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 Estampes - Jardins sous la Pluie
저번에는 쇼팽 겨울바람에 대해서 알아봤는데요, 이번에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는 작곡가 드뷔시의 판화 중 세 번째 작품인 '비 오는 정원'을 해부해 보겠습니다. 간략하게 작곡가를 소개해 드리자면, 드뷔시는 19세기~20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답니다. '인상주의'라고 들어보셨죠? 인상주의는 전통적인 균형이 잡힌 기법에서 벗어나 빛과 함께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색채를 묘사하고자 하는 미술 사조라고 하는데요, 대표적 작품으로 클로드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 '인상, 해돋이'가 있습니다.
저는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대충 봐도 형상이 뚜렷하게 잡히지 않고 흐릿한 느낌이 드네요. 음악에서도 이와 비슷한 특징을 지닌 작품들이 등장했는데요, 그 인상파 음악의 대표적 작곡가가 드뷔시였습니다. 드뷔시의 작품 중 가장 많이 들어보셨을 음악이 '달빛'일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전 낭만주의를 대표하던 쇼팽의 음악과 비교하면 좀 더 몽환적인 느낌이 드실 거예요.
작곡가와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봤으니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 오늘의 작품인 판화 세 번째 곡 '비 오는 정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판화는 총 세 곡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모음곡이에요. 첫 번째 곡은 탑, 두 번째 곡은 그라나다의 황혼, 세 번째 곡이 바로 비 오는 정원입니다. 이국적인 풍경을 담고 있는 모음곡이지만 드뷔시가 실제로 가본 것은 아니고 상상하여 작곡한 것이라고 하네요. 1편에서 쇼팽의 에튀드(연습곡)들의 부제는 모두 작곡가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서 붙여졌다고 설명해 드렸는데요, 이번 작품은 드뷔시 본인이 직접 붙인 제목들입니다. 24곡으로 이루어진 드뷔시 프렐류드(전주곡)에도 모두 제목이 붙어있는 것이 쇼팽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곡의 시작부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16분 음표들이 주르륵 쏟아지는 것 같죠? 제목 자체가 '비 오는 정원'이니까 어떤 예쁜(?) 정원에 비가 오고 있는 장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어요. 악보를 잘 들여다보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스타카토입니다! 스타카토라는 것은 [그림 1]에 제가 빨갛게 동그라미 표시를 한 부분입니다. 이는 본래 길이의 1/2만큼 연주하라는 것으로, 보통 짧게 연주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요. 마치 빗방울이 창문이나 지붕에 부딪혀 톡, 톡 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말이죠. 또 하나, 첫 부분을 보면 pp라고 쓰여있는 부분이 있죠. 이는 '피아니시모'라는 이름을 가진 가장 여리게 연주하라는 악상기호예요.
비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잖아요. 여기서 내리는 비는 어떤 종류일까요? 16분 음표와 스타카토, 피아니시모까지 합해보면, 저는 작은 소리로 가볍게 떨어지는 가늘고 얇은 비가 생각이 나네요.
그렇지만 이게 끝이 아닙니다.
위에서 인상파 음악의 대표주자가 드뷔시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이 곡의 이미지 역시 그렇습니다. 비 오는 정원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는 그런 그림 말고 뭔가 흐릿~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그림을 상상해 보세요. 음악으로 그런 느낌을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손가락으로 그런 음색을 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효과적인 음향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피아노의 페달을 잘 쓰면 됩니다. 여기 악보에는 따로 기재돼있지 않지만, 이 곡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댐퍼 페달'을 적절하게 사용합니다. 댐퍼 페달을 밟아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피아노의 음량이 커지고 울림이 풍부해지는 효과가 있어요. 이 곡은 이런 효과를 이용해 음들이 적절히 섞이게 해 마치 클로드 모네의 그림과 비슷한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제가 이 곡을 연주할 때 느낀 점은, 페달이 음들을 한 겹 감싸안는 듯했어요. 마치 안개처럼 말이죠. 그래서 그런가, 분명 예쁜 정원인 것 같긴 한데 좋은 날의 정원이 아닌, 회색의 우중충한 - 안개비에 젖은 그런 정원이 떠올랐어요. 유럽에 가보면 맑은 날보다는 흐린 날이 더 많은데 그런 전형적인 느낌이었네요~.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물론 계속 일정하게 추적추적 내리는 그런 비는 아니었답니다. 곧이어 나타나는 악상 표시 네 개. 뭘까요?
cresc.(크레셴도)는 점점 세게 연주하라는 뜻인데 molto(더욱, 매우)가 붙어서 더 많이 세게 하라고 하네요. 그 뒤에 f(포르테)도 세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즉, 매우 점점 세게 연주해서 커지고 포르테를 지나 더 커지고, dim.(디미누엔도)를 만나 작아지고 molto를 만나 매우 작아지면서 마지막으로 pp(피아니시모) 매우 여린 구간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입니다. 노란색 박스의 악센트는 그 음을 특히 세게 하라는 기호예요. 아까는 스타카토만 붙어있어서 가벼운 빗방울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비가 점점 거세지면서 센 스타카토가 되어 조금 시끄러워진 빗방울 소리 같네요. 그 이후 pp구간은 갑작스럽게 다시 평온해진 정원의 모습인 것 같아요.
