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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Mar 30. 2024

제6관 사랑 보험 - 7

  혜연은 가뿐하게 하계 인턴 채용에 합격했다. 워낙에 짱짱한 스펙을 갖고 있어서 3학년때도 인턴을 했을 정도라, 딱히 혜연이 떨어질 이유는 없었고,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따라서 얼마 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혜연은 출근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혜연이 출근할 즈음에 종석은 2차 시험을 봐야 했다. 따라서 혜연은 그전에 더더욱 종석을 뒷바라지하며 2차 시험을 보조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종석이 2차 시험에 붙으면 혜연은 맘 편히 인턴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었고, 종석도 그 사이에 면접을 준비하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둘은 다시 두 달간의 도서관 생활에 들어갔다. 이제는 너무 도서관에만 붙어있어서 도서관이 아닌 장소에서 만나는 게 어색할 정도였다. 종석은 2차 시험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다고 했고, 혜연도 그 말에 동의하며 최대한 종석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기존처럼 빠르게 점심을 먹는 것과 휴게실에서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만 데이트를 대체하기로 했다. 1차 시험때와 다르게 2차 시험은 시험 전에 든든하게 먹이기보다는 최대한 평소와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직접 도시락을 만들어주어 저녁 식사를 대체하게 했다. 어떻게 해서든 컨디션을 떨어뜨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종석은 약간의 부담을 느끼긴 했지만, 이미 둘 사이에 한번 합의가 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종석은 군말 없이 혜연의 제안을 받아들여 저녁은 혜연이 싸다 주는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도시락을 먹기 전에 혜연에게 꼭 합격해서 보답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잘 먹겠다는 인사 대신이 되었다. 

  그리고 6월 말, 종석은 2차 시험을 치렀고, 혜연의 인턴 생활이 시작되었다.


  혜연의 인턴생활은 생각보다는 많이 수월했다. 한 제약회사의 인턴으로 들어갔는데, 워낙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온 혜연이었기에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과 이쁨을 받았다. 혜연은 학부생이었기 때문에 성적이 좋아도 연구소를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경영직군이나 영업직군 중 영업으로 지원을 했는데, 생각보다 영업 일이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실적이 좋은 선배들은 오전 중으로 병원과 약국을 돌고 오후에도 외근을 나간다는 핑계로 퇴근을 하곤 했다. 법인카드도 꽤 자유롭게 썼고, 회식 때면 늘 좋은 곳으로 가서 맛있는 음식들만 먹었다. 덕분의 혜연은 퇴근 후에도 딱히 피곤을 느끼지 않았고, 그래서 퇴근하면 곧바로 종석을 만나러 갔다. 

  2차 시험을 본 종석은 아무래도 느낌이 불안하다며 불안해했지만, 혜연은 종석이 붙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너무 장기간 공부만 하다 보니 불안감이 극심해진 것이리라 생각하여 저녁마다 종석을 데리고 회사 선배들이 알려준 좋은 음식점들을 찾아다니며 종석을 위로했다. 

  하지만 종석에게 그런 위로들은 마음의 위안이 되기보다는 점점 더 부담으로 다가왔다. 전에는 기껏해야 학교 근처의 밥집에서 밥을 사주거나, 직접 도시락을 정성껏 싸주는 정도였지만, 이제 혜연이 종석을 데리고 가는 가게들은 그동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비싼 곳들 뿐이었다. 그래서 종석은 면접 준비를 해야 한다며 최대한 혜연의 호의를 거절하려 했지만, 혜연은 합격발표가 아직 두 달이나 남았기에 지금 미리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두어야 면접 준비를 할 수 있다는 말로 밀어붙였다. 

  그렇게 혜연은 인턴 생활로 번 돈을 모조리 종석에게 쏟아부었고, 그렇게 두 달간의 여름방학과 인턴생활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날씨가 선선해질 무렵 혜연은 대학교 마지막 학기를 시작하게 되었고, 종석은 초조하게 합격 발표만을 기다렸다. 아직 합격 발표가 나지 않았기에 온전히 면접준비에 전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면접을 대비해서 계속 책을 들여다보고 면접 스터디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주말에는 혜연과 간간히 데이트를 즐겨보려 했지만, 데이트 때에도 계속해서 혜연이 돈을 써야 했기에, 종석은 미안해서라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데이트를 거절하곤 했다. 그런 종석의 마음을 눈치챈 혜연은 되도록 공원 산책이나 근처 산에 올라갔다 오는 식의 데이트를 제안했고, 종석도 그런 데이트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2차 시험의 결과가 발표되었고, 종석은 2차 시험에 떨어졌다.


