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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이 Oct 26. 2022

미국 시댁에 처음 인사가던 날

우리의 가족이 된 걸 환영해!


내가 시댁에 처음 방문했을 때, 시부모님은 정말 깨어계신 분이라고 느껴졌다. 크리스마스 전 주였던 12월의 어느 날, 결혼 전에 시부모님께 인사드리기 위해 처음으로 뵙는 거였다.


온갖 걱정을 껴안고 갔지만, 그 당시에는 모두 기우였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평범했던 이 시댁 방문이 나에게 인상 깊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내 예상을 뒤엎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댁에서 나는 매우 환영받았지만, 그렇다고 특별대우를 받지도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내가 거기서 뭘 해야 한다는 큰 기대가 없었다. 시부모님은 호구조사를 하지도 않으셨고, 결혼식에 대해 한마디도 없으셨다. 국제결혼이라는 생각 자체도 안 하신 듯 그냥 똑같이 대해주셨다.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사실 잘 모르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냥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시는 정도였다.


우리 사이를 찬성한다 반대한다는 말씀도 없으시고, 그냥 너희 둘이 행복해라 잘 살아라 이런 덕담도 굳이 안 하셨다. 딱히 연락처를 교환하지도 않았고, 뭔가 특별하게 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일상적으로 흘러갔다. 벌써 가족이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쩌면 우리에게는 익숙한 모습.


아버님 따님과의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다 큰 성인이 어쩌다가 부모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뭔가를 할 수 있게 됐을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합법적인 결혼도 왜 무릎 꿇고 앉아 부모님을 설득해야 할까? 당연히 부모님께서 축복해주시는 관계가 좋긴 하지만, 왜 나와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부모님의 기준에 맞춰 평가해야 할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로도 축복해줄 수 없을까?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 그러니까 그 두 집안을 책임질 자식의 결합이라? 부모는 자신의 인생이 아닌 부모로서의 인생이고, 자식 역시 스스로의 인생이 아닌 부모와 가족이라는 관계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을까?




우리 남편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인생의 의미를 본인이 찾는다는 것이다. 아파트 평수, 차 배기량, 연봉 등의 수치화된 성공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실천해나가는 인생.


사회에서 성공이 보장된 길을 가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는 것. 나이가 들어도 꿈이 있다면 다 포기하고 도전하는 사람. 결혼을 해도 경제적인 책임감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사람. 현실보다는 순수한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 결과보다는 그 과정을 중요시하는 사람.


물론 표면적으로는 모두 맞는 말이다. 그리고 자신은 정말 순수하게 행복할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진심으로 만족하고 살 수도 있다.


시어머니께서는 남편의 결정을 존중해주신다.

"네가 잘할 거라 믿어."

"지금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아."

"네가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네가 최선을 다 했으면 그걸로 충분해."

"네가 행복하다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던 응원 한다."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한다는 건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길러진 뿌리 깊은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 같다.


아이에게 주고 싶은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내 아이가 힘든 길을 선택한다면 진심으로 응원해줄 수 있을까? 내 아이가 지구 반대편 웬 미국인을 데려와서 결혼할거라 한다면 나는 아이를 믿고 축하해줄 수 있을까? 너의 결정을 존중해줄 수 있을까? 상처받을 것이 분명한데, 그 상황을 예방하려는 충동을 참아낼 수 있을까? 아이가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개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가 상처받는 걸 두고만 볼 수 있을까?





https://brunch.co.kr/magazine/kim30064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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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워질 때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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