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씨앗을 품은 원목 가방

어쩌다 목공 ++ ⑨ 토종씨앗 전시용 원목 가방

by 황반장

“토종 씨앗을 전시할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글쎄? 어떤 곳에서 전시를 하는데?”

“청계천 소라탑 앞에서 열리는 농부의 시장인데, 따로 전시장이 있는 것은 아니고, 판매 부스에서 토종 농산물을 판매하는데 씨앗도 같이 보여주고 싶어서”

“전에는 어떻게 했는데?”

“그릇에 넣어서 보여주기도 하고, 동그랗고 투명한 실험용 샤알레 같은 것에 넣기도 하고”

“만들지 뭐”


그렇다. “만들지 뭐” 이 한마디는 앞으로 다가올 이 수고로운 일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나온 말이었다. 쉽게 대답은 했지만 딱히 준비된 계획이나, 이렇게 저렇게 하리라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다 시간은 2주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고.


토종씨앗을 전시한다고? 왜? 사실 이 질문이 발단이었다. 전시한다는 것은 보여줄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하고, 또 내용도 있어야 한다.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을 모아 놓기만 한다고 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토종씨앗은 전시의 가치가 있을까?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토종씨앗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토종씨앗은 글자 그대로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키워진 식물들, 농산물들의 종자를 말한다. 하지만 지금 있는 모든 식물들의 씨앗이 토종씨앗은 아니다. ‘오랫동안’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또 ‘누구에 손에 의해서’라는 조건도 맞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농산물의 종자, 즉 씨앗의 상당수는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재배된 것들이 아니다. 많은 씨앗들은 종묘회사에 의해 만들어진 씨앗이다. 보통 ‘F1’이라고 부르는데 돈을 주고 이 씨앗을 사서 심으면, 여기서 생긴 씨앗을 받아 내년에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이 F1씨앗의 특징은 다음 해에 똑같은 농작물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년 다시 사서 심어야 한다. 이러니 ‘오랫동안’ 정착한 씨앗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매년 만들어내는 씨앗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고추, 가지, 토마토 등등이 다 그렇다.

두 번째 조건이었던 ‘누구의 손에 의해서’라는 것도 완전히 다르다. 토종씨앗은 농부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씨앗이다. 우리 집 호박이 맛있고 좋으면 옆집과 나누는 것이고, 아랫집 옥수수가 실하면 윗집과 나누며 대대로 이어오는 씨앗이다. F1씨앗은 누구의 손이랄 것이 없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팔리기도 하고 생산이 중단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대대로 농부들의 손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키워져 왔기 때문에 우리 몸에 더 좋고 더 안전한 농산물이니 당연히 ‘흔한’ 농산물이어야 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투입 대비 수익이 좋아야 하고 유통 수익이 보장되는 것이 우선인 세상이 아니던가?

자본의 논리가 아닌 생명의 논리로 키워지는 토종씨앗,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기억되어 있는 토종씨앗은 지켜가야 할 소중한 자원이자 유산인 것이다. 이러니 토종씨앗과 이를 이어가는 농부들의 노력은 가치와 내용면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세상에 알릴만한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하겠다.


2022-01-05.jpg


이런 사실 때문에 토종씨앗을 알리는데 일조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별다른 계획 없이 덮어놓고 이걸 만들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이게 참고할 만한 다른 샘플들이 없으니 세상에 없는 걸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가장 비슷한 것이 허브, 아로마 판매를 위해 제작된 패키지 정도였다. 참고는 할 수 있으나 이걸로는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내긴 어려웠다.


그래도 만들어야 한다. 마감시간이 다가오니 말이다. 뭐라도 해야 하니 일단 만들고자 하는 작품의 컨셉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는, 토종씨앗이 눈에 잘 들어는 게 중요하다. 나무가 돋보일 필요는 없다. 주인공이 뒤바뀌면 안 되는 것이다.

