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iszt <Apre une lecture du Dante>
이번 주제는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입니다. 이 곡은 길이가 17분~18분쯤 걸리는 곡으로, 피아노 전공생들이 보통 대학교, 대학원 졸업연주 때 많이 연주하곤 합니다. 화려하고 연주 시간도 적절하고 주제도 흥미로워서 연주곡으로 적절한 곡이에요.
이탈리아 작가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이 나온 시기는 13세기 중세시대이지만 지금까지도 화제가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책이기도 하죠. 19세기 헝가리 태생의 피아니스트인 리스트도 이 문학작품에 관심이 많았다고 해요. 리스트는 많은 독서를 했고, 많은 문인 교류를 통해 영향을 받았는데,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도 자주 읽었다고 해요. 이 책은 저자와 같은 이름의 단테가 지옥-연옥-천국을 7일 동안 여행한 내용을 담고 있어요.
13세기에 쓰인 문학작품이 19세기 어느 피아니스트에게 영향을 주어 피아노 작품이 탄생했고, 그것이 지금의 많은 피아니스트에게 연주되고 있으며, 그 문학작품 역시 꾸준히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 참 대단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네요!
이곡의 정확한 제목은 'Après une lecture du Dante: Fantasia quasi Sonata: 단테를 읽고, 소나타풍의 환상곡'이에요. 작업 중에 제목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신곡에 바탕을 둔 구약성서, 교향적 환상곡', 그다음에는 '단테의 신곡을 바탕으로 한 소나타풍의 환상곡', 이후에는 지금의 제목 '단테를 읽고'과 함께 '소나타풍의 환상곡'이라는 부제를 가지게 되었어요.
즉, 이 작품은 쇼팽의 겨울바람과 같이 다른 사람에 의해서 붙여진 부제가 아닌 작곡가 본인이 고심하고 고심하며 붙인 제목이라는 뜻이죠. 이렇듯 리스트는 대부분의 곡에 부제를 많이 달아놓았습니다. 이 곡뿐만 아니라 리스트의 12가지 초절기교 연습곡에도 두 곡을 제외하고 다 부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쇼팽의 연습곡을 생각하면 꽤 많이 다른 점이죠~!
참고로 하나 더 말씀드리자면 리스트는 ‘표제음악’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작품에서 많이 사용했어요. 표제음악이란 주로 문학적 작품이나 회화 등에서 소재를 가져와 이를 음악적으로 묘사해 놓은 작품을 뜻해요. 리스트의 일명 '단테 소나타'는 표제 음악에서 중요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즉, '신곡'의 줄거리를 <단테 소나타>라는 피아노 작품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휴, 서론이 길었습니다. 저도 이렇게까지 배경을 오래 설명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만 확실히 유명한 작품이 바탕에 깔린 음악이라 이렇게 돼버렸네요. 그래서 이 곡은 대체 어떤 곡이냐고요?
35세의 단테는 어두운 숲 속을 걷다 산짐승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단테를 구해주고 지옥, 연옥, 천국을 보여주겠다고 합니다. 잠시 음악을 들어보시고 한번 맞혀보세요! 단테가 맨 처음 도착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단테가 가장 먼저 가게 된 곳은 바로 9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진 '지옥'이었습니다. 리스트는 이 지옥을 어떻게 피아노로 표현하고 있을까요? 보통 천국은 상승, 하늘, 높은 곳의 이미지가 있고 지옥은 하강, 지하, 낮은 곳의 이미지가 있잖아요. [그림 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음악은 처음부터 대놓고 하강하기 시작합니다.