그 이후로도 계속 비슷한 느낌이 나와요. 거세졌다가 약해졌다가를 반복하는 거죠. 가끔 그렇게 오락가락하는 비 있잖아요? 그런 느낌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림 3]의 f subito라고 쓰여있는 부분은, f(포르테)로 세게 연주하는 부분인데 subito(갑자기)가 붙어서 또 갑자기 커지라는 의미입니다. 별로 어려운 건 없죠?
두 번째 줄의 dim. molto는 아까 봤던 기호네요. 조금 다른 점은, [그림 2]에서는 한 마디 안에 pp의 매우 여린 부분으로 변화해야 했다면, 지금은 (아래 [그림 4] 부분까지 합쳐) 세 마디에 걸쳐 서서히 줄어들라고 지시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지금이 덜 급작스러운 느낌이죠?
악상기호 표시가 참 다이내믹하네요. 갑자기 매우 세졌다가 작아졌다가 매우 작아졌다가 하면서 참 변화무쌍합니다. 그렇게 계속 반복했다가 마침내 [그림 5]에서 다른 파트로 넘어가는군요.
그동안 봤던 그림과는 조금 다르죠? 조표와 함께 변화를 예고하면서 En se calmant(차분하게)로 조용하게 접어들고 있습니다. 음악 들어보시면 분위기부터 싹 변화하기 시작하는데요, 사실 여기부터는 더 많은 상상이 필요합니다.
moins rigoureux는 덜 엄격하게 연주하라, mysterieux는 말 그대로 미스터리하게, 신비하게 연주하라는 뜻이에요. 그전까지 비 오는 정원은 정말 현실에서의 비 오는 정원 같은 느낌이었는데요, 여기서부터는 갑자기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일단 제 상상에서는요. 원래는 오른손이 끊임없이 16분 음표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이제 왼손이 반주를 맡고, 오른손은 멜로디 같은 어떤 느낌을 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어떤 신비한 요정이 정원에 놀러 와서 장난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어쩌면 점점 세지던 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물방울이 한 방울씩 똑, 똑 떨어지는 느낌인 것 같기도 해요. 아무튼 그렇게 신비스럽게 움직이다가 또 갑자기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Rapide(빠르게), 급한 느낌으로 하강하며 dim. 를 만나 작아지고, Retenu는 영어로 Hold back, slow the pace이고 한국어로는 속도를 늦추는, 잡아두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면서 pp 매우 작아집니다.
대체 무슨 일일까요?
scherzando는 익살스럽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음악의 첫 부분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만, 뭔가 분위기가 매우 달라 보입니다. 정말 장난이라도 치고 있는 것 같군요. 이제 음악의 막바지입니다.
cresc. -> molto cresc. -> f -> ff까지 계속해서 크게 연주하라고 요구합니다. 곡의 끝 마디까지 ff와 크레셴도로 범벅이 되어있어요. 그래도 마지막에는 꽤 깔끔한 코드로 산뜻하게 끝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곡을 너무 오랜만에 들었는데, 듣다가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분위기가 중간부터 급변하더니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악보를 보니 조금 당황스럽네요. 그렇지만 제가 작곡가가 아닌 이상 어떤 곡도 100% 이해할 수는 없을 거예요. 예술이란 게 보통 그렇지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상상하는 게 그 즐거움이잖아요. 저는 이 곡을 연습할 때 아마 '아 요정이 뭔가 하고 있나?'라는 상상으로 대충 때웠던 것 같은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상상하시는지 심히 궁금하네요.
여담으로 제가 이 곡을 처음 접한 건 고등학생이었을 무렵인데요. 그전까지는 드뷔시와 같은 인상파 음악을 접할 일이 별로 없어서 이 음악이 듣기에 좋은 것과는 별개로 조금 생소했던 기억이 나네요. 페달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는 고전, 낭만 음악과는 다르게 이 작품은 정말 음향을 풍부히 해주는 역할에 충실해야 했어요. 테크닉적으로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지만 음악의 분위기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랍니다. 색채가 참 특이해서 그런지 이 곡은 요즘도 비 오는 날이면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과 함께 종종 생각나곤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