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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롤모델이 있을까

by Mira


한창 업무 중에 유치원과 어린이집 상담 전화가 연달아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자, 직장 동료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괜찮으세요?”


저는 웃으며, 부모님 덕분에 괜찮다고 말했습니다. 부모님의 도움조차 없는 워킹맘들의 치열함을 알기에, 제 상황이 그나마 낫다고 스스로 위안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습니다. 엄마로서도, 직장인으로서도, 딸로서도, 늘 불완전한 제 모습과 마주하고 있었으니까요.

요즘 들어 그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엄마로서,

얼마 전 첫째 아이의 유치원 알림장을 놓쳐 방과 후 수업신청을 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께는 거듭 양해를 부탁드렸고, 아이에게도 좋아하는 수업을 참여하지 못할 수 있다며 미안하다 사과했습니다.

‘초등학교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의 질문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조차 몰라, 그제야 인터넷 검색창을 열었습니다. 한글도 제대로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그저 책을 좋아하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너무 안일했다 싶었습니다.

둘째 아이 어린이집 부모 참여 행사가 회사 일정과 겹쳐 우리 아이만 혼자 빠졌습니다.

새로 다니기 시작한 발달센터에서도 둘째 아이는 제 품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울기만 했습니다. 더 나은 선택지를 미리 찾지 못한 것이 끝내 미안했습니다.

퇴근 후에는 지친 몸을 핑계로 아이와 제대로 놀아주지 못했습니다. 거실 바닥에 누워 자동차 바퀴만 굴리는 아이를 그저 눈으로만 바라보며, 걱정을 안은 채 마음만 사랑할 뿐이었습니다.


직장인으로서,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팀원에게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늘 함께했습니다. 저를 이해하고 빈틈을 메워 주었지만, 일이 몰리면 그 친구에게도 괜한 눈치가 보였습니다.

과거의 저는 달랐습니다. 누군가 지시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곧장 보고서로 구현했고, 작은 생각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습니다.

“이왕 하는 거, 최고로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어 봐요.“

라는 말은 일을 시작할 때 제가 건네는 말이었고,

“누가 뭐라 해도 이 정도면 제가 아는 한 최고의 결과물이에요.“

라는 말은 일을 마무리할 때 제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저는 떠오른 안건이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습니다. 분명 조직에 보탬이 될 만한 주제였지만, 제 안에서 조용히 멈추었습니다.

욕심 냈던 프로젝트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최소한만 관여하려 했습니다.

곧 시작할 새 프로젝트는 성장의 기회가 될 업무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계획을 세우려 하니 피로감이 먼저 몰려왔습니다.

누군가 ‘정말 못하겠는지’ 되묻는다면, 굳이 못할 건 아니지만, 그 과정을 다 보내고 나면 제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고갈될 것만 같았습니다.


딸로서,

참 무책임했습니다. 며칠 전 업무를 진행하던 중 엄마가 전화를 주셨습니다. 둘째 아이 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는데 소아과에 가야 할지를 묻는 전화였습니다. 엄마는 오늘 하루 아이의 열이 몇 도였는지, 낮에는 무엇을 먹었는지, 잠은 얼마나 잤는지를 쭉 설명하셨습니다. 저는 엄마의 말을 끊고, 사무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상황 보셔서, 괜찮으면 가지 마시고, 더 심해지면 가주세요.”

전화를 끊고 자책했습니다.

이보다 더 무책임한 딸이 있을까...

얼마 전 엄마의 건강검진을 신청하다가 무심결 부동산 앱을 켰습니다. 지방을 오가시지 않고 아이들을 조금 더 편히 봐주실 수는 없을까, 내가 근처에 모시며 살 수는 없을까, 병원도 지방보단 여기가 더 좋고 나 역시 마음이 더 놓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문득 이모님이 과거에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이 둘을 친정 엄마께 맡기고 사업을 오래 하셨던 이모님은, 저희 엄마가 손주를 돌보는 모습을 보며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엄마한테 아이를 맡기지 말고 시터를 써. 엄마를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네가 후회하는 순간이 와. 이모가 그랬어.”

그때는 흘려 들었지만, 요즘 편찮으신 부모님을 뵐 때면 그 말씀이 자꾸 떠올라 가슴을 조여왔습니다.




최근의 일상을 돌이켜 보면, 엄마, 직장인, 딸, 그 어떤 역할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이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간 사람이 있지 않을까. 엄마로서도, 직장인으로서도, 딸로서도, 그 모든 자리를 충분히 지켜낸 사람이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저의 역할이 불완전하다고 느낄 때마다 저에게는 롤모델이 더욱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십수 년간 저는 저를 앞서 간 완벽한 누군가를 찾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 누구도 완벽히 균형을 이루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실, 대부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그녀들조차 무수한 미안함, 측은함, 죄책감, 허탈함과 같은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끌어안고 하루를 버텨낸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습니다. 롤모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것을. 내 안의 ‘완벽하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는 길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나의 오늘을 지키고,

내일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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