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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Apr 05. 2024

제6관 사랑 보험 - 9

  그 뒤로도 혜연은 종석과 연락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떻게든 주변 사람들을 통해 물어물어 연락을 해보려 하기도 하고 학교에 찾아가 학적을 조회하려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도움을 청할 학교 인맥도 적었거니와 본인이 아닌 이상 학적 조회에는 제한이 있기에 딱히 종석의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정도 종석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쓰던 중, 데면데면하게 알고 지냈던 과 동기에게 연락을 하니, 친한 교직원에게 물어 봐주겠다 했다.

  그리고 다음날, 동기를 통해서 종석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종석은 다음 해에도 휴학계를 냈으며, 행정고시에는 최종합격을 했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학교 정문에 걸 현수막을 제작 중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하던 동기는 혜연이 버려졌음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위로의 말을 건넸으나, 그런 위로가 혜연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결국 혜연은 종석이 시험에 합격하고 자길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종석이 혜연에게 자격지심을 갖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래도 합격하게 되면 그런 열등감은 사라지고 잘 지낼 수 있으리라 믿었었다. 하지만 혜연의 예상과는 달리 종석은 그대로 종적을 감추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혜연은 종석에게 버림받은 충격에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혜연이 연인과 헤어진 것을 눈치챈 부서원들은 간식도 사다 주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며 혜연을 데리고 다녔지만, 그럼에도 혜연은 도통 먹지를 못해 계속해서 살이 빠졌다. 혜연의 어머니도 처음에는 혜연을 보며 "으이그 그러게 누가 그렇게 간도 쓸개도 다 빼주면서 등신처럼 그러래?"라고 비아냥 거리셨지만, 그것도 잠시, 나날이 수척해지는 혜연을 보며 이것저것 만들어 먹어보라고도 하고 바람이라도 쐬자며 일부러 이곳저곳 혜연을 데리고 다녀보았다. 하지만 이런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도움에도 혜연은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로 멍하니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지났을 무렵, 다행히도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혜연의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었고, 덕분에 식욕도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 혜연을 보며 부서 사람들도, 부모님도 마음을 조금씩 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혜연은 점점 원래의 당차고 싹싹한 사람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부서원들의 배려로 한동안은 외근대신 내근만 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회복하기도 했고,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일을 하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 다시 외근을 나가기 시작했다.


  외근을 나가 우선은 두 달간 자기를 걱정해 주던 약사 언니를 찾아가기로 했다. 약국에 다다르니 때마침 혜연 회사의 약품을 배달해 주는 배달기사가 약국 앞에 차를 세워놓고 약국 안으로 약을 옮기고 있었다.

  "어? 혜연주임님, 오랜만이에요. 요새 무슨 일 있었어요?"

  "장기사님, 오랜만이에요.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 그동안 못 나왔어요. 몸은 좀 어떠세요?"

  "저야 뭐 어디 고장 날 나이는 아니니까요. 쌩쌩하죠."

  장기사는 혜연이 완전 신입일 때부터 혜연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보통 배달기사들은 본업을 은퇴하고 소일거리로 일하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혜연에게 이런저런 소리를 듣는 걸 싫어했다. 어리다고 무시하기도 하고 여자라고 무시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성희롱까지 일삼았다. 하지만 왜인지 아직 40대 초반밖에 되지 않은 장기사는 처음부터 혜연을 정중하게 대했고, 한참 어린 혜연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며 일도 성실하게 처리했다. 그래서 혜연도 장기사에게 고마움을 담아 종종 작은 선물들을 했고, 덕분에 장기사와 혜연은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일은 괜찮아졌어요? 혹시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돼요?"

  장기사의 질문에 혜연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숨길일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웃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남자친구가 연락을 다 끊고 잠수 탔어요. 저 차였나 봐요."

  "그, 고시준비한다는 남자친구? 잠수 탔다고요?"

  "네. 저 모르게 자취방도 빼고, 학교도 휴학하고, 번호도 바꾼 모양이더라고요."

  "본가는 찾아가 봤어요?"'

  "본가가 어딘지도 잘 몰라요. 사실."

  "아니 왜 갑자기 그랬대요? 설마 또 시험에 떨어졌대요?"

  "수소문해 보니까 시험에는 합격한 것 같은데, 그전부터 좀 이상하긴 했거든요. 화도 잦아지고 자기가 빚진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라고 하기도 했었고요."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잠수를 타요? 아주 썩을 놈이네 그거."

  "어쩔 수 없죠."

  혜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혜연을 보며 장기사도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위로했다.

  "그런 놈 빨리 잊어요. 어디 가서 객사할 놈이야. 혜연주임님이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데 어떻게 은혜를 그렇게 원수로 갚아?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지, 나쁜 맘먹으면 그거 다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그놈은 꼭 천벌 받을 거니까 주임님 마음만 잘 추슬러요. 그딴놈때문에 주임님이 힘들어하면 주임님만 손해야."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여기는 약사님 보러 왔어요?"