둘째는, 실용적이어야 한다. 토종씨앗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농민들이나 단체 실무자들이 감당하는 일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다. 최대한 손이 안 가고 준비부터 철수까지 쉽게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는, 이동이 편리해야 한다. 전용 행사장이 있어서 상설적으로 전시하는 것이 아니다. 농부의 시장이나 여러 행사장, 야외와 실내를 가리지 않고 전시할 수 있으며 차량에 싣기 쉬워야 하고, 심지어 들고 다닐 수 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내가 무얼 만들려고 하는지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리된 아이디어가 바로 ‘가방’이었다. 이동하기도 쉽고 미리 한 번만 준비해 놓으면 어디에서나 쫙 펼쳐놓으면 되는 ‘가방’ 같은 형태가 떠오른 것이다. 스케치북에 연필로 대강의 디자인을 해보니 모양이 잡혔다. 이제 문제는 씨앗을 담을 용기인데. 나무로 짜는 것보다 적당한 제품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시장에 나가보는 것이 정답. 며칠을 방산시장을 돌아다닌 끝에 한 화장품 용기 제작회사의 전시판매장에서 딱 좋은 케이스를 찾았다. ‘아이고, 이제 발 고생은 안 하겠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향기 좋은 삼나무로 가방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다 된 게 아니었다. 씨앗을 담을 케이스를 고정하는데 아주 애를 먹었는데, 원래 로션을 담는 케이스라서 원형이었던 게 문제였다. 딱 맞는 크기의 동그라미를 가공할 비트가 없는 것이다. 비슷한 크기로 가공하고 일일이 다시 손으로 갈아서(샌딩 해서) 크기를 맞추었다.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기나긴 단순작업 끝에 겨우 완성해냈다.


이렇게 끝이면 좋았을텐데 손잡이를 달아야 들고 다닐수 있겠구나 싶었다. 컨셉이 가방이니 손 잡이가 필요하기도 했다. 나무로 짠 가방에 손잡이라니. 어깨에 메는 형태가 좋을까? 재질은 어떤 것이 좋을까? 뭐 하나 정해진 것이 없으니 이것 역시 막막하기만 했다. ‘역시나 발품을 팔아야 해!’ 지난번에 씨앗 담을 케이스를 찾아 며칠을 헤맨 방산시장에는 이런 제품은 없을 것 같았다. 어디가 좋을까 이리저리 궁리 끝에 찾은 곳이 동대문 원단시장. 페브릭 원단과 가죽원단, 그리고 이걸 가공까지 할 수 있는 원단시장을 무작정 찾아갔다. 이곳에서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그걸 듯한 제품을 찾을 수 있었다. 이렇게 발품에 발품을 이어 만들어낸 것이 세상에 없었던 <토종씨앗 전시용 원목 가방>이다.


시원섭섭하게 씨앗 가방을 보내고 나니 어떻게 쓰이는지 궁금해졌다. 만들어진 작품에 실제 씨앗이 담긴 모습은 어떨지 몹시 궁금했다. 농부의 시장이 열리고 있는 청계광장으로 찾아갔다. 이리저리 찾는데 반가운 나의 씨앗 가방이 눈에 보였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나무 상자에 대고 인사를 할 뻔했다. ‘씩씩하게 네 역할을 잘하고 있구나. 장하다’ 슬그머니 말을 걸어 보았다.



20160603_152516.jpg




20160603_152433.jpg
20160602_214416.jpg
20160602_214436.jpg
20160602_214453.jpg
20160602_214553.jpg
20160602_220052.jpg
20160602_214847.jpg
20160602_214511.jpg
20160602_214335.jpg
20160602_220112.jpg



첫 전시 가방을 만든 것이 계기가 되어 매년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경첩과 손잡이를 개선하고 크기와 모양도 더 심플하게 조정했다. 처음 형태와는 다른 구조의 전시 상자도 만들었다. 토종씨앗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데 작은 보탬이 되길 바란다.



FB_IMG_1607599584868.jpg
FB_IMG_1607501972500.jpg
20181106_102841.jpg
20210222_150044.jpg
20210222_145912.jpg
2022-01-05 (5).jpg
2022-01-05 (4).jpg
2022-01-05 (1).jpg
2022-01-05 (3).jpg
2022-01-05 (2).jpg
2018-11-30-13-41-02.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