더 음악적으로 알아보자면, 단순히 하강만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음정간격이 증 4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첫 번째 콩나물에서 두 번째 콩나물로 이동할 때 위치가 4단계 내려왔는데, 긍정적 느낌이 아니라 부정적인 느낌으로 내려왔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이 음정이 악마를 표현한다고 여겨 사용을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리스트가 지옥을 표현할 때 이 음정간격을 사용한 것이겠죠! 그렇게 첫 번째 콩나물에서 6번째 콩나물에 도달할 때까지 이 악마의 음정을 연속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랍니다. 제가 빨간 선으로 그려놓은 모든 음정이 바로 증 4도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윗부분과 아랫부분 둘 다 말이죠. 그러면서 윗부분을 연주하는 오른손은 저~ 위에서부터 증 4도 간격으로 계속 계속 아래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지옥이 9단계로 구성돼있다고 하더니,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지나 보네요..!
그리고 잠시 (대충) 6초 동안의 정적이 흐릅니다. 정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음산한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에게는 이 [그림 3]이 나타내는 게 꼭 무서운 가운데 어두운 형체가 보였다 사라지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뭔가 빼꼼 하는 그런 느낌이요. 톰과 제리라는 만화를 보시면 톰과 제리가 서로 달리거나 숨는 걸 표현할 때 음악이 꼭 이런 식이었던 것 같네요. 아직 뭐가 시작되기 전의 폭풍전야 같기도 하고요.
여기서 사용된 첫 번째 동그라미 음정은 감 7도입니다만, 두 번째 동그라미인 증 4도와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 고로, 첫 번째 음정 역시 지옥이나 악마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겠죠.
또 하나, 리스트가 '지옥'을 표현할 때 쓰는 음악적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반음계인데요, 피아노 건반을 보면 흰건반이 있고, 그 위에 검은건반이 흰건반 사이사이에 껴있잖아요. 그것을 차례대로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것이 바로 반음계입니다. 집에 피아노가 있으신 분들은 한번 하나하나 쳐서 들어보세요. 그리 듣기 좋은 음계는 아니라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거예요.
바로 [그림 4]가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16분 음표의 반음계 행렬이 하강과 함께 꽤 오래도록 조용히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 음악이 시작될 때의 빠르기는 Andante(조금 느리게)였는데요, 이번 페이즈부터는 Presto agitato assai(매우 빠르고 성급하게)로 변했습니다. 그러면서 lamentoso라고도 쓰여있는데요. 이 뜻은 영어로 번역하면 plaintively, sadly이고 한국어로는 구슬프게, 애잔하게, 슬프게라는 뜻입니다. 지옥에서 고통의 형벌을 받고 있는 자들의 소리를 표현한 것일까요?
이 고통의 소리는 점점 커져 ff(매우 세게)에 도달하면서 동시에 con impeto: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빠르게 반음계를 왔다 갔다 거리고, 왼손 부분은 강하게 상승했다가 결국 다시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disperato:절망스러워지고 있네요. 무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전히 지옥의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큰 소리로 반음계가 정신없이 반복되고, 올라가다가 뚝 떨어지는 감 7도 진행 패턴이 왼손이고 오른손이고 할 것 없이 나타납니다. 분노한 자들이 벌을 받는다는 제5지옥이라도 되는 것일까요. 끊임없이 바위를 산 정상으로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라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그러다가 [그림 7]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고조되던 음악이 딱 끊기며 잠시 한숨 고르고,
[그림 8]과 같은 반음계, 마치 기어올라왔다가 무한히 떨어지는 것 같은 지옥이 펼쳐집니다. 조금 정신없는 악보이기는 하지만 대충 그림만 보더라도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오실 거예요. 아비규환. 매우 강하게 연주하는 부분이 많다 보니 여기서 이미 지쳐버릴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여러분들도 읽다가 벌써 지쳐버리신 것 아닌가 모르겠네요. 과연 지옥의 끝은 언제일지...!
라고 함과 동시에, [그림 8]의 마지막 부분, 빨간 박스 부분이 등장하는군요. piu animato: 더욱 생기 있게,라고 하며 강약표시도 p(여리게)로 바뀌었고요, 음정도 중간에서 아래나 위로 상승, 하강하지 않고 머물러 있죠! 뭔가 바뀌어가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듭니다.
