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내 마음을 바라보다
아빠가 가진 우울증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내가 태어난 직후 사고를 당하고 그때부터 우울증을 겪게 되었다. 내가 스물 세살 때 아빠가 돌아가셨으니 거의 23년을 우울증과 함께 지낸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태어난 해에 일어난 일이므로 나는 아빠의 사고 후 모습만 기억한다. 아빠는 참을성이 없었다. 아빠에게는 화를 내게 만드는 버튼이 있었는데, 그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주로 엄마였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자라면서 수도 없이 보았고, 그럴 때마다 아빠를 향한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 내게 아빠라는 존재는 그저 엄마를 늘 괴롭히는, 그래서 우리 가족의 행복을 파괴하는 주범일 뿐이었다.
존폴민다의 ‘인지심리학’에서 자동차 사고로 뇌의 일부 영역이 손상된 친구의 사례가 나온다. 친구의 전전두피질 손상은 성격을 바꿀 정도로 심각했다. 전전두피질의 영역은 계획 세우기, 행동 억제하기, 주목할 대상 선택하기 등의 기능을 담당하는데, 이 부분의 손상으로 인해 사고 후 친구는 계획을 세우고 결정하고 행동을 선택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뇌의 다른 영역은 괜찮아서, 말하고 기억하고 사물을 지각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통합할 수는 없었다. 말하자면 그는 지적 기능과 동물적 성향 사이의 평형 내지 균형이 파괴되었던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고 후에 그는 변덕스럽고, 불손하고, 이전과 달리 때때로 매우 불경스러운 것에 탐닉하고 노골적이면서 동료들에게 존경심이 없었다. 또한 통제를 받거나 조언을 들었을 때 자기 욕구와 맞지 않으면 참지 못했다.
아빠 역시 사고로 인해 뇌를 다쳤다. 그래서 사고 직후에는 오랜 시간 깨어나지 못했다. 처음에 의사는 식물인간으로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얘기했다. 다행히 깨어났으나 아빠의 상태는 이전과 달랐다.
아빠는 사고 전까지 할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했다. 7남매 중 끝에서 두 번째 아들이었던 아빠는 타고난 외향적인 기질로 영업을 담당했다. 가장 큰 아빠와 둘째, 셋째 큰 아빠가 회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아빠는 그래프나 도표를 만들어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등 회사 성장에 관련한 의견을 제시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아빠의 20대 초반의 사진이 한 장 남아 있다. 나무로 만든 뗏목을 친구들과 타기 직전의 사진인데, 친구들과 뗏목을 만들어 낙동강을 타고 내려왔다. 이처럼 아빠는 모험을 좋아하고 실행력이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사고 이후 다리를 절게 되고, 뇌 손상으로 인해 이전과 같은 통합적 사고가 어려워졌다. 회사 일을 하다가 다쳤기 때문에 회사에서 매달 가족 생활비와 아빠 개인 용돈까지 나왔다. 경제적인 문제는 없었으나, 아빠 삶의 ‘일’이라는 사회적 영역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렸다. 늘 주도적으로 자기 멋대로 살아온 아빠에게 닥친 현실이 무척 답답했을 것이다. 책 <우울할 땐 뇌과학>에서는 뇌의 두 부위인 전전두피질과 변연계가 우울증을 일으키는 주범이라고 한다. 생각하는 전전두피질은 느끼는 변연계를 조절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데 전전두피질이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빠는 사고로 인한 뇌수술 이후로 우울증을 계속 겪어왔다.
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아빠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빠의 이런 우울한 마음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눈덩이처럼 커진 아빠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아빠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우울증, 불안은 본인 삶을 본인이 통제하지 못한다는 느낌과 상관관계가 높다. - 뇌의 배신(앤드류 스마트)
아빠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나서 나에게도 ‘우울증’이란 녀석이 찾아왔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나를 비난한다고 느껴졌다. 나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는 존재이며, 내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존재 자체가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민폐라고 느껴졌다. 나로 인해 괴로운 이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때 우리 곁에 늘 외로운 소나무 한 그루처럼 있었던 아빠의 마음이 처음으로 이해가 됐다. 아빠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을 걸어오면 어떻게든 피하려 했던 나 때문에 아빠 역시 스스로 ‘쓸모 없는 존재’라고 느꼈겠구나. 그래서 몇 번이고, 자살 시도를 했구나. 이 책을 쓰면서 처음으로 아빠의 상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2학년 첫 학기가 시작된 봄날이었다.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빠에게 문자가 왔다.
“아빠 서울 가는 길.”
멀리 지방에 살고 있는 아빠가 갑자기 서울에 있는 우리 학교에 온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아빠가 보낸 문자를 보고 또 보았다.
‘아니, 왜 갑자기 여길 온다는 거야.’
짜증이 확 밀려왔다. 당시 학교 정문에서 가장 가까운 단과대 앞에서 아빠를 만나기로 했다. 다른 건물에 있던 나는 캠퍼스를 가로질러 걸어가면서 멀리 단과대 앞에 있는 아빠를 봤다. 절룩거리는 아빠를 누가 볼새라 얼른 아빠 팔을 잡고 정문을 향해 내려갔다.
정문에서 길을 건너 맞은 편 골목길로 들어가 다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갔다. 골목 안에 있던 자취방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돌계단을 올라 자취방이 있는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안쪽 왼쪽의 내 방문을 열쇠로 열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나 바쁘니까. 여기서 좀 쉬다가 조심히 내려 가세요.”
그렇게 큰 딸을 보러 서울까지 달려온 아빠를 두 평 남짓의 작은 자취방에 밀어 넣고, 나는 다시 학교로 가 버렸다. 얼마 후에 아빠에게 문자가 왔다.
“아빠, 다시 집에 간다.”
아빠의 문자를 받고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네, 아빠, 잘 가요.”
아빠의 마음을 처음으로 이해한 뒤에 나에게 다가온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영화 ‘나비효과’에서는 특정 장면에서 내가 한 선택에 따라 미래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여러 가지로 보여준다. 이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멀리 보이는 아빠에게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할 것이다. 아빠에게 달려가 ‘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안아주고, 아빠 손을 잡고 학교 구경을 시켜준다. 내가 늘 왔다갔다 하는 단대 건물 안의 구석 구석을 보여주고, 캠퍼스 곳곳을 같이 걸어 다닌다. 다니면서 만나는 친구들에게 아빠를 소개하고, 또 아빠에게 내 친구들을 소개해 준다.
아빠와 함께 학교 식당이나 학교 앞 가장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밥을 먹고 수다를 떤다. 밥을 먹으며 아빠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갑자기 왜 이렇게 나를 찾아오게 되었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나 역시 그동안 서울에 있는 학교에 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빠에게 얘기한다. 그렇게 한참을 아빠와 하하호호 웃으며 수다를 떨고, 아빠는 아쉬운 마음으로 기차역으로 떠난다.
아빠와 단둘이 함께 있었던 이 강렬한 기억을 이렇게 바꿀 수 있었다면, 과연 아빠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혹은 조금 더 오래 우리 곁에 살았을까?
고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나는 SNS에 이렇게 남겼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사회적 타살이다.”
아빠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하고, 나는 아빠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 내가 바로 아빠를 죽음이란 벼랑 끝으로 몰고간 장본인임을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