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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Apr 08. 2024

제6관 사랑 보험 - 10

  회사 동기의 소개로 만난 남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딱히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평범한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외모도 키도 딱 표준이었으며 성격도 모나지 않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성격이었다. 혜연과의 첫 만남에서도 가볍게 식사를 하고 커피를 한잔했을 뿐이었지만 사람의 됨됨이가 꽤나 좋아 보였다. 그래서 남자가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혜연은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가볍게 술도 한잔 했다. 남자는 술을 잘 못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실줄 안다고 했고, 혜연도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적은 술을 시켜놓고 꽤 오랜 시간을 얘기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남자와 혜연의 관심사가 딱히 겹치는 것은 없었지만, 남자가 워낙 말을 잘했기에, 혜연은 남자의 말을 꽤나 재밌게 들을 수 있었고, 그런 혜연의 반응에 남자도 신이 나서 계속 재밌는 얘기를 했다.

  세 번째에는 둘이 같이 놀이 공원에를 갔다. 그동안 데이트 다운 데이트라고는 해본 적 없는 혜연이었기에, 남자의 제안에 놀라기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이번 기회에 아예 제대로 즐겨보겠다는 생각을 하고선 놀이공원에서 남자를 만났다. 남자도 꽤 많이 들떠있기는 했지만 정작 혜연보다 놀이기구를 잘 타지 못했다. 혜연이 타고 싶어 한 놀이기구들을 하나씩은 다 따라서 타주기는 했지만, 몇몇 놀이기구는 한번 더 타고 싶다는 혜연의 제안에 난색을 표하며 출구 쪽에서 기다릴 테니 다녀오라고 했다. 혜연은 같이 타지 못하는 점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혼자서라도 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원 없이 놀이기구를 탔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남자는 혜연을 차로 바래다주며 혜연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혜연은 농담조로 "만약 지금 거절하면 저 못 내리는 건가요?"라고 말했고, 남자는 "아뇨 반대로 지금 내려서 집까지 뛰어가야 하실지도요"라며 능숙하게 받아쳤다. 잠깐의 고민 후 혜연은 남자의 고백을 승낙했고, 그렇게 혜연의 세 번째 연애가 시작되었다.

  

  혜연의 세 번째 연애는 그야말로 평범하게 진행되었다. 매일같이 연락을 하고 주말 하루는 만나서 데이트를 즐겼다. 가끔은 둘의 성격차이로 인해 싸우기도 했지만, 그래도 최소 하루정도 지나면 남자가 먼저 혜연에게 연락해서 사과하고 같이 잘 풀었다. 혜연은 왜 굳이 하루 뒤에야 사과하는지 물었지만, 남자는 하루정도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아예 다투게 되면 서로 다음날 연락을 하는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다. 그렇게 둘은 어느덧 두 달, 세 달을 지나 무난하게 연애를 지속했고, 어느덧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그즈음 혜연은 자연스레 결혼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혜연의 나이가 결코 많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싶었다. 혜연은 항상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둘을 쏙 빼닮은 아이를 낳는 것을 꿈꿔왔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이를 가지기 어려울 터라,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굳이 연애를 질질 끄는 것보다는 빠르게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남자도 딱히 결혼을 생각해 볼 법한 그런 나이였기 때문에 혜연이 먼저 결혼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하지만 남자는 혜연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했고, 혜연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말을 꺼냈나 싶어서 알겠다고만 하고는 생각이 정리된 남자가 먼저 얘기를 꺼내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혜연이 남자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남자가 결혼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먼저 말해 주었다.

  "혜연아, 우리 미래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남자의 말에 혜연은 반색하고 물었다.

  "응, 오빠. 생각 좀 해봤어?"

  "응 근데 아직은 좀 어려울 것 같아."

  남자는 혜연의 시선을 피했다. 혜연은 그런 남자를 보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한 거야? 

  "너도 나도 아직 좀 어리다고 생각해. 준비도 덜됐고."

  "준비라는 건 어떤 걸 말하는 거야? 돈?"

  "돈도 그렇지만 마음의 준비도 그렇고, 이것저것."

  남자의 말을 들은 혜연은 조금 고민에 빠졌다. 혜연도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건 같이 살면서 같이 노력해서 극복해 나갈 수도 있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모아놓은 돈이 별로 없다는 건 혜연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문제는 남자가 결혼에 대한 의지가 너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혜연은 남자의 속만음을 더 알아보기 위해 자세하게 파고들며 물었다.

  "오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줄래? 나도 오빠가 어떤 게 마음에 걸리는지를 알면 좋을 것 같아. 그래야 준비도 하고 하지."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혜연의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그건 내일 얘기하면 안 될까?"

  "내일?"

  "어."

  "왜 굳이 그 얘기를 내일까지 기다렸다가 해? 지금 하면 되지 않아?"

  "지금은 안돼."

  남자의 대답이 마뜩잖았으나, 혜연은 더 파고들어 봤자 별게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일단은 평소처럼 데이트를 즐겼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혜연과 남자는 전화를 통해 다시 한번 결혼에 대해 논의했다. 하지만 남자의 대답은 예상외였다.