  장기사는 손가락으로 약국을 가리켰다.

  "네, 언니가 걱정 많이 해줬거든요. 요새 왜 도통 얼굴 보기 힘드냐고,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요."

  "맞아, 여기 약사님도 참 마음씨가 곱죠. 둘이 친하게 지내니까 보기 좋네요."

  "맞아요 언니가 참 따뜻한 사람이에요."

  장기사는 차 트렁크의 약품들을 마저 정리하고 트렁크 문을 닫으며 인사를 건넸다.

  "주임님, 너무 맘 쓰지 말고. 남자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요. 내가 일은 이런 걸 해도 되게 괜찮은 사람을 몇 알거든요. 이 일 하다 보면 오며 가며 알게 되는 사람들도 많고 보고 듣는 것도 많아요. 내가 고르고 골라서 소개해줄 테니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네요."

  "말만 하는 거 아녜요. 진짜로 필요하면 꼭 말해요."

  "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장기사는 차를 끌고 금세 사라졌다.


  그 뒤로 며칠뒤, 혜연은 거의 다 회복된 상태였다. 예전처럼 일을 잘 처리하고, 전보다 더 싹싹하게 사람들을 대했다. 사람들은 그동안 많이 걱정이었는데 오히려 더 밝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라며 혜연을 거듭 칭찬했다. 다만 그 부작용으로, 혜연의 사연을 그저 남자친구랑 헤어졌을 뿐이라고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혜연에게 괜찮은 사람이 있다며 계속해서 남자를 소개주려했다. 혜연은 웃으면서 제안들을 다 거절했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끈질기게 권유해서 많은 애를 먹었다.

  결국 유독 끈질긴 사람들 몇의 성화에 못 이겨서 몇 개의 소개팅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만나게 된 사람은 부서 선배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대기업 직장인이었다. 직업도 괜찮고 생김새도 깔끔하고 뭐 하나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만나서 저녁을 먹고 가볍게 맥주를 한잔 하며 얘기를 했다. 집에 돌아오자 남자에게서 돌아오는 주말에 만나서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는 메시지가 와있었다. 혜연은 대답을 보류했으나, 주변사람들은 밑져야 본전이니 영화라도 보고 오라며, 사람은 한번 만나서는 모른다며 등을 떠밀었고, 그렇게 혜연은 주말에 남자를 만나 영화도 보고 저녁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혜연은 그 남자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동명과 종석의 일로 인해서 이 사람도 자신을 속이거나 버리고 도망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남자가 세 번째 만남을 요청했을 때, 자기는 아직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는 말로 거절했다.

  두 번째로 만나게 된 사람은 혜연이 영업을 나가는 병원 의사의 사촌동생이었다. 그 집안은 전부 의사인 집안이었는데 그 집안에서 유일하게 의사가 아닌 사람이라고 했다. 대신에 의료계 인맥을 살려서 의료기기를 제작, 판매하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혜연과 나이차이도 적당하니 괜찮을 거라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였고, 혜연은 혹시나 자신이 한 번만 만나고 말더라도 뭐라고 하지 말라 신신당부를 하고선 만나러 나갔다. 남자는 좋은 레스토랑을 예약해 놓았다며 혜연을 안내했는데, 들어가 보니 음식 가격이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싼 곳이었기에 혜연은 많은 부담을 느꼈으나, 남자는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이것저것 많이 음식을 주문했다. 가만 보면 남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명품을 걸치고 있었다. 손목의 시계와 목에 맨 금목걸이가 반짝이고 있었고, 옷은 실크 소재의 옷으로 보였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눠보니 남자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해 보였다. 의사집안에서 유일하게 의사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의사못지않게 벌이가 좋다며 매우 뿌듯해했다. 각종 명품이나 사치품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으면서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별로고, 얼마 전에는 어떤 걸 샀고 등을 얘기했으나 혜연은 다 처음 듣는 얘기들 뿐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남자는 혜연을 집까지 자기 차로 태워다 주겠다 했다. 혜연은 안 그래도 불편해서 얹힌 것 같았기에 극구 거절했으나, 남자가 한사코 태워주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결국은 남자의 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남자는 가는 내내 차에 대해 자랑을 했고, 혜연은 남자가 차를 자랑하고 싶어서 태워주겠다고 한 것임을 알았기에, 관심도 없었지만 관심이 있는 척 이것저것 물어보고 남자의 얘기에 감탄해 주며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뒤, 그런 혜연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는 주선자인 사촌형을 통해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으나, 혜연은 자기에게 너무 과분한 분인것 같다는 좋은 말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고작 두 번의 소개팅이었지만 혜연은 꽤 많은 피로감을 느꼈기에, 더 이상의 소개는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보라는 회사 동기의 권유에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소개를 받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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