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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Apr 16. 2024

제7관 보험금의 지급 - 2 [完]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오랜만에 신과 대리인들이 모였다. 여전히 신은 하와이얀 셔츠에 반바지 차림이라 혼자만 휴가를 나온 듯한 분위기였고 대리인들도 여전히 중구난방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대리인들이 아직 다 모이지 않았기에 신은 지구를 축소한 구체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고, 3호는 여전히 컴퓨터 앞에 앉아서 쉴 새 없이 서류 작업을 하고 있었으며, 1호와 2호는 그 옆에서 3호를 놀리고 있었다. 1호와 2호의 놀림에 3호가 한소리 하려 할 때쯤,  저 멀리서 4호가 뛰어왔다.

  "헉헉…. 내가 제일 늦었나?"

  "아니, 5호도 아직 안 왔어."

  1호가 대답했다. 2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막둥이가 요새 좀 바빠서 그런가 봐. 좀 있으면 올 거야. 차라리 너처럼 몸으로 때우는 게 좀 덜 바쁠 텐데 꼭 힘든 길을 가더라. 아직 어려서 그런가 애가 꽤 성실해. 아니, 순진한 건가?"

  2호의 비아냥은 익숙한 일인 듯 4호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괜히 멋쩍어진 2호는 괜히 먼산을 바라보았다. 4호가 1호에게 말했다.

  "그런데 누나, 나 저번에 들었거든."

  "뭘?"

  "우리 보험에 숨겨진 조건이 있다는 얘기."

  "맨 처음에 다 설명해 줬었는데? 설마 너 다 까먹은 거야?"

  1호는 4호의 말에 놀라 할말을 잃었다. 둘의 대화를 들은 3호가 눈은 그대로 모니터에 고정한 상태로 손가락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말했다.

  "전에 우리가 설명해 주긴 했지만, 4호는 까먹은 게 아니라 그때 아예 머리에 입력이 안된 거일걸. 차근차근 다시 설명해 줘. 이제는 까먹으면 안 되니까."

  1호는 4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설명해 줄 테니까, 이제는 잊어버리면 안 돼?"

  "응, 알았어."

  "애초에 이 보험은 인간이 너무 많아져서 인간의 수를 천천히 좀 줄여보고자 해서 만든 보험이야. 인간은 자녀를 만들 때 자녀에게 각자 영혼의 1%를 물려주도록 되어있는데, 보험을 통해서 이 부분을 회수하는 거지. 그러면 인간은 자녀를 만들 수 없게 되거나 자녀를 만들 생각을 못하게 되거든. 애초에 자녀를 만들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더욱 그 생각을 확고히 하게 되고, 원래 자녀를 원했던 사람들은 불임이 돼. 그러면 본인들의 삶에는 별다른 영향은 없지만 점점 인구는 줄어들게 되지."

  "그건 나도 대충 기억이나. 근데 그거랑 숨겨진 조건은 무슨 상관이야?"

  "근데 이미 자식이 있는 사람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1호의 말에 4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2호가 끼어들었다.

  "자식을 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

  2호의 말에 1,4호가 모두 눈살을 찌푸리며 2호를 쳐다보았다. 심지어 모니터에서 절대 눈을 떼지 않던 3호도 이 순간만큼은 눈을 떼고 2호를 바라보며 독설을 퍼부었다.

  "형은 행동이나 옷차림만 정중하게 할게 아니라 그놈의 입을 좀 가만히 둘 필요가 있어. 짐승이나 할법한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징그럽지만 그걸 심지어 입 밖으로 꺼낼 줄이야. 생각을 좀 하고 살아 형."

  "야, 내가 진짜 그런 생각을 했겠어? 4호가 멍하니 있으니까 그냥 해본 말이지 뭐."

  1호가 한숨을 쉬었다.

  "동생아? 3호까지는 그렇다 쳐도 우리 4호는 아직 너처럼 때가 묻은 아이가 아니라서 믿어버린단다? 그러니까 좀 닥쳐줄래?"

  "워우… 누난 나한테만 말 험하게 하더라."

  "나도 상대를 봐가면서 말하는 거니까."

  1호는 2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1호는 마저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이미 자식이 있는 사람은 이 보험에 가입할 수 없어. 2호 말처럼 자식의 영혼을 회수해갈순 없으니까. 만약 그랬다가는 부모가 자식을 담보로 보험에 가입하는 꼴이나 다름없잖아? 남의 영혼으로 거래하는 것도 말도 안 되거니와 자식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영혼을 회수당하는 거라 불공평하지."

  1호의 얘기를 들었음에도 4호는 무언가 개운하지 않은 듯한 표정을 했다.

  "아직 이해 안 되는 게 있어?"

  "그런데 저번에 장명석인가 하는 사람은 애가 있는데도 가입시켜 줬잖아. 그럼 안 되는 거 아니야?"

  "아 그때 3호랑 얘기할 때 너는 없었구나. 그 사람 애, 자기 애가 아냐. 아내가 바람 펴서 낳은 자식이야. 그래서 실제로는 애가 없기 때문에 가입할 수 있었지."

  "앗 그런 거야?"

  "응. 그리고 그 사람은 얼마 전에 봤을 때 자기애가 아니란 걸 알아챈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이제 애를 낳을 생각을 하기는커녕 연애조차 생각하지 않게 됐어. 그게 우리가 영혼 1%를 가져간 대가인 셈이지."

  1호의 설명에 4호는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는 듯 입을 벌리고 "아~"하는 소리를 내었다. 여태껏 가만히 지구만 바라보던 신이 몸을 돌려 대리인들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5호는 안 왔나?"

