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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 Mirror Oct 15. 2021

박수, 미안해

2009년 여름이나 가을쯤이었다. 집 근처 지하철 역에서 마을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한 얼굴의 사람이 지나갔고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순간 내게 너무나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고등학교 친구라는 건 알겠는데 친구의 이름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누군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는 매우 실망한 얼굴로 가던 길을 가 버렸다. 



나 역시 집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그 친구의 이름이 생각났다. 박 수 진.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다. 지금도 고등학교 때 사진에 그 친구의 얼굴이 남아 있을 정도로 꽤 친한 사이였다. 지방의 고등학교였는데, 서울에서 거의 20년 만에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하지만 그때 당시의 나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인간관계를 싹 다 지워버리고 싶은 상태였다. 과거, 현재의 인연 중 어느 누구도 만나기가 싫었다.




보험 영업을 하며 늘 사람을 만나야 했던 나였다. 고객을 대할 때는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적정 거리를 두고 대해야 하지만 어느 고객의 딸에게 수학 과외를 해 주기로 했다. 집에서 늘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엄마지만 그런 엄마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늘 먼저 생각해 주는 속 깊은 아이였다. 요즘 보기 드문 그런 아이였기 때문에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중학생이 되어 어려워하는 수학 과외를 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그 고객의 부탁을 하나 둘 들어주기 시작하자, 시간이 흘러 경제적인 부분까지 도움을 청해왔다. 뒤늦은 후회와 선택이었지만, 고객과 서서히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더 이상 전화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고객은 우리 아버지 나이대의 남자분이었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가족들은 해외에 나가 있고 꽤 오랜 시간 기러기 아빠로 살아온 남자 고객이었다. 첫 만남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고, 오픈 마인드의 소유자라고 착각한 나는 그 고객과 개인적인 약속을 잡게 되었다. 영화를 보자고 했고, 나는 무슨 일 있겠냐는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나가 같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인도영화.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기 시작한 초반에 그 사람은 내 손을 덥석 잡았고, 당황한 나는 얼른 손을 빼내고 반대쪽 팔걸이에 기대어 영화를 보는 둥 마는 둥 더러운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그를 향해 저는 일이 있어 먼저 가시라 하고선 헤어져 버렸다. 영화 초반에 일찌감치 나오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되었다.




특별히 바라는 바 없이 베풀었던 호의가 전혀 예상치 못한 칼날이 되어 돌아오는 일이 연달아 발생하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나 무서워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마음속도 머리 속도 복잡해져만 갔다.

 

사람을 만나야 월급이 나오는 일인데, 사람을 만나기가 죽는 것보다 싫었다. 그렇게 괴로워하다가 결국 거의 20년 만에 만난 친한 친구를 외면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박수. 별명이 박수였던 내 친구.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날의 일을 꼭 사과하고 싶다. 미안해, 박수. 그때 내 마음이 너무나 힘든 상태여서, 너를 20년 만에 먼 서울에서 우연히 만났음에도 반갑게 인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외면해 버렸어. 그렇게. 모른 척해서 정말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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