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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Apr 02. 2024

제6관 사랑 보험 - 8

  혜연은 신입 연수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배워야 할 건 산더미였고 야근도 꽤 많았지만, 그래도 새로운 걸 배우는 재미와 돈을 버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을 했다. 내근도 좋았지만 외근을 나가 여러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며 세일즈를 하는 것도 꽤나 성격에 잘 맞았다. 가끔은 야근이나 회식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꿋꿋하게 잘 버텨내었다. 또 때로는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하기도 했지만, 워낙 당찬 혜연인지라 단호하게 대처했고, 그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혜연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없어졌다. 

  혜연은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종석의 뒷바라지를 잊지는 않았다. 평일에도 최대한 전화를 걸어 밥은 잘 먹었는지, 몸은 괜찮은지 확인하고 진심을 다해 격려해 주었다. 주말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반드시 학교 도서관에 가서 종석을 만나고 왔다. 갈 때마다 종석은 퀭한 모습에 다크서클이 꽤 진해져 있었기에, 최소한 하루는 쉬라고 얘기하며 최대한 맛있는 음식들을 사주었고, 종석이 공부하는 동안에는 종석의 자취방에 가 자취방을 깔끔하게 청소하고 나왔다. 그리고 항상 청소가 끝나면 종석을 위해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서 남기고 나왔다.

  한창 날이 따뜻해질 무렵, 이번에도 종석은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역시나 혜연은 자기 일처럼 한껏 기뻐하며 휴가를 낼 테니, 같이 짧게 여행을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종석이 부담되지 않도록 혜연의 부모님 차를 빌려 국내 여행을 가자고 했다. 기름값과 숙소 정도만 나눠 내고 나머지는 혜연이 다 부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종석은 2차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며 여행을 한사코 거절했다. 혜연은 그런 종석이 못내 아쉬웠으나, 수험생이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고 하니 차마 강제로 끌고 갈 수도 없었다. 


  "알았어, 그럼 나중에 많이 놀러 다니자."

  혜연의 말에 종석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나중 얘기 좀 안 하면 안 돼?"

  종석의 말에 혜연은 당황하며 물었다.

  "왜 그래?"

  "아니 내가 무슨 사채 쓴 것마냥. 나중에 갚아라. 나중에 해달라. 나중에 하자. 왜 자꾸 그래?"

  "아니… 네가 시험준비로 바쁘니까 그냥 나중에 같이 많이 놀자는 거지, 뭐 갚으라는 게 아닌데 왜 그래? 요새 스트레스 좀 많이 받아?"

  "그만해! 내가 뭐 공부 하루이틀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스트레스야, 스트레스는! 그리고 언제 내가 너보고 놀지 말라 그랬어? 왜 나 때문에 못 논 것처럼 말해?"

  혜연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말해. 너 때문에 못 놀았다는 게 아니라, 너랑 놀고 싶고 하고 싶은 거 많으니 나중에 같이 하자는 거였어."

  혜연의 해명에도 종석은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보였다.

  "됐어. 집에나 가."

  종석은 그 말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휴게실을 나섰다. 혜연은 그런 종석에게 화가 나기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앞서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 버스 안에서 혜연은 종석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종석아, 부담을 느꼈다면 미안해. 나 너 부담 주려고 그런 게 아니야.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 텐데 나중을 생각하면서 같이 힘내보자는 의미였어. 나는 너 잘될 거라고 믿어.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줘.'

  하지만 종석에게 답이 오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로 혜연과 종석은 딱히 화해를 하진 않았지만 혜연은 그래도 평소처럼 종석을 대했다. 평일에는 항상 전화하고 주말이면 종석을 보러 도서관을 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종석이 혜연을 대하는 태도가 쌀쌀맞아졌지만 혜연은 수험 스트레스로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크게 개의치 않았다. 길어야 반년정도만 더 고생하면 될 것이었고, 설령 시험에 떨어져 취업준비를 해야 한다 한들, 그건 혜연이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도 있었으며, 수험생활과는 다르게 나름 여유를 가지고 준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느덧 여름이 다가오고 혜연은 회사에 완전히 적응한 상태가 되었다. 워낙에 싹싹한 성격이라 약을 배달해 주는 배달부에게도 기사님이라 부르며 친근하게 말을 걸며 친해졌고, 친해진 약사에게는 언니라고 부르며 종종 같이 맛있는 디저트를 사 먹으러 다니기도 했다. 어떤 의사들은 며느리 삼고 싶다며, 자기 아들이 어떤지 사진을 보여주며 물어보기도 했고, 다른 병원이나 약국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점점 고정적으로 거래하는 병원과 약국들이 많이 생겼고, 연초와는 달리 어느 정도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혜연은 남는 시간은 모두 종석을 뒷바라지하는데 썼다. 종석의 공부에 방해될까 봐 주말을 아닐 때는 도서관으로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전보다 더 종석의 자취방을 자주 청소하고, 종석이 입을 옷가지 등을 사다가 몰래 넣어놓곤 했다.

