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파리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촬영과 더불어 내가 여행에 갈 때마다 으레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림 그리기이다. 여행 난이도 최상급이었던 인도에서 우여곡절에 찾은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세밀화를 그렸던 게 굉장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자에게 그림 그릴 기회를 제공하는 스튜디오를 찾을 수 있는 도시에서만 가능하지만, 언젠가는 도움 없이도 어디서든 그림을 그릴 날을 꿈꿔 본다.
파리에서는 아침에, 그것도 야외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이 있었다. 일찍 일어나 이번엔 다소 오랜만에 짐을 싸고 체크아웃을 해놓고 짐을 맡겨 놓고 뤽상부르 공원으로 갔다. 그동안 나는 주로 아크릴화를 그렸는데 이 프로그램은 수채화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인지 원하는 만큼 잘 그리지는 못했으나 이 정도로도 호스트 선생님과 다른 게스트들은 칭찬을 연발했다. 호스트 선생님은 도대체 내가 어디서 그림을 배웠는지 꼬치꼬치 물으셨는데, 나는 어릴 때 다니던 한국의 '미술학원'에 대해 얘기했으나 호스트 선생님은 잘 이해하지 못하셨다.
(파리에서 아침에 즐기는 그림 그리기 예약 링크: https://www.airbnb.co.kr/experiences/60875)
그림을 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신 근처 맛집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뤽상부르 공원 부근에는 정말 관광객이 없어서 좋았다. 나 또한 관광객이면서 관광객 없는 곳이 좋다고 하는 행태가 우습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관광객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 느낌인 걸까?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현지인들이 제공하는 낭만적 경관을 해쳐서? 혼자만이 이방인인듯한 특별한 느낌을 저해해서?
점심을 먹은 후 Gauthier와 종린과 마지막으로 애프터눈 커피 타임을 갖기로 했다. 사실 오늘 파리 밖으로 가자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내 그림 그리기 세션 때문이었는지 시간이 애매해 포기했다. 그곳은 다음 기회에 가기로 했다. 우리는 Gauthier가 우리를 위해 열심히 검색한, 파리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베이커리에서 디저트를 사고 그 옆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파리 카페는 외부 음식까지도 허용하는구나, 싶었다.
아, 어제저녁 퐁듀 레스토랑에서 우리가 앉을 때 우리가 다른 예약손님이 있으니 8시 30분 전에는 비켜주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도 딱히 우리를 쫓아내거나 하지 않길래 나는 이분들이 다른 테이블을 마련했거나 했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이걸 Gauthier에게 말하니 예의상 쫓아내지는 않았을 거라고 했다. 우리가 알아서 신경 쓰는 게 예의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파리의 카페나 레스토랑의 각숑, 혹은 웨이터들은 매너가 참 좋다. 손님이나 점원이나 서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게 아닌 서로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는 문화. 뭔가 요즘 들어 새로 생기는 한국의 카페나 맛집들은 무슨 '룰'들이 참 많아 여가의 시간이 그리 유쾌하지 않을 때가 꽤 있는 거 같다.
떠나기까지 시간이 조금 있어 마지막으로 몽마르뜨에 한 번 더 가기로 했다. 종린은 먼저 집에 갔고, Gauthier는 끝까지 우리를 따라왔다. 비가 오는 첫째 날 갔다가 맑은 날 다시 가보니 또 다른 풍경이었다. 그땐 경사진 잔디밭에 아무도 없었는데 이날은 다들 잔디밭에 자유로이 뒹굴고 있었다. 우리도 한 번 앉아보았다. 엄마는 잔디에 누워 살짝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날씨규칙은 어제부터 무효했다. 이제 내내 맑다.
그늘에 낮아있는 게 추워질 때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념품숍에서 엽서와 그림카드를 샀다. 진짜 그림은 사지 못하고 인쇄된 것을. 사실 비싸지도 않은 그림 한 장을 왜 쉬이 사지 못하는지. 실컷 관심 있게 구경은 하고서는! 아침에 그림 레슨을 받고 오니 왠지 그림 보는 눈이 약간은 생긴 것 같았다. 예술가들이 저마다 피사체를 어떻게 단순화해서 담아내는지, 저마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어떻게 구축하는지를 유심히 보게 되었다.
몽마르뜨를 내려와 '사랑해 벽'과 '물랑루주' 외관을 한 번씩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파리를 떠나기로 했다. Gauthier는 뭐 그리 일찍 가느냐고 했지만 엄마는 슬슬 불안해지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빠듯하게 기차를 겨우 탄 경험들이 좀 있기에... 그리고 엄마가 백번 옳았다. 모든 짐을 갖고 파리의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할 자신이 없고, 또 교통권이 있는데 택시를 탈 것까지는 없고 시내버스를 타기로 하는데, 공휴일이라서 그런지 (Gautheir 말로는 버스들이 파업 중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버스 대기 시간만 30분이 걸린 것이다. 우리는 1시간 전쯤 역에 도착했고, 정말이지 역에는 아무것도 없어 저녁은 먹지 못한 채 대기하다 무사히 독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