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
강남 한복판의 전문직 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밤 10시 퇴근이 당연한 분위기였고, 각진 정장과 딱딱한 구두가 유니폼이었습니다.
사무실 대부분은 남성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출중했고, 똑똑했습니다. 신입사원이던 저는 그 안에서 한없이 작아 보였고, 그들의 발걸음을 맞추다 보면 하루 종일 숨이 찼습니다. 때로는 그 뒤를 쫓다 정말로 바짓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눈치껏 따라갔습니다.
그중에는 여성 리더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녀는 세 살 아이를 둔 워킹맘이었습니다. 업무에 있어서 빈틈이 없었고, 책임감이 강했으며, 소수의 여직원들에게는 마치 우산처럼 든든한 존재였습니다.
저는 그분을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롤모델’이라 생각하긴 어려웠습니다.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막연한 바람이었지만, 저에게는 멋진 엄마가 되는 삶도, 하나의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같은 커리어를 가진 삶에서 ‘엄마’라는 역할을 온전히 담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과 함께 점심을 먹고 근처 디저트 가게에 들렀습니다.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빵이에요.”
그녀가 고른 빵이 담긴 봉지를 보며,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려나?’
당시, 상사가 퇴근하지 않으면 먼저 자리를 뜨는 것이 암묵적으로 허용되지 않았기에 저는 내심 그날만큼은 일찍 집에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빵 봉지를 바라보며, 남모를 설렘을 안고 뒤를 쫓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퇴근할 기색이 없었습니다. 창밖은 금세 어두워졌고, 팀원들은 여느 날처럼 야근을 하며 조용하게 키보드를 두드렸습니다. 밤 9시가 될 무렵, 그녀가 말했습니다.
"하, 힘들었다!
우리 다 같이 맥주 한 잔 하고 퇴근할까요?"
그날 우리는 늦은 밤까지 회포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11시 즈음이었을까요.
“다들 좀 더 이야기하고 가요. 먼저 갈게요.”
그녀는 그 자리의 술값을 미리 계산하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자리, 거기에는 그날 오후 아이에게 주려고 샀던 빵 봉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저, 덩그러니.
왜 그 장면이 이토록 오래 기억에 남았을까요.
책임감도, 실력도, 리더십도 존경스러웠던 그녀가 누군가의 엄마라는 삶을 잠시 미뤄둔 것 같은 순간.
그날, 저는 그 한 장면을 통해 아직 오지 않은 제 미래를 어렴풋이 예감했던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 빛나는 커리어우먼이 되려면, 가슴속에 품은 ‘엄마’라는 꿈은 때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덩그러니 남겨진 그 빵 봉지처럼.
십 수년이 지난 지금,
저 역시 워킹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완벽한 롤모델을 찾진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