄마는 황혼의 시간을 손주 양육에 쓰고 계셨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고도 경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의 희생과 묵묵한 동행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어린 손주의 울음에 가장 먼저 반응하던 엄마의 몸엔 갑상선 질환과 만성 통증이 쌓였고, 찜질 팩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욕심내기에
부모님의 황혼과 건강을 빌려 쓰고 있는 걸까.
나는 이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엄마를 바라보며 저는 이러한 질문을 끌어안고, 무겁게 다짐했습니다.
‘그래, 올해까지만...‘
그러나 그 다짐은 속절없이 해를 넘겼습니다.
그렇게 저는 부모님의 건강과 희생에 기댄 살얼음 같은 균형 위에서 오늘도 하루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딸로서, 오늘의 불완전함은,
미래의 제 안에 어떤 후회를 남기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