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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nddesk May 05. 2024

텃밭 자리 배정

텃밭이 치열해 지는 시간 2024년 3월 23일 오전 9시

2024년 3월 23일 오전 9시 

텃밭 자리 배정하는 날이다. 


내 땅, 내 집 앞 마당에서 작물을 키우는 게 아니라 나처럼 텃밭을 빌리는 거라면 단연코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고 다 똑같은 땅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좋은 자리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가령 어디는 아주 조금 더 건조할 수도 있고, 물 뜨러 가는 길 목에 있는 땅이라면 사람들이 많다 다녀서 발 헛디딜 수도 있고, 사람이 구역을 다누다보니 어디는 땅 크기가 조금 더 클 수도 있을테니!



텃밭 자리를 배정 받는, 아니 지정하는 방식은 다른 텃밭도 비슷할 것 같은데 텃밭지기 선생님이 공지한 시간에 온 순서대로 원하는 자리를 고르고 푯말에 이름이 적힌 스티커를 붙히면 된단다.

텃밭지기 선생님의 문자메세지



회사 팀원분들에게 텃밭을 분양받아 주말농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알리고 곧 텃밭 자리 배정이 있다고 하니 '7시부터 가야된다며,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오는줄 아냐며, 일찍 오는 사람들 많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는 '설마요' 라며 웃어 넘겼지만 불안이 엄습했다. 


그래서 나는 자리 배정 날 어떻게 움직일지 계획을 세우고 머릿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저는 P인데요.. 일 할 때는 습관적으로 J모드가 됩니다



예상계획 

3월 26일 오전 9시 텃밭 배정 시작

오픈 런을 위해 8시에 텃밭 도착해야 함

그러기 위해서는 오전 7시에 일어나서 씻고 

7시 반에 OO역으로 가서 거기 오는 OOO번 버스를 타고 

OOO정류장에 내려서 15분 걸어감


변수

아침 잠 많은 우리 엄마

나와 같은 생각으로 텃밭 오픈런 준비하는 주말농부 N명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고대하던 텃밭 자리 배정 받는 날이 되었다.


휴대폰 알림은 7시 정각에 맞춰 울렸고 나는 알림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엄마를 깨우러 갔다. 내 계획에서 변수로 설정하기는 했지만 진짜 변수가 되주실 줄이야..

내 목소리를 들은 엄마가 눈을 뜨는가 싶더니 다시 눈을 살포시 감았고

고개를 드는가 싶더니 다시 베개에 얼굴을 폭 하고 파뭍으셨다. 


엄마가 안 일어나셨다. 눈도 뜨지 못한 채로 '남는 땅 갖자'고.. '아무때나 지어도 된다'고 '포기하자'고 하셨다.

아니이... 엄마... 잠깐만... 엄마가 텃밭 하자고 했잖아.. 이러기야..?


'아... 그냥 나 혼자라도 가야하나...'라고 10분정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극적으로 눈을 뜬 엄마는 비척비척 대며 일어나시더니 '아침은 먹어야 하니까'라며 초코케이크를 꺼내 오셨다. 


야무지게 초코케이크까지 먹은 우리는 텃밭으로 향했다.

텃밭이 있는 동네 초입에 도착하고 나서 시간을보니 벌써 10시였다.  

8시 도착이었던 내 계획 산산 조각났다.

텃밭 가는 길에 찍은 다른 집 텃밭



우리가 계약한 텃밭이 저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 작은 점들은 뭐지..?'라고 생각하며 좀 더 다가가 카메라 줌을 땡겼다.



망했다. 이미 텃밭 자리 배정도 한 것도 모자라서 비닐까지 씌우고 간 분들도 많았다. 



부랴부랴 달려가서 텃밭지기 선생님께 내 이름 말하고 이름표 스티커 받아서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물뜨기 쉬운 수도 근처와 사람들이 많이 오가지 않은 가장자리 땅들은 이미 다 자리 선점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이미 밭을 갈아 엎어두거나 비닐 멀칭까지 해놓은 곳도 있었다.

다들 엄청 부지런하시구나.. 오픈런 했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운데에 비어있는 구좌 중에서 두 자리를 골라야 했다. 

아빠는 다른 일 때문에 못 오셨는데 영상통화하면서 같이 골라주셨다. 



수도시설과는 거리가 20미터 이상 되는 곳들만 남아 있어 물 뜨러 갈 때 고생은 확정이기 때문에 땅 크기를 선택 기준으로 잡고 남은 땅 중에서 그나마 가장 넓은 곳을 골랐다. 

우리가 경작할 텃밭



자리 배정 tip! 

1) 수도 시설과 너무 가까운 곳 보다는 아주 조금 떨어진 곳으로 : 근처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내 작물이 위험할 수 있음

2) 1번이 염려된다고 너무 수도 시설과 너무 먼 곳도 안 된다 : 물 뜨러 가는데 한나절 걸림.. 어깨 힘이 좋다면, 아니 10kg 덤벨이다 라고 생각하고 할 수 있다면 가능

3) 사람 지나다닐 수 있게 중간중간 넓직하게 통로 자리를 터놓는데 그 길 바로 옆 땅 : 진입하기가 수월해서 좋음

4) 가운데 끼인 땅은 별로... : 밭 고르기를 직접 해보니 가운데 끼인 땅은 통로 처럼 넓게 공간이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좁아서 잘못하면 옆집 땅을 밟을 수도 있어서 조심해야 함.. 



오픈런은 실패했지만 전반적으로 흙의 질이 좋고 큰 돌이 많이 없어 늦게 간 것 치고는 꽤 좋은 자리를 구했다고 생각한다.


텃밭 자리도 배정 받았으니 이제는 진짜 텃밭을 운영할 일만 남았다.

텃밭지기 선생님께 들으니 3월 말까지는 냉해를 입을 수 있어서 되도록이면 감자를 제외하고는 모종을 심지 않는게 좋다고 하셨다. (씨앗을 뿌리는 파종은 괜찮다)


그래서 우리는 자리만 정한 채 2주 뒤 다른 모종 심으면서 감자도 함께 심기로 하고 아무것도 심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아빠도 안계셔서 땅을 고르고 비닐을 씌우는 작업을 할 수 없었기도 하고)



에필로그

멋 부린다고 텃밭에 흰색 운동화 신고 가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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