  종석과 혜연은 학교 도서관 1층의 도서 열람용 PC에서 같이 시험결과를 확인했다. 결과를 확인한 종석은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렸고, 혜연도 할 말을 고르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어떻게든 위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혜연은 종석에게 말했다.

  "올해 경쟁률이 많이 높았나 보다. 운이 좀 없었네. 너 공부 엄청 열심히 했잖아. 이거는 운이 나빠서 그런 거야."

  혜연의 말에도 종석은 모니터를 응시한 채 미동조차 없었다. 그런 종석을 보며 당황한 혜연은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

  "짜식들이 뭘 모르네. 우리 종석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 문제를 엉망진창으로 냈었구만? 우리 종석이 같은 인재를 떨어지게 만들구 말이야. 하여튼 안될 놈들이라니까."

  혜연은 종석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종석을 보니 더욱 민망해질 뿐이었다. 

  "종석아, 괜찮아, 괜찮아. 또 보면 돼. 내가 볼 때 너 무조건 붙는 건데 이번에 문제가 이상했던 것 같아. 담에 또 하자. 꼭 될 거야. 그럼."

  잠시 후 종석의 코가 빨개지더니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동파된 파이프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것 마냥,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종석의 눈물을 본 혜연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종석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혜연은 도서관에서 뛰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사서에게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는 종석을 따라 도서관을 뛰어나갔다. 

  도서관 정문을 나선 혜연은 종석을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렸으나, 애써 찾을 필요도 없이 도서관 옆 벤치에서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벤치 근처로 간 혜연은 종석이 우는 것을 위로하려 다가가려다 지금은 그냥 울게 놔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건물 모퉁이에 숨어서 종석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종석은 울음을 그쳤고, 혜연이 종석에게 다가가 종석의 옆에 앉았다. 종석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 자국으로 엉망이 되었고, 눈은 붓다 못해 뜨고나 있긴 한 건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종석은 고개를 숙이고 혜연을 쳐다보지 않았다. 혜연은 그런 종석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말했다.

  "다음엔 잘할 수 있을 거야. 너무 마음상해하지 마.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너 그동안 너무 고생했으니까 주말에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원 없이 놀자. 응?"

  "…"

  종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혜연은 그런 종석을 가만히 바라보며 입을 열길 기다렸다. 잠시 후 생각을 마친 종석은 혜연과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혜연을 보지 않고 말했다.

  "우리… 그만 만나자."

  헤어지자는 종석의 말에도 혜연은 딱히 동요하지 않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얌마. 너 지금 그거 시험 떨어졌다고 그러는 거야? 사내시키가 뭐 그런 걸로 헤어지자 그래?"

  "…"

  "시험 그까짓 거 또 보면 되지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래."

  "알잖아. 올해로 끝인 거. 나 빨리 복학해서 졸업하고 돈 벌어야 해."

  "야, 그럼 너 돈 벌어서 나 호강시켜 줘야 할거 아냐. 지금 헤어지자고 할 때야?"

  "…"

  "나 기다리게 한 거 미안해하는 건 알겠는데, 너 공부하는 동안 나는 뭐 하염없이 너만 기다리고 그랬던 거 아니잖아. 나도 내 공부하고, 인턴도 하고, 할 거 다 했어."

  여전히 종석은 혜연을 쳐다보지 않았다. 혜연은 그런 종석을 잡아당긴 다음 두 손으로 머리를 잡고 고개를 억지로 돌려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종석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혜연은 종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야, 강종석. 나 좀 봐봐."

  혜연은 행여 종석이 다시 고개를 돌릴까 손에 온 힘을 주어 종석의 머리를 고정시켰다.

  "너 그냥 1년 더해. 필요한 건 내가 도와줄게."

  종석은 머리를 감싼 혜연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말했다.

  "아냐. 그럴 순 없어. 지금까지 네가 나한테 도와준 게 얼만데. … 나 그냥 시험은 포기하고 취직할래. 그래서 너 호강시켜 줄게."

  혜연은 두 손을 종석의 어깨 위에 올렸다.

