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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 Mirror Feb 28. 2024

내 인생의 첫 번째 변곡점

<어쩌다 명상> 프롤로그

어린이의 자아의식 속에는 부모의 생각과 감정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어린이가 자라서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자아의식은 어느 정도 굳건해지고 부모에 대한 환상(고태적 동일시)에서 해방되고 이들에 대한 의존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 이부영의 <자기와 자기실현>


“아빠, 죽여버릴거야!!!”


중학생이었던 나는 부엌에 있던 칼을 들고 대낮부터 엄마를 향한 폭언과 폭력을 시작한 아빠를 향해 달려갔다. 


“우리 아가 착하지? 칼 이리줘.”


엄마가 내 손에 있던 칼을 빼앗아 가면서 상황이 종결되었다. 그리고 나와 우리 가족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마 이 시도가 성공했다면, 나는 다음 날 뉴스의 주인공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나 역시 무의식의 저편에 새겨져 있을 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 학생회에서 ‘가족’이란 주제로 각자의 경험담을 담은 작은 책자를 발행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중학생 때 내가 한 일을 떠올렸고 글로 적었다. 그것이 책으로 인쇄되었다.


방학이 되자 나는 그 책을 가지고 집으로 내려갔다. 엄마에게 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내가 쓴 글도 있어. 곰곰이 나야.”


얼마 후, 엄마는 큰 방 벽에 기대 앉아 있던 아빠에게 그 책을 던져 주며 말했다.


“읽어봐, 당신 얘기도 있네.”


나는 내심 기대했다. 아빠가 그때의 상황과 사건에 대해서, 혹은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아빠의 폭력성에 대해 ‘니네 엄마 때문이다’는 등의 변명이라도 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결국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아빠에게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2년 후, 대학교 4학년 1학기가 시작된 봄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음악 모임에 가는 길이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니네 아빠가 죽었어.”

“갑자기 왜?”

“아니,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안 보여서 자고 있나 싶어서 방에 들어가 봤는데 없었어. 이상하게 으스스한 느낌이 들어서 옥상에 올라갔는데, 창고 밖에서 문 아래 틈을 보니 두 발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거야. 무서워서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곤 엄마를 때리고 욕하는 것이 전부였던 아빠(내, 기억에는)는 우울감으로 여러 번 자살 시도를 했다. 그리고 그 시도가 드디어 성공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홍대로 향하던 발길을 자취방으로 돌렸다. 대충 짐을 싸서 기차역으로 갔다. 부모님 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보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아빠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마음도 들었다.


“아빠를 위해, 남은 가족을 위해 잘 된 일일지도 몰라. 이제 모두에게 평화가 찾아올거야”


어린 시절 아빠가 한 달간 도보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모처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언제 시작할지 모르는 아빠의 폭력에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어린 나이에 생각했다.


‘아빠가 없으니까 너무 좋다.’


아빠만 사라지면 행복할 줄 알았다. 아빠가 떠난 후 고3이었던 동생과 엄마는 20년 가까이 살던 집을 정리하고 여동생과 내가 있는 서울로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과 남동생은 각자의 삶을 찾아 해외로 떠났고 엄마와 단 둘이 살게 되었다. 


“드르륵 드르륵”


어느 새벽 시간이었다. 엄마는 안방에 있던 내 키만한 4칸짜리 나무 책장을 화장실 안에 넣으려 하고 있었다.


“엄마 뭐해?”

“이거 화장실에 두려고.”

“뭐??? 그걸 왜 화장실에 둬. 그것도 이 시간에.”

“화장실에 수납 공간이 너무 없잖아.”


엄마 말대로 1평 남짓의 화장실은 샤워를 하러 들어갔을 때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공간이 없었다. 원래부터 있던 수납장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아주 오래된 비누, 때타올, 욕실용품들로 꽉 차 있었다. 수건 넣을 공간이 없어서 화장실 옆 벽면에 있는 수건 걸이에 자취할 때 샀던 세로로 긴 4칸자리 하얀색 주머니를 걸어 두었다. 수건은 어릴때부터 30년 가까이 사용해 아주 얇아져 있었다.


수건 걸이 아래에는 엄마가 손수 만든 음식물이 담긴 꽤 큰 통이 있었고 이 통에 담긴 정체불명의 음식은 우리 집 전체에 꼬릿꼬릿한 냄새를 일으키는 주범이었다. 세면대 아래에는 엄마가 파나 다른 식물들을 키우는 커다란 화분이 있었다. 화분과 이어진 벽에는 오랜 세월의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는 샴푸와 린스 그리고 청소용 세제 등이 있었다. 문 위에 붙어 있는 충돌방지 막대기에는 커다란 때밀이 타올과 ‘혹시나 지금 사용중인 샤워 호스가 고장나면 임시로 써야 할지도 모르는 예전에 사용하던 낡은 샤워 호스’가 걸려 있었다.


이렇게 이미 발 디딜 틈이 없는 화장실에 엄마는 화장실 한쪽 벽면을 꽉 채울 만한  크기의 책장-그것도 나무로 된-을 넣으려는 중이었다.


