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밤마다 제 몸의 뼈를 갈아 뿌리었고
들끓는 세상 속 그리움 파종되어
한 송이 불치병처럼 피어나
주변과 다르게 혼자 존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홀로 처연하다.
저 하얀 꽃 한 송이는 지금 아름다운가.
막막함 속에서 그는 무언가를 앓고 있는 것이다.
뭔지 모를 것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겠지.
주변과 다른 존재의 직립이 적막했다.
나이가 들수록 주변 사람들과 대화는 줄어간다.
하루에 한 번도 누구와 대화하지 않고 퇴근한 적도 많다. 출퇴근하는 회사 직장인이 그게 가능한가 싶기도 하겠지만, 요즘에 나는 그 어려운 걸 드물지 않게 해낸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언어를 탐구하는 데 공을 들일수록 타인과 대화가 점점 줄어드는 기이한 현상에 대해 생각한다.
하루치의 회사 일과가 끝나갈 때쯤, 회사의 외진 곳에서 허기를 달래듯 지금 이 문장들을 다급하게 쓴다.
무언가를 혼자 끙끙 앓으며 투명에 가 닿으려 안간힘을 쓰는 순간들은 어떤 사소함에게 바쳐지는지를 가늠할 즈음 퇴근 시간이 되고.
오늘도 타인과의 대화는 딱 두 번.
언젠가 문학에서 길어 올린 사유의 일부와 느낌을 주변 동료들에게 들려준 적이 있다. 외계인을 보는 듯한 그들의 멀뚱한 눈동자에 나는 입을 닫았고, 그들이 목청 높여 말하는 아파트 가격과 코인의 등락, 지난 술자리에서의 해프닝 등을 묵묵히 듣고 있어야 했다.
문학을 탐독한다는 건 자신의 내면 깊은 구덩이 같은 곳에 인식을 몰아넣고 부풀린 채 매몰하는 행위의 반복인 건지.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 순간이 결코 불행한 건 아니다. 차라리 유일한 행복이라 해야 할까
답 없는 생각을 파고들려니 말은 꼬이고, 자기 미화의 덫에 걸린 듯하다.
내 마음과 생각의 본질을 말하자면 단순하다. 다시 오지 않을 지금을 온전히 누리고 싶은 것이다.
그리할수록 술과 회식을 피하게 되고, 의미 없는 무리 짓기를 저어하게 되는 것은 내 개인 성향과 지난 모종의 경험 탓이리라.
나는 여전히 문학을 헌법 삼아 읽을 것이고 내게 닥쳐오는 일들의 위헌 여부를 예민하게 감지할 것이며, 판결에 따라 나름의 문학적 응전을 벌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뛴다.
나는 러너니까.
문학과 러닝을 통한 몸의 갱신을 신뢰하니까.
나는 내 몸 그 자체이므로.
내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내 온몸은 그리 살도록 세팅되어 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무엇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일은 옆자리 직원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야겠다. 내가 탈출을 꿈꾸는 건 그들이 싫어서가 아니라, 생각대로 행하지 못하는 내가 싫어서다.
저 한 송이 연꽃이 혼자 힘으로 피었겠는가.
주변의 연잎과 흙탕물에서 공급받은 영양분을 뿌리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피지 못할 연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