비록 1마디의 주제 선율이 여기서 재현되고 있기는 하지만요.
확실히 변했다고 알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조표의 변화입니다. 앞에서 샵(#) 3개가 그다음마디에서는 6개로 변화했죠. 단조(어두운 느낌)에서 장조(밝은 느낌)로의 이 변화. 연옥이든 천국이든 간에, 지옥에서 탈출한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영상 3분 42초부터 들어보시면 이 밝은 느낌에 공감하실 것 같네요!
또 한 가지, 잘 보이는 변화가 있죠. 바로 상승하는 화살표입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하강만 하거나, 상승하는 척하다가 감 7도 또는 증 4도로 내려찍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는데요. 이번에는 확실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곡'에서는 지옥 다음으로 향한 곳이 7개의 구역으로 나눠진 연옥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장조로의 변화와 계속되는 상승이 표시되고 있어도 여기가 천국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연옥이란 곳도 죄인들, 구원받을 수 있는 망자들이 준재는데 그들은 이 모든 죄를 씻고 나면 구원받아 천국으로 오른다고 합니다. 천국과 지옥의 중간단계인 셈이니 지옥의 형태, 천국의 형태가 둘 다 표현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림 12]에서 나오는 것처럼 말이죠. 어디서 봤던 그림 아닌가요? 바로 맨 처음에 봤던, 지옥을 묘사하는 하강하는 그림입니다. 천국에 도착한 줄 알았더니 아직 아니라고 하는 듯하네요.
연옥은 지옥과는 반대로 위로 올라가야 하는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연옥은 지옥보다는 낫긴 하지만 그리 편한 곳은 아니겠죠. 각 층은 일곱 가지 대죄에 해당하는 죄인들이 벌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난데없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 같은 음악이 등장합니다. 지옥도, 연옥도, 천국도 아닌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요? 일단 노란색 박스의 음악용어는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dolcissimo: 가장 부드럽게
con amore: 사랑스럽게, 애정을 가지고
단테는 연옥의 가장 꼭대기층인 지상낙원에 이르러 '베아트리체'라는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단순히 지상낙원에서 어떤 여인을 만났다고 해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음악이 흐를까요? 7분 40초부터 들어보세요. 사실 베아트리체의 등장에는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작가 단테는 아홉 살 때 은행가 집안의 딸인 소녀 베아트리체를 보고 짝사랑에 빠졌습니다. 비록 사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이상적인 여인으로 남아있었어요. 그 때문에 이 피아노 작품의 배경인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천사처럼 표현되고 있어요. 연옥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되고, 마침내 천국에 도달하게 되죠.
사실 저는 베아트리체의 등장이 조금 뜬금없게 느껴졌습니다만, 단테 입장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핵심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주인공도 자신을 대변하듯 똑같이 '단테'라고 이름 지은 것, 실제로 짝사랑했던 베아트리체를 지옥과 천국의 중간 지점인 연옥에서 만나게 설정해서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어 주는 안내자로 등장시킨 것을 보면 말이죠. 자신이 죽고 나서 베아트리체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표현된 것 같기도 하네요.
이제 단테는 베아트리체와 함께 천국으로 가게 되는데요. [그림 14]는 그 천국으로 가기 위한 도입부입니다. 다시 맨 처음에 등장했던 주제선율이 등장하면서 마침내 6개나 되던 샵(#) 조표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는 모습입니다. 그 다음엔 과연 어떻게 음악이 흘러갈지~!
여기까지가 리스트 단테소나타에 대한 1부였습니다. 사실 예상보다 스케일이 커져서 부득이하게 2부로 나눌 수밖에 없었네요. 이번 편에서 지옥과 연옥까지 여행했으니 이제 천국에만 가면 되겠습니다.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은 각각 3일이고 천국은 1일뿐인데 음악적 시간은 아직도 1/3이 남아있네요. 리스트는 천국에 더 진심이었던 것일까요? ^^; 아무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