“엄마, 제발 그만 좀 해.”


나는 더 이상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보고 있기 싫어 작은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버렸다. 다시 잠들려고 누웠다. 잠은 오지 않고 또 눈물이 났다. 



내가 태어난 직후 아빠는 사고로 뇌를 다쳤고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다. 다행히 뇌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아빠는 오랜 시간 뒤에 깨어났다. 사고 전과 완전히 같은 사람일 수는 없었다. 일상 생활을 할 수는 있었지만 아빠는 다리를 절게 되었고, 뇌의 일부분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의 패턴이 있었다. 그리고 사고 후유증으로 평생 우울증 속에 살았다. 


회사 일을 하다 생긴 사고였기에 회사에서 가족 생활비와 아빠 용돈을 따로 보내줬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다섯 식구가 사는데 큰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회사에서 돈이 나왔지만 아빠는 사회 구성원으로, 가장으로 일을 해 보기 위해 택시 기사, 과일 장사 등 다양한 경제적 활동을 시도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아빠가 뜻한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잠깐 하다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런 아빠에게 엄마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바로 이거였다.


“도대체 돈은 언제 벌어 올거야?”


아빠만 사라지면 우리 집에 행복이 찾아올거란 나의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엄마와 단둘이 살게 되면서 엄마와 대화를 시작하고 세 단어만 넘어가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1시간은 커녕 30분, 아니 10분도 대화를 이어 가기 어려웠다.  엄마와 마주치기 싫어서 매일 약속을 만들고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때는 이상하게 내가 들어가는 회사마다 사정이 좋지 않아 월급을 못 받거나 운영에 변화가 생겨 퇴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술값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지인의 소개로  신촌에 있는 카페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술 좀 그만 마셔라.”

“돈은 언제 벌래?”

“니 또래 다른 애들은 이미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결혼도 하는데…”

“카페에서 커피 심부름이나 시키려고 대학에 보낸줄 알아?”

“남들한테는 그렇게 잘 하면서, 왜 집에만 들어오면 말 한마디가 없냐.”


나도 내 인생이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아 미칠 지경인데 엄마의 잔소리까지 더해지니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답답했다. 항상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는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엄마가 내게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가시가 되어 가슴 깊이 박혔다. 그리고 결국 이런 생각까지 이르렀다.


“이렇게 엄마랑 함께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마음이 편하겠어.”



아빠의 모습을 절대 닮지 않을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나는 어느 새 아빠를 무척 닮아 있었다. 어린 시절 차곡차곡 쌓아왔던 분노를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해 식칼을 들고 아빠를 향해 달려가게 만들었던 내 안의 폭력성이 비슷했고, 평소 말이 없고 감정 표현이 서툰 것도 그랬다. 평생 아빠를 고립시켰던 우울감까지 닮아버리게 되자 늘 엄마 편이기만 했던 나는 비로소 난생 처음으로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아빠가 엄마랑 살기 참 힘들었겠구나.’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내 눈에는 ‘불쌍한 엄마’만 보였다.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아빠에 대한 감정은 오직 ‘분노’뿐이었다. 


그런데 엄마와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상황이 반복되자, 아빠의 죽음이 떠올랐다. 아빠도 이런 마음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까? 


나의 우울증이 그리 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나 주변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들처럼 우울증에 잡아 먹혀 결국 죽음에 이를까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우울증을 이겨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때 명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글쓰기, 독립, 여행, 선요가와 명상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1년에 최소 두 번 이상은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떠난다. 엄마만 보면 화가 났던 마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고, 웃으며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책 <우울할 땐 뇌 과학>의 저자 엘릭스 코브 박사는 많은 사람들이 신체적 증상은 인지하지만 그 증상을 야기시키는 감정은 모른다고 한다. 예를 들면 숨이 가쁘거나 어지럽거나 근육이 긴장되거나 배탈이 나거나 가슴에 통증이 있다거나 하는 증상이 사실은 불안 때문일 수 있다. 이 때 증상들을 없애는 첫 걸음은 ‘불안’을 인식하는 것이다.


평생 모르고 지나갈 뻔한 아빠의 우울한 마음을 내게 찾아온 ‘우울감’과 그 원인을 인식하게 되면서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우울감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던 우울감의 지배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평생 희노애락, 다양한 감정들을 발산하며 살아간다. 열이 나고, 기침이 나는 것처럼 몸에 어떤 이상과 증상이 나타나면 병원에 가서 무엇 때문인지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는다. 하지만 내 마음에서 일고 스러진 수많은 감정들에 대해 ‘도대체 왜?’ 일어난 것인지 고민해 본 적이 있던가?


앞으로 아빠를 향해 분노의 칼을 휘두르던 딸이 엄마와의 지옥같은 관계를 경험하면서 아빠가 겪은 우울증을 이해하고 아빠와 화해에 이르는 과정을 연재할 예정이다. 가족은 든든한 울타리이면서 가장 벗어나기 힘든 족쇄이기도 하다. 가족에게서 행복이 아닌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나의 글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어쩌다 명상>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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