  "금방 올 거예요."

  1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5호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많이 늦었음에도 딱히 서두르거나 하는 기색 없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터벅터벅 걸어왔다. 5호가 오고 있는 것을 눈치챈 3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신 앞에 서서 다 같이 5호가 그들이 서있는 위치까지 오길 기다렸다.

  드디어 다 모인 신과 대리인들 사이에서 3호가 입을 열었다.

  "5호야, 형 누나들 다 와있는데 너무 늦는 거 아니야?"

  "너는 왜 보자마자 애를 갈구냐."

  2호가 3호에게 한 소리했다. 하지만 5호는 딴생각에 잠겨있는지, 둘의 대화에도 멍하니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5호야, 5호야?"

  1호가 불렀음에도 5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호수 씨?"

  "네?"

  5호는 자신의 가명인 오호수를 부르는 말에 화들짝 놀라 1호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에게 2호가 말했다.

  "너, 너무 인간으로서의 삶에 익숙해진 거 아냐?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다지만 너무 그 오호수라는 캐릭터에 심취해 있는 것 같은데. 오죽하면 본명이 아니라 오호수라고 불러야 알아듣냐. 아니 그럴 거면 아예 이름을 다른 걸로 하지, 이럴 거면 누가 부를 때 대답 실수하지 않겠다고 본명인 5호를 넣어서 가명을 5호수로 한 보람이 없잖아."

  "형과 다르게 얘는 성실하니까 완전 몰입했나 보지 뭐."

  3호가 비아냥 거렸다. 2호의 말이 농담인지 훈계인지 구분이 안 되는 4호는 그저 당황한 채로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 다 모였으니까 쓸데없는 말은 그만해."

  1호가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자 옅은 미소를 띠고 그들을 바라만 보던 신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 오랜만에 다 모여서 투닥거리니까 보기 좋네."

  신은 뒷짐을 지고 대리인들 앞에서 왔다 갔다 서성이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세상에 다들 이렇게나 일을 열심히 해줄 줄은 몰랐단 말이지. 안 그래 3호?"

  "그러시겠죠."

  3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너는 진짜 뭔 말만 하면 한숨이냐, 아휴."

  "…"

  "암튼, 니들이 일을 열심히 해도 너어~무 열심해 줘서 좀 곤란하단 말이지. 어느 정돈지 알아?"

  "모, 모르겠습니다."

  4호가 대답했다.

  "어느 정도인지는 3호가 말해줄 거야."

  3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처음부터 자료를 뽑아오라 하던가, 바빠죽겠는데 다시 가서 뽑아야 하잖아…"

  3호의 투덜거림에 신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후 자료를 뽑아온 3호가 자리로 돌아와 신에게 보고했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시범적으로 보험 판매를 진행해 본 결과, 현재 한국이라는 나라의 출산율을 0.78까지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3호의 말에 신이 대리인들에게 팔을 벌려 내밀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0.78 이래 0.78! 너네 좀 도를 지나쳤다고 생각하지 않냐? 내가 가지치기를 하자 그랬지 언제 뿌리를 뽑자 그랬어? 어떡하냐 이제. 저거 어떻게 다시 끌어올릴 거야, 응?"

  "아니, 제 보험 아이디어가 좋다고 할 땐 언제고요."

  "3호야, 아이디어 좋은 건 인정하는데 말이야. 내가 세밀하게 조정하고 싶다고 했잖아, 세밀하게."

  "처음이라 조절이 잘 안 된 걸 가지고 어쩌라는 겁니까. 이제 잘 알았으니까 앞으로 세밀하게 조절하면 되죠."

  "하~ 3호는 진짜 늘 한마디를 안 져요, 한마디를."

  "그럼 이제 어떡하면 될까요?"

  2호가 신에게 물었다. 그러자 신은 손으로 옆의 지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시범 적용이었고, 이제는 지구 전체에 적용해야겠지? 단, 한국처럼 너무 심하게 하진 말고 좀 적당히 조절해 가면서 말이야. 이제는 노하우들이 생겼을 테니 잘 좀 해보자. 너무 열심히 하지도 말고 좀 쉬엄쉬엄하면서."

  신의 말에 대리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다음 주부터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해야 할 테니 가서 좀 쉬어들 둬. 어차피 지치진 않겠지만 형식상으로라도."

  신은 손을 마주쳐 소리를 냈다.

  "자, 이제 해산!"


  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3호는 바로 컴퓨터 앞으로 돌아가 앉았다. 신은 3호에게 다가가 말했다.

  "좀 쉬라니까 이런 것도 말을 안 듣냐 너는."

  "알아서 쉴 테니까 놔두세요."

  3호는 다시 모니터에 눈을 고정시키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1호는 쉬라는 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돌려 멀리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4호가 저 멀리 걸어가는 1호를 뒤따라가며 물었다.

  "누나는 어디 가서 쉬려고?"

  "오랜만의 휴가니까 캘리포니아나 좀 가보려고. 그리고 바로 미국에서부터 일을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너는?"

  "나는 온천에 가보려고 인간들은 온천에 몸 담그면 몸이 좀 괜찮아진다고 하길래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2호는 계속 원래 서있던 자리에 서서 1,4호와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5호를 향해 물었다.

  "5호, 넌 어떻게 하려고?"

  "…"

  "쟤는 이제 5호라고 불러도 아예 인지를 못하는구만."

  2호는 5호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본인도 몸을 돌려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각자 다른 곳으로 향하는 대리인들의 뒤로, 신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해서 다시 말하지만,
아직은 멸망시키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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