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에튀드 op.25 no.11
쇼팽을 아시나요? 피아노를 조금 깊게 배우다 보면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인물이죠.
쇼팽의 피아노 에튀드는 피아노 입시에 거의 필수적으로 쓰이고 있고, 지금도 많은 피아노 전공생들이 이 에튀드와 씨름을 하고 있을 거예요. 에튀드(Etude)라는 이 말은 연습곡이라는 뜻으로, 쇼팽의 피아노 에튀드는 총 24곡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리 길지 않은 3분 내외의 곡들이지만 다양한 피아노 테크닉이 요구되는, 상당히 까다로운 구석이 있어요.
쇼팽의 피아노 에튀드에는 모두 부제가 붙어있는데, 사실 쇼팽 본인이 지은 제목이 아니라 대부분 평론가들에 의해 기인한 것일 거라 하네요. 하지만 곡의 분위기와 부제가 찰떡같이 잘 어울려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이, 오래된 음악이기도 하고 특히 서구권에 시대적 배경도 많이 달라서 그 느낌을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알 수 없는 작품번호를 통해서만 음악을 접하게 되다 보면 좀처럼 이해할 수 없고 그저 난해하게만 들릴 때도 많아요. 그럴 때 간혹 가다 부제가 붙어있는 작품을 보면 훨씬 그 방향성에 대해 느낌을 갖기 쉽고, 음악도 훨씬 명료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쇼팽의 피아노 에튀드는 사실 쇼팽 본인이 붙인 부제가 아니지만, 전공생의 입장에서 훨씬 재미있고 접근하기 쉬웠던 것 같아요. 물론 직접 연주하는 것 말고,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이야기이지만요..
그래서, 음악과 악보를 통해 직접 부제를 느껴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싶었어요. 물론 제 개인적인 관점으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분들이 이해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겠죠. 어떻게 보면 스토리텔링이 될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분석에 가까울 수도 있겠지만, 도레미파솔라시 모르는 사람도, 음표를 보고 콩나물대가리를 떠올리는 사람도 재밌게 봐주실 수 있도록 하는 게 이 시리즈의 목적이니, 편하게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첫 곡은, 쇼팽 피아노 에튀드 Op.25 No.11, <겨울바람>입니다.
왜 24곡의 쇼팽 에튀드 중에 작품 번호순으로 보자면 23번째에 해당하는 겨울바람을 골랐냐 하면,
제가 보기에 제일 재밌고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쉽고 또 화려한 곡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기도 합니다.
이 곡은 왜 겨울바람이라는 부제가 붙었을까요?
왜 많고 많은 바람 중에 겨울바람일까요?
겨울바람이라는 것은 어떤 분위기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 음악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 분도 계시겠지만, 일단 음악은 듣지 않고 먼저 악보부터 보시겠습니다.
악보를 본다 생각하지 마시고 그림 보듯 봐주세요. 여기 두 개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같은 그림 찾기를 해볼까요? 양쪽의 그림 중에 같은 부분은 어디가 있을까요?
1번 그림 2번 그림
쨔잔. 바로 여기였습니다. 보이시나요? 1번 그림의 콩나물들이 2번 그림 속에 숨어져 있었답니다. 재밌죠?
이런 식으로 곡 안에서 비슷한 구절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곡의 주제를 관통하는 '멜로디'가 되겠군요! 그리고 이 그림에 또 한 가지 숨겨져 있는 재밌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분위기의 변화입니다. 메이저, 마이너라는 표현은 일상 속에서도 간혹 쓰이죠. 음악에서 말하는 것도 그와 비슷합니다.
메이저는 따뜻하고 밝은 느낌이라면 마이너는 우울하고 어두운 느낌이 강합니다.
오른쪽그림에서는 쭉 메이저로 진행되다가 갑자기 끝에서 마이너로 변화합니다. 좀 불길하네요.
이제 이 곡의 이름이 <겨울바람>인 것을 계속 떠올리면서 아래 영상의 17초까지만 들어주세요.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생각보다 잔잔한 느낌이 드실 수도 있고, 왠지 모를 서늘함이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것 같네요~저는 후자입니다. 폭풍 전야라고 할까요? 아래 영상 배경과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네요.
잠깐,
음악을 더 듣기 전에 다시 악보 먼저 보겠습니다. 음, 한눈에 봐도 위의 그림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죠.
콩나물이 많고 빽빽합니다. 부제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칼바람이 매섭게 휘날리는 것 같기도 하네요. 하지만 저는 겨울 - 눈 - 바람 이렇게 연결된 그림이 떠올라서 마치 저 빽빽한 콩나물들이 무섭게 휘몰아치는 눈보라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사실 저는 여태까지 겨울바람을 자연스럽게 겨울 눈보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네요.
그냥 겨울바람이든 겨울눈바람이든, 아무튼 뭔가가 저런 형태로 휘몰아치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지금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라고 표현한 건 그냥 지어낸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름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콩나물의 양이 확연히 증가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음악기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희가 본 악보에서 가장 대조되는 것들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왼쪽 위에 쓰여있는 영어스펠링. Lento에서 allegro로 바뀌었네요.
두 번째, pp라는 기호와 f라는 기호. 찾으셨나요?
이것의 뜻을 알면 왜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는 건지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lento -> allegro : 이것은 빠르기를 나타내는 기호입니다. Lento(느림) -> allegro(보통빠르기로)
pp -> f : 이것은 강약을 표현하는 기호입니다. pp(아주 여리게, 작게) -> f(강하게, 크게)
빠르기도 두 배로 빨라지고, 강약도 세배는 강해진 눈보라. 한 번 들어보실까요?
그 뒤로도 눈보라는 강도가 약해졌다 세졌다 할 뿐이지 계속 되고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 곡의 결말은 어떨까요? 이 곡의 마지막 부분인 3분 20초 부근을 집중해서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원래 왼손 부분은 위의 악보처럼 오른손의 수많은 콩나물보다는 확연히 적은 화음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곡이 끝으로 향하면서 이제 오른손과 비슷한 수준의 콩나물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콩나물들이 두 배로 많아지는 것이죠. 콩나물을 눈보라로 치환하면 눈보라가 두 배로 강력해졌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래 악보는 곡의 결말부입니다. fff라고 표시된 저 화음 덩어리 보이시나요? 아까 강약을 표현하는 기호에 대해 간단히 설명드렸는데요, f가 강하고 크게 연주하라는 표시인데 이게 세 개 짜리라면 어떨 것 같나요? 네 맞습니다, 3배 강하게 연주하면 되겠죠! 마치 눈보라가 결말로 갈수록 강해져서 엄청난 높이의 눈이 켜켜이 쌓여버린 것 같습니다. 제가 이 곡을 연주했을 때 이 부분에서 들었던 상상은, 마치 에베레스트 같은 높고 깊은 산에서 눈보라에 방향을 잃고 고립되어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어떤 사람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조금 잔혹한가요? 저 화음의 음색을 집중해서 들어보면 왜 인지 모르게 비장함(?)이 느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상상은 자유이니까요! 여러분도 이 곡을 다시 들어보시면서 어떤 상상이 드시는지 코멘트해주시면 재밌을 것 같네요.
이 글로 쇼팽의 겨울바람과 조금 친해졌기를 바라며,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