  다시 1년 만에 종석은 2차 시험을 보았고, 이번에도 혜연은 시험을 마친 종석을 위로하며 쉴 것을 권유했으나, 종석은 혜연의 권유를 신경질적으로 거절했다. 그런 종석의 모습에 혜연은 마음이 많이 상하기도 했으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석은 주말에도 면접을 대비해 스터디를 해야 하니 당분간은 주말에도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했다. 혜연은 아예 얼굴을 볼 수 없는 게 내심 섭섭했으나,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주말 저녁에 만나는 것으로 합의했고 그걸 위안 삼아 마음을 달랬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나, 날이 다시 쌀쌀해질 무렵, 종석은 드디어 2차 시험에 합격했다는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합격의 기쁨도 잠시, 마지막 관문인 면접이 남아있었기에, 기뻐할 틈은 거의 없었다. 이번 면접만 통과하면 최종 합격이었지만, 반대로 이번 면접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동안의 고생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종석은 더욱 예민해졌고, 혜연은 그런 종석을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최대한 놔두었다. 

  그리고 대망의 면접날, 이러니 저러니 해도 종석은 어떻게든 면접을 치러내었고, 혜연은 아예 휴가를 내고 면접장소인 교육원 앞에 죽치고 앉아서 면접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면접을 마치고 나온 종석을 반겨주었다. 종석은 그 어느 때보다 피로해 보였지만, 그래도 일단은 큰 산을 넘었다는 생각에 혜연도 종석도 매우 기뻐했다. 혜연은 그런 종석을 위해 종석을 예약해 두었던 음식점으로 데리고 갔고, 거기서 둘은 나름의 축배를 들며 종석의 수험생활이 끝났음을 축하했다. 종석이 매우 피곤해했기에 식사를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혜연은 자신이 취업에 성공했을 때보다 더욱 기쁜 날이라 생각했다. 

  이제 결과발표까지의 한 달간은 말 그대로의 자유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혜연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휴가를 내고 종석과 여행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긴장이 풀려서인지 종석은 그대로 내리 일주일을 앓아누웠다. 덕분에 혜연은 주말에도 종석의 자취방으로 가서 종석을 간호했고, 종석은 주말 내내 누워서 요양을 해야만 했다. 

  종석이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에도 종석은 생각보다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기에 대부분의 데이트는 혜연이 종석의 자취방에 찾아가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합격을 하든 하지 않든, 종석은 복학을 해야 했고, 그럼 최소한 겨울방학만큼은 온전히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기에 혜연은 지금 당장 데이트를 하지 못하게 된 것 정도는 개의치 않았다.

  '1년도 기다렸는데 그깟 한 달 쯤이야'


  그리고 대망의 최종합격 발표날, 혜연은 초조한 마음으로 종석의 연락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혜연이 퇴근할 무렵까지도 종석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다. 혹시 떨어진 건 아닌지,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된 혜연은 퇴근과 동시에 종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만 계속 갈 뿐, 종석은 도통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걱정이 된 혜연은 바로 종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종석아, 어떻게 됐어? 지금 전화받기 좀 곤란해? 결과 알려줄 수 있을까?'

  하지만 혜연의 메시지에도 계속 답장이 없었기에, 집에 가던 혜연은 방향을 틀어 종석의 집으로 향했다. 종석의 집에 도착한 혜연은 종석의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려했지만 왜인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혹시나 잘못 눌렀나 싶어 하나하나 다시 천천히 눌러보았지만 여전히 비밀번호가 틀렸음을 알리는 경고음이 울리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인가 싶은 혜연은, 혹시나 하면서 다시 비밀번호를 눌러보았지만, 비밀번호를 3번이나 틀렸기에 3분간 문을 열 수 없음을 알리는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기만 할 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초인종을 눌러보아도 아무 응답이 없었고, 귀를 기울여봐도 안에서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혜연은 혹시 종석의 몸에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집안에 쓰러져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119를 불러서 문을 따고라도 들어가야 하나 생각했지만, 일이 너무 커질 우려도 있었기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어야 했다. 

  혜연은 건물을 나와 곧장 자취방 옆의 공인중개사 사무소에 들어가, 중개사에게 종석이 살고 있는 자취방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안에서 쓰러졌을지도 모르니 와서 문을 좀 열어줄 수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했다. 중개사가 휴대폰 연락처에서 집주인을 찾아 전화를 걸고 집주인에게 혜연이 말한 얘기를 그대로 전달했다.

  "네. 네. 어, 그래요? 근데 이 아가씨는 모르는 눈친데? 일단은 제가 얘기해 볼게요."

  중개사는 전화를 끊고 혜연에게 말했다.

  "아가씨, 거기 남자친구가 살았다는 거지?"

  "네, 맞아요. 근데 지금 연락도 안되고 불도 꺼져있고 문도 안 열리고 그래서 걱정이 돼서요."

  "근데, 집주인 말이 거기 살던 총각은 엊그제 이미 방 빼고 나갔다던데?"

  "네?"

  중개사의 말에 혜연은 머리가 얼얼해짐을 느꼈다.

  "그럴 리가요. 계약기간 아직 남았을 텐데?"

  "아니, 들어보니까 계약기간은 지난달에 끝났고, 며칠만 더 있게 해달라고 하면서 며칠치 월세만 더 내고 있다가 엊그제 나갔다는데."

  충격적인 소식에 혜연은 잠시 정신이 멍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혜연을 본 중개사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가씨, 정말 몰랐어? 에구 어쩌면 좋아."

  "… 일단 알겠습니다."

  혜연은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소를 나섰다. 그런 혜연의 등 뒤로 중개사와 때마침 놀러 온 중개사의 친구가 나누는 대화소리가 들렸다.

  "여자친구 버리고 튀었나 봐?"

  "가끔 그런 놈들이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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