  "일단은 부모님도 허락하지 않으셨어서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부모님께 말씀드렸어?"

  "어."

  "나는 부모님께 말씀드리기 전에 오빠의 생각이 어떤지를 듣고 싶었던 건데."

  "…"

  "그럼 부모님은 왜 안된다고 하셨어?"

  "엄마는 아직 이르대."

  "…?"

  혜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게 끝이야, 오빠? 아버지는?"

  "아빠는 엄마가 하잔대로 하시니까."

  "그래서 오빠 생각은 어떤데?"

  "나는 엄마말이 맞는 것 같아."

  "어째서?"

  "…"

  혜연은 답답함을 느꼈다. 계속해서 대화를 하려고는 하고 있지만, 대화가 전혀 진전되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의 속마음도 모르겠거니와, 남자의 부모님이 어떤 이유로 반대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오빠, 왜 자꾸 얘기를 안 해주는 거야? 나는 우선 오빠 생각이 궁금하고, 어머니는 왜 반대하시는지 그게 궁금해."

  "…"

  그럼에도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알았어, 오빠. 오늘 전화로 얘기하기 그러면 주말에 만나서 얘기해 보자."

  "그래."

  혜연은 약간의 짜증과 함께 휴대폰을 신경질적으로 침대 위에 던졌다. 그리고는 침대에 엎드려 그대로 얼굴을 파묻었다.

  "하아"

  혜연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가만히 멈추고,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혜연의 귓가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나 전화 다했어."

  혜연은 고개를 돌려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화를 끊었다고 생각했지만, 전화는 끊어지지 않은 채였고, 휴대폰에서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걔는 뭐래?"

  "자꾸 물어봐."

  "뭘?"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라 엄마가 왜 반대하는지."

  "안된다면 안 되는 거지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그년은"

  남자친구 엄마의 목소리에 혜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들고 음소거로 바꾼 다음 귀에 대고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어제 내가 하란 대로 다 잘 말했지?"

  "응 다 했어 엄마."

  "그래, 아들. 엄마가 그년이랑 연애는 봐줘도 결혼은 못 봐줘. 결혼은 좀 제대로 된 여자랑 해야지."

  "응."

  "이번에는 예행연습만 하는 거야 알았지? 이번 주말에 가서 또 결혼얘기 꺼내면 아직 반년은 더 사귀어 보고 결정하자고 그렇게 얘기해. 그게 네 생각이라고. 알았지?"

  "응 알았어. 걱정 마 엄마."

  "그래, 그럼 얼른 저녁부터 먹자."

  혹시나 남자친구가 휴대폰을 건드렸다가 아직 전화가 끊어지지 않은 것을 발견할까 봐 혜연은 얼른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자 혜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첫 번째 남자친구는 바람둥이였고, 두 번째 남자친구는 몇 년간 뒷바라지하던 자기를 걷어차고 잠수를 타더니, 이제 세 번째 남자친구는 극도의 마마보이였다는 사실에 기가 찼다. 일단 혜연은 다급하게 남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가 결혼생각이 없으니, 우리는 굳이 더 만날 이유는 없는 것 같아. 우리 그만 만나. 그동안 고마웠어.'

  혜연은 남자가 마마보이라는 것을 알아챘다는 걸 숨긴 상태로 빠르게 이별을 고했다. 혜연이 메시지를 보내고 10분 뒤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바로 남자의 번호를 차단했다. 

  혜연은 다시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잠시 가만히 멍하니 있다가 얼굴을 파묻은 상태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방 밖에서 엄마의 잔소리가 들어왔다.

  "시끄러워, 너 미쳤어?"

  엄마의 호통에 혜연은 다시 조용히 고개를 파묻고만 있었다. 잠시 후 혜연은 침대에서 내려와 침대를 등받이 삼아 바닥에 앉았다. 크게 한숨을 푹 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혜연은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내 인생은 왜 이모양일까."


  그리고 잠시 후 혜연은  몇 년 전 학교 교양관 벤치에서 만났던 사람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이 소설이라고 생각했던 바로그 보험 계약서에 서명을 것도 생각이 났다. 한번 기억이 돌아오자 그때의 기억은 마치 어제일처럼 점점 더 선명해졌다. 덕분에 혜연은 지금 그 잊었던 기억이 다 돌아온 것을 토대로, 지금 막 본인의 인생이 망한 것이라는 걸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혜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의 인생이 어디가 망한 것인지를 알 수 없었다. 부모님도 멀쩡히 살아계시고 건강하시며, 본인도 지극히 건강했다. 직장도 잘 다니면서 돈도 잘 벌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은 편이었다. 친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친구라 할만한 사람들은 있는 편이었고, 최근에는 힘든 일도 딱히 없었기에 의문은 더욱더 깊어져만 갔다.

  하지만 어쨌든 신은 혜연의 인생이 망한 것이라 판단을 한 것이었고, 그게 혜연의 입장에서는 딱히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적어도 앞으로의 인생에서 지금보다 더 밑바닥 인생을 살 확률은 적다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조금 전까지의 우울함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오히려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활력이 돌았다. 심지어 앞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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