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초, 큰 프로젝트의 리딩을 맡았습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고, 지원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일상적 수준에서 처리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분명 이 프로젝트는 제 커리어에도 굵은 한 줄 이력이 될 만한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한 달 사이, 몸무게가 3킬로 가까이 빠질 정도로 온 힘을 쏟았습니다. 퇴근은 늦었지만, 성취감과 뿌듯함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원들과 점심을 마친 뒤, 맛집이라 불리는 베이커리에 들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첫째 아이가 좋아하는 초코시럽빵, 둘째 아이에게 먹여보고 싶던 쌀빵을 봉투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그날도 일은 늦게까지 이어졌고, 아이들이 잠든 뒤에야 집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차의 시동을 켠 순간, 그제야 보조석에 놓인 빵 봉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저, 덩그러니.
십 수년 전, 저의 첫 리더가 떠올랐습니다. 업무에 있어서는 빈틈이 없었고, 책임감도 강했지만, 엄마로서의 삶은 잠시 미뤄둔 것 같았던 분. 그래서 제가 롤모델이라 부르기 어려웠던 그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지만, 그 마음을 어디에도 풀지 못하고 다시 사무실 자리에 앉아 일을 이어갔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제 안에서 무언가가 고갈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
‘이게 맞는 걸까. 지금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롤모델을 찾아 헤매던 지난날과, 결국 저 역시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현실이 겹쳐 보였습니다.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개운함도, 뿌듯함도 남지 않았습니다. 문득 이 감정을 더는 가볍게 흘려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이 글을 시작하게 된 배경입니다.
업무를 하면서 수많은 리더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날, 그들에게 말로 글로 전했습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리더십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정작 저는 제 삶의 정체성을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역할은 파도 같았고, 흔들리고 휩쓸리며 눈앞의 순간에만 몰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쥐고 무엇을 놓쳤는지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딸로서, 다하지 못한 역할들이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밀려와 저를 다그쳤습니다.
저는 그저,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고 싶었고, 동시에 경력을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위에는 늘 미안함이 부채처럼 남았고, 그 현실이 때로는 참 가혹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여성 리더들처럼 악바리 같은 근성이나 냉정한 거리두기를 제 옷처럼 걸칠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타인의 평가와 인정에 민감했고, 그 안에서 기뻐하기도, 흔들리기도, 슬퍼하기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그저 불완전한 엄마이자, 직장인이자, 딸일 뿐이었습니다.
그제야 저를 향해서도 질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어떤 엄마로 남고 싶은가.“
십 수년이 지난 지금에야 처음으로 이 질문을 저에게 던져 봅니다. 그리고 저를 찾기 위한 또 다른 질문들을 하나씩 꾹꾹 적어 봅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이고 싶은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엄마로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일이 왜 좋은가.
왜 이토록 인정에 목마른가.
일을 통해 진정으로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지금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부모님께 어떤 딸이고 싶은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얼마나 부족해도 여전히 괜찮을 수 있을까.
…
그리고 5년 후, 10년 후,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딸로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 질문들에 아직 답을 구하진 못했습니다.
아마 끝내 온전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질문을 써내려 가다 보니, 몇 가지 우선순위는 선명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분명한 한 가지, 저는 쭉 불완전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앞으로도 저는 어딘가에 덩그러니, 빵 봉투를 남겨둘지 모릅니다. 그렇게 빈틈을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제 흔적이자 삶임을 보듬으며, 이제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 저만의 길을 찾아가려 합니다. 나답게 걸어가는, 한 사람의 워킹맘으로서.
롤모델은 제 안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