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건, 더 소중하게. 원목 씨앗 보관함

어쩌다 목공 ++ ④ 이어가는 씨앗 보관함

by 황반장

텃밭농사를 이어온 지 벌써 10년을 훌쩍 넘겼으니 제법 티 낼 수 있는 도시농부다. 초보 도시농부로 시작해 남에게 이러쿵저러쿵하는 도시농업 강사가 되었으니 10년 세월이 그냥 지나간 건 아닌듯하다. 물론 전업으로 농업을 하시는 분들에 비하면 감히 농사라 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그동안 텃밭에서 보낸 여러 날이 제법 굵은 나이테로 쌓여있다. 흙을 만지느라 더 주름이 늘어난 얼굴과 손이 그렇고, 10년 넘게 농사지으면 남은 형형색색 씨앗들도 그렇다.


매년 봄이 시작되기 직전에 늘 하는 일이 있다. 한 해 농사지을 여러 가지 씨앗들을 고르고 심을 시기별로 정리해 두는 것이다. 작년에 씨를 받아 놓은 상추, 파, 시금치, 고수 같은 채소류, 완두콩과 강낭콩, 밤콩, 선비콩 같은 콩들이다. 꽃씨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 토종 범부채는 꼭 씨앗을 받아 놓는다. 몇 년 전 토종씨앗 축제 때 입양해온 것을 계속 채종해 심고 있는데, 텃밭 여기저기 심어 놓고 한 여름에 화려하게 꽃잎을 펼친 범부채꽃을 보는 것으로 잠시나마 더위를 잊는다.


올해에는 특히 목공방의 김태일 선생님께서 어머님과 같이 농사지으신 아욱 씨며 호랑이콩 같은 것을 챙겨다 주셔서 씨앗들이 더 늘었다. SNS에 올리는 우리 집 텃밭 사진을 보시고 이것저것 챙겨주시는데 늘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씨앗을 받아서 잘 갈무리하고, 나누기까지 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씨앗을 채종 하려면 채소를 다 키우고 따로 씨앗을 받을 포기를 남겨놓고 씨앗이 여물기를 기다려야 한다. 또 과육을 벗겨내고 씻어 말려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도 있다. 무나 배추 같은 것은 그해에 채종 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해 봄까지 기다려야 씨앗을 얻을 수 있다. 콩처럼 열매이자 씨앗이 되는 것은 좀 쉬운 편이지만 종자로 쓰일 병 없고 튼튼한 것을 일일이 손으로 골라야 하니 이것도 다 정성이다.


어김없이 씨앗을 챙겨보려는데 보관 상태가 10년농부 얼굴이 화끈거리는 수준이다. 검은 비닐봉투, 흰 봉투, 종이 쇼핑백에 찢어진 편지봉투까지 제각각이고, 심지어 이런 봉투들을 담아둔 낡고 색 바랜 우체국 택배박스 바닥에는 온갖 씨앗들이 이리로 우르르, 저리로 우르르, 좁은 상자 속을 데굴데굴 질주한다. ‘소중하다면서 말만 하면 안 되지!’하며 가두시위를 벌이는 듯하다. ‘너희들을 위한 예쁜 상자를 만들어 줄게’ 시위대와의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래서 만들어 보는 게 ‘씨앗 보관함’이다.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대하지 않으면 그 가치를 잃는다. 그러니 정성으로 만들어 보자고!


일단 시중에 판매하는 씨앗봉투도 넣을 수 있는 크기로 만들기로 정했다. 여기에 여러 종류의 씨앗을 잘 수납 가능하도록 착탈식 칸막이를 세워주기로 했고,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뚜껑을 만들어 경첩을 이용해 달아 줄 계획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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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15t 두께의 편백나무가 주 재료다. 그런데 상자의 뚜껑에 좀 더 정체성을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진 않았다. 이건 공방의 왕회장님, 재태형과 상의하니 좋은 방안이 만들어졌다. 보석상자 같은 스타일로 식물과 씨앗을 주제로 한 그림을 레이저로 각인하기로 한 것이다. 즉석에서 그림 실력 좋은 지인에게 부탁까지 해서 일사천리로 그림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어가는 씨앗’이라는 이름까지 넣으니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가 잡혔다.


‘레드오크 합판’에 레이저 각인기로 그림을 새겨 넣고 다시 끼워 맞추기로 상자의 뚜껑을 완성했다. 목공 자재를 전문으로 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매한 철물 장식까지 달아주니 보다 고급스러워졌다. 특히나 보석상자 모양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목재 접합 부위가 눈에 보이지 않는 45도 연귀 맞춤을 한 것이 완성도를 한껏 높여 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소중한 씨앗을 이어갈 도시농부의 이름을 각인하는 것!

손에서 손으로 이어질 ‘씨앗 상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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