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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Mar 21. 2022

남편이 생각하는 자격

받을 수 없는 이유 3

우리나라는 ‘자격’이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절대적이다. 취업을 하려면 몇 종 스펙을 쌓아야 하고, 결혼을 하려면 자가 마련에 혼수 준비해야 하고, 출산과 육아를 하려면 아기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의 경제적인 기반이 있어야 하며, 사회초년생이 죽기 직전까지의 노후준비를 해놔야만 살 수 있다.


화낼 수 있는 자격, 상처 줄 수 있는 자격, 비난할 수 있는 자격, 먼저 지랄을 했으니 나도 지랄해도 된다는 자격, 결혼식 하면서 친구를 거를 수 있는 자격, 축의금이나 부의금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자격, 노후준비나 경제적 지원이 준비되어 있어야 임신이나 출산 육아할 수 있다는 자격, 자녀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해줬으면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자격...




나는 내가 국제학교를 졸업했다 하더라도 미국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다. 미국 사람들, 미국인의 문화와 그들의 사고, 그들의 삶의 방식과 인생철학 등등. 내가 다닌 국제학교는 미국 교육과정이 아닌 국제 과정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래서 당시 한국인들 제일 많았지만 서양인들만 보면 유럽권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우리 학교에 미국인의 수가 현저히 적어서 일 수도 있고.


아무튼 나는 미국을 그냥저냥 내 기준에서 받아들일 만(?) 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미드를 봐도 미국인들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뭐 드라마니까 설마 진짜 저러겠어 싶은 안일한 마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세계 강대국 천조국이라는데 당연히 정상인들이 더 많겠지 싶었다.




이곳에서 살면서 나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차이점은 영어권의 문화 내에서도 얼마나 차이가 큰 지였다. 발음의 차이, 스펠링이나 단어, 문법, 이런 드러나는 차이도 있지만, 실제로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심리상태? 랄까 추구하는 가치관? 세계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랄까? 아무튼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미묘하게 다른 것 같았다. 실제 영국인이 쓴 칼럼에도 잘 설명되어있다.


나는 차라리 영국에서 공부했을 때 오히려 더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당시 나의 영어실력은 지금보다 더 형편없었지만 뭔가 말이 통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나만 통했을지도ㅜㅜ 그리고 나는 당시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 남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제대로 글로 설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겪었던 바로는 그 대화의 결이 맞았던 것 같다. 약간의 불평, 약간의 겸손, 약간의 현실 자각, 약간의 걱정 근심, 약간의 신세한탄, 약간의 자조적인 그런 말투, 그럼에도 그 안에 해학이 있는? 냉소적이지만 따뜻한? 어쩔 땐 비꼬기도 어쩔 땐 돌직구를 날리기도 어쩔 땐 돌려 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 말 뜻을 알아듣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말투나 생각에 익숙했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걸 영어로 번역해도 그 대화의 흐름 안에서 어울려 흘러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농담을 해도 함께 웃을 수 있었던 것 같은 나만의 느낌? 그들의 병맛 같은 개그도 차라리 더 웃겼다. 부정적인 상황을 알고 있어야 그거에 대한 대비도 하는 거고, 불평불만이 있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고, 현실을 파악해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니까.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지하는 것, 여기서부터 생각의 시작점이 같았다.




그런데 내가 이민 와서 하와이뿐만 아니라 중서부 사람들 (동부는 모름) 과 대화하면 진짜 대화가 겉돈다는 느낌이 든다. 아 하면 어 하고 어 하면 이 하고 그렇게 대화가 통해야 하는데, 여기는 아 하면 아하하 어 하면 어허허 이 하면 삐유유우우우웅 하고 대화가 진전이 안 되는 느낌. 물론 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다들 열심히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내가 감히 평가할 수 없겠지만... 내가 겪은 미국인들은 대부분 정말 낙관적이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을 것.) 그런데 진짜 소름 돋게 무서운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완벽하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 행복하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충분하다. 지금 이 상태 그대로 만족한다.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 단적으로 설명하자면, 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을 때 이러이러한 현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러저러한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으니 그 면에 집중하자 이렇게 생각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그냥 정말로 진심으로 지금 이대로가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즉 더 이상 나아질 게 없다 고칠 것도 없고 발전시킬 것도 없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다. 그게 진정한 자존감인가? 싶을 정도로 나는 이런 사람이고 나는 (자신의 기준에서는) 완벽하다 이거를 진심으로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근거가 없다. 예전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완전체라는 존재처럼. 그리고 더 소름인 것은 (타인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던) 타인도 동의한다고 믿는 것이다. 만약 타인이 다르게 생각했더라도 그냥 그렇게 믿는 것.


그래서 뭔가의 특혜를 받기 위해서는 어느 어느 자격이 있어야 된다고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자신이 자격이 되지 않더라도 특혜를 받을 만한 충분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뭔가를 성취하려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냥 나에게 그 성취된 결과물을 누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노오력은 아주 작은 뭔가를, 누군가에게는 애초에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자기가 신경 써서 하고 있다는 것을 극대화하며 내가 이만큼이나 신경 썼으니 당연히 그럴 자격이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기준이 너무나도 낮아서 사회 전반적으로 (내 기준) 하향평준화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렇게나 내려간 그 기준에 맞췄다며 스스로를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물론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 성적이 나빠도 배경이 안 좋아도 행복할 수는 있다. 그런데 나는 몇몇 사람들이 진심으로 믿는 게 무섭다. 이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진심으로 느끼는 것이. 그리고 타인도 거기에 맞춰서 행복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것이 너무 무섭다.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잠재력이 너무나도 많지만 그냥 지금 여기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게 정말 두렵다. 죽어라고 노력해도 안돼서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해서 발전의 필요성조차 부재인 상황이 무섭다.


이게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전혀 문제 될 일이 아닌데, 내가 그들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하니 온 몸에서 거부반응이 오는 것 같다. 나의 미래가 이럴 것이라는 게, 앞으로도 쭉, 세상이 뒤집힐 만한 사건이 없다면, 이 상태로 변화 없이 가는 게 정말 충격적으로 무섭다. 희망이 발전이 없는 게 무섭다. 물론 죽어라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대단한 성공을 이룩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힐 만한 사건들도 있다.


내가 감히 뭐라도 된다고 그 사람들을 평가할까. 그 사람들이 그 상황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을 응원해주고 축복해줄 줄 알아야 하는데. 내가 꼰대가 되었나. 여기서 살려면 나도 그들처럼 적응해야 할까. 그러면 여기서 살면서 마음은 편할 듯. 하지만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이미 어느 정도 그쪽으로 가고는 있는 것 같다... 걱정 근심 불평불만이 디폴트였던 내가 햇빛 받고 몇 년을 더 살아야 긍정충이 될 수 있을까? 그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까?




그리고 남편을 처음 만난 지 7년째, 이제야 남편이 이해가 된다. 시니컬하게 말해도 되지만 같은 말이라도 조금 더 긍정적으로 하고, 완벽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발전의 의지가 없는 게 아니라 지금 열심히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기회를 더 나은 도전을 위해 천천히 준비 중인 것.


타인인 내가 감히 평가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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