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혜연은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즐거웠다. 며칠이 지나도록 특별한 일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인생이 행복하게 흘러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인지 남자친구와 이별을 했음에도 전혀 슬퍼하거나 우울해하지 않고 예전처럼 밝게 지냈다. 혜연이 헤어진 것을 안 주위사람들은 오히려 상실감이 너무 커서 애써 밝은 척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고 많은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들의 염려와 다르게 혜연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얼마 뒤, 혜연은 친한 약사 언니에게 새로 나온 약을 영업할 겸, 수다도 떨 겸, 외근을 나갔다. 그날도 우연히 약을 배달해 주는 장기사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혜연주임님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얼굴이 밝아졌네?"
혜연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별거 아니고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요."
장기사는 트렁크에 약을 싣다 말고 허리를 피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혜연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괜찮아요? 어쩌다가…?"
"그럼요, 완전 괜찮아요.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까 엄청 심한 마마보이였더라고요. 그래서 가차 없이 헤어져 버렸죠. 그래도 미리 걸러서 참 다행이다 싶어요."
장기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고요."
혜연은 장기사를 보며 예전에 장기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장기사님, 전에 저한테 남자 소개해준다고 하셨었죠?"
"아, 그랬었죠. 하나 소개해줄까요?"
혜연은 어차피 이제 더 망할 것도 없겠다, 언제 어디선가 신이 도와줄 것임을 알고 있겠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성미에 맞지도 않겠다, 그냥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에 장기사의 물음에 즉답을 했다.
"네."
혜연의 대답에 장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헤어진 지 얼마 안 됐는데 진짜 괜찮아요? 일부러 다른 남자로 잊으려고 그러는 거 아닌가 해서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 마마보이 놈은 싹 잊었어요.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식더라고요."
"그럼 다행이고요. 그럼 내가 조만간 자리 한번 만들 테니까, 셋이서 가볍게 식사하면서 맥주나 한잔 해요."
"네 저야 좋죠."
"그럼 내가 금방 연락할게요, 다음에 또 봐요."
왠지 혜연보다 장기사가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덩달아 혜연도 기분이 좋아졌다. 장기사의 사람 됨됨이로 봐선 허투루 소개해주진 않을 것 같았기에 혜연은 어떤 사람이 나올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2주일 뒤 금요일 저녁, 혜연은 강남의 한 술집에 앉아있었다. 불과 3일 전에 장기사로부터 전화가 왔고, 금요일 저녁에 강남에서 보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혜연은 흔쾌히 나가겠다 했고, 장기사와 상대 남자는 따로 출발해서 각자 술집에 도착한다고 했다.
혜연이 술집에 도착하니 장기사의 이름으로 이미 예약이 되어있었다. 일부러 끼니가 될 안주가 많은 한식 주점으로 잡았다고 했었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술집들처럼 엄청 시끄럽지는 않고 다들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는 분위기였다.
혜연이 자리에 앉고 5분 뒤, 장기사가 도착했다.
"아이고, 빨리 오셨네요? 많이 기다렸어요?"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오실 때 차는 못 가져오셨을 텐데,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이 정도는 별거 아니에요."
혜연은 각자의 자리에 수저를 세팅하고 컵에 물을 따라 장기사에게 건넸다. 자신의 컵에도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시고 장기사에게 물었다.
"오늘 오시는 분은 어떤 분이에요?"
"아, 일단 외모는 취향을 타겠지만, 꽤 괜찮아요. 은근 같이 일하는 여직원들에게 인기 있는 걸로 봐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래요?"
"일단은 이 친구의 아버지의 친구가, 다니는 회사 사장인데, 사업이 커지니까 감당이 안 됐었다고 하더라고요. 공장 라인이나 직원들 관리가 안 돼가지고 이 친구 아버지게에 부탁한 모양이에요. 근데 이 친구 아버지께서 예전에 일하시다가 사고를 당하셨어서 다리도 하나 없고, 당뇨도 있으셔서 일단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근데 사장님이 하도 간곡하게 부탁을 해서 결국 이 친구랑 아버지랑 같이 거기 들어가서 일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요?"