  "아냐. 너 그냥 시험 봐. 너 내년엔 될 것 같애. 그담에 호강시켜 줘. 그때 아주 니 골수까지 뽑아먹을라니까."

  혜연의 말에 종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울고 웃고 아주 개판이다. 개판."

  그런 종석을 보며 혜연도 웃었다.


  결국 혜연의 설득에 종석은 1년 더 시험을 준비해 보기로 했다. 대신에 혜연과 종석은 딱 1년만 더 해보고 안되면 깔끔하게 접기로 약속했다. 종석의 부모님은 당연히 한사코 말렸지만, 놀랍게도 혜연이 직접 종석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뒷바라지를 할 테니 걱정 말고 1년만 기다려주시라, 1년 뒤에도 안되면 꼭 취직할 수 있도록 돕겠다며 설득을 했고, 아들 여자친구의 존재조차 모르셨던 종석의 부모님은 꽤 충격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1년 더 시험 준비를 하는 것에 동의했다.

  다시 시험을 보기로 결정이 되자, 다음 해 시험을 보기 위해 종석은 다시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혜연도 같이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어차피 혜연도 이제 원서를 넣어야 했고, 서류에 합격하면 직무정석검사를 통과해야 했기에, 그 공부도 할 겸 계속 도서관에서 종석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다만 예전과는 다르게 혜연은 더 거침없이 종석에게 돈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종석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심 저녁은 꼭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게 했다. 종석은 최소한 밥값은 각자 내자고 했지만, 혜연은 자기가 사줄 때 열심히 먹고 나중에 어떻게 호강시켜 줄지 잘 생각해 놓으라며 으름장을 놓고는 본인이 다 지불했다. 종석은 그런 혜연이 너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미안하기도 해서 혜연이 계산할 때마다 스스로가 조금 비참해 보이기도 하고 비굴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종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혜연은 계속해서 밥을 사주고 음료나 간식, 필기구, 때로는 공부에 필요한 책도 사다 주었다.

  날이 점점 더 선선해지다 못해 추워질 무렵, 혜연은 인턴 생활을 했던 제약회사에 합격했다. 인턴에서 바로 전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지만, 워낙 인턴생활이 즐거웠던 터라, 인턴생활을 했던 영업 부서에 지원을 했다. 그래서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인턴 때 친하게 지낸 선배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합격 사실을 전했고, 그들도 다 같이 기뻐해주며 혜연이 오기만을 기다리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다음, 혜연은 바로 종석에게 달려가 자신의 합격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으나, 약간은 고민에 빠졌다. 종석이 시험에서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데다가 자신에게 은근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 소식이 오히려 종석의 마음을 더 우울하게 만들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혜연이 취업에 성공했다는 말은, 이제 그동안처럼 종석의 바로 옆에서 종석을 지지해 주고, 도와줄 수 없게 되었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합격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평소처럼 둘이 휴게실에 마주 앉았을 때 별일 아닌 것처럼 얘기를 꺼냈다.

  "나 여름 때 인턴한데 있잖아."

  "응."

  "내가 그때 거기 너무 좋다고 했었잖아?"

  "그랬었지."

  "나 거기 합격했어."

  말을 마친 혜연은 민망함에 컵을 들어 입을 대고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종석은 그런 혜연을 바라보며 무언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곧 미소를 지으며 축하해 주었다.

  "정말? 축하해 너무 잘됐다."

  "고마워."

  그리고 둘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럼 이제 도서관에는 못 오겠네?"

  "아무래도…. 하지만 괜찮아! 주말에는 올 수 있어!"

  "아냐, 주말에는 너 쉬어야지. 가뜩이나 평일에 일하느라 힘들 텐데 주말에는 좀 쉬어."

  혜연의 눈에는 종석의 표정이 왠지 모르게 어두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알았어. 내가 쉬고 싶으면 쉴게. 무리 안 할 거야."

  "응."

  "그리고 나 없어도 밥은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야 해. 내가 여기 식권 사 왔어."

  혜연은 가방에서 몇십 장이나 되는 식권 꾸러미를 꺼내 종석에게 건넸다. 마지못해 식권을 받아 든 종석은 여전히 표정이 밝지 않았다. 종석은 혜연에게 받은 식권을 주머니에 넣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다시 한번 축하해. 이제 자리로 돌아갈까?"

  "응? 그래, 그러자."

  자리로 돌아간 혜연은 종석의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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