"그래서 거기서 아버지는 경비로 일하시고 이 친구는 실시간으로 아버지에게 노하우 전수받아서 직접 몸으로 뛰며 현장 관리하고 사람들 관리하고 그랬는데, 생각보다 일을 잘해서 이제는 아버지 없이도 혼자 다 도맡아서 잘하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사장이 그냥 아예 공장장으로 승진시켜서 그렇게 잘 다니고 있어요."
"능력자이신가 봐요?"
"뭐 능력도 능력이고 성품도 너무 좋죠. 보면 나도 전에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잖아요? 지금이야 좀 익숙해지긴 했는데, 다리가 하나 없어서 사람들이 처음 보면 막 놀라고 피하고 그러거든요. 물론 걔네 아버지도 다리가 하나 없으셔서 좀 무던한 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거 감안해도 걔는 나한테도 참 잘해주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처럼 불쌍하게 보거나 그러지도 않고요."
장기사는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 자, 봐봐요. 젊은 나이에 사람들에게 능력도 인정받는 공장장이기도 하고, 얘가 인품도 좋아서 사람들에게 신망도 두텁고, 키도, 인물도 괜찮으니, 여직원들이 가만 두겠어요? 어떻게든 뭐 건덕지 만들어보려고 난리더라고요."
"그럼 그중에 만나셨으면 될 것 같은데."
"에이, 사람일이란 게 또 그렇지 않아요. 얘가 무슨 마음의 상처가 있는지 한사코 연애는 안 하려고 하더라고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꼬치꼬치 캐묻기도 뭐해서 그냥 그러려니 했죠."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나오시게 된 거예요?"
"내가 거의 뭐 바짓가랑이 붙잡고 나오라고 했죠. 내가 아무리 봐도 우리 혜연주임님께 딱 맞을 것 같더라니까요. 내가 볼 땐 둘 다 심성이 고와서 딱일 것 같더라고요. 물론 뭐 그 외에도 많은 게 맞아야겠지만, 일단은 내가 볼 땐 그래요."
장기사의 말에 혜연은 싱긋 웃었다.
"절 너무 좋게 봐주시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예요. 오히려 과소평가하는 거일 수도 있지."
장기사는 말을 많이 해서 목이 탔는지 물 한 컵을 다 비우고 다시 컵에 물을 따랐다.
"이런 얘기하면 웃기지만,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좀 되거든요. 내가 왕년에는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번에 잘 찾아내는 특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딱딱 맞춰서 찾아가지고 도움을 받으면서 살았죠. 덕분에 젊은 나이에 엄청 크게 성공했었어요. 대학 때 만난 친구 놈 덕에 대표이사 직함도 달아보고 월에 몇천만 원씩 벌기도 했었죠. 그렇게 주변 사람들 덕분에 거기까지 간 거라 고마워하고 겸손하고 그랬었야 하는데, 그때는 그게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엄청 오만방자하게 굴었어요. 그러다가 정말로 다 한순간에 다 말아먹어버렸죠. 다리도 그때쯤 잃어버리게 됐죠. 그래서 결국 지금은 이렇게 된 거예요."
"이렇게 되셨다뇨. 충분히 잘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암튼, 그래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자신 있어요. 그렇다고 막 반드시 둘이 잘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주는 건 아니에요. 그냥 진짜 둘이 잘 맞을 것 같아서 그런 거니까, 부담 갖지는 말고 가볍게 친구 만나서 술이나 마시는 기분으로 즐기다가 가요. 계산은 어차피 내가 할 거니까."
혜연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씀이세요. 안 돼요. 제가 낼게요."
"에헤이, 나 그 정도는 벌어요 그래도. 아니면 나 돈 못 번다고 무시하는 거예요?"
장기사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혜연을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