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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Apr 15. 2024

제7관 보험금의 지급 - 1

  강남의 한 술집. 상현과 명석이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명석은 상현에게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참 빨라 그치?"

  "그러게요."

  "너랑 제수씨 소개해준 지 벌써 5년이나 됐네."

  명석은 웃으며 상현의 술잔에 술을 조금 따랐다. 상현도 명석에게서 술병을 건네받아 명석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웃었다.

  "그래도 형 덕분에 결혼도 하고 좋네요."

  "그래, 너라도 행복해서 다행이다."

  "에이 왜 그래요 형도 행복해야지."

  명석은 잔을 들어 상현에게 건배를 청했다. 상현도 술잔을 들어 명석의 술잔에 부딪히고 바로 목으로 넘겼다.

  "나는 지금이 행복해."

  명석의 말에 상현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상현이 보기에는 명석은 너무 좋은 형이었지만, 그럼에도 너무 사람들하고 거리를 두고 사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있긴 했다. 상현은 어느 정도 명석의 사정을 알고는 있기에 뭐라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다른 사람들도 만나보고 연애도 하고 그러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제수씨는 언제 온대?"

  "아까 바로 퇴근해서 출발했다고 했으니까, 한 20분쯤 뒤면 도착할 것 같아요."

  "그래?"

  상현의 말에 명석은 잠깐 딴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상현은 그런 명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구태여 신경 쓰지 않고 안주를 집어먹으며 자신과 명석의 잔에 술을 따랐다. 명석은 술잔을 들고 "흠…"이라며 혼자 소리를 내었다. 상현은 그런 명석을 의아해하며 다시 명석의 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히려 했다.

  "근데, 제수씨가 아직 안 왔으니까 물어보는 건데."

  "네, 형."

  "혹시 너희 2세 생각은 없어?"

  명석의 질문에 상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현의 그런 모습을 보고 명석은 순간 자기가 괜한 질문을 한 것이 아닌가 민망해졌다. 하지만 이내 상현은 웃으며 다시 명석과 건배를 하고 술을 한잔 들이켰다. 명석도 술을 들이켜고는 상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 저희도 가지고 싶죠. 저는 항상 오순도순한 가정을 만드는 걸 꿈꿔왔고, 혜연이도 늘 절 닮은 아이를 낳고 싶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근데, 이상하게 안 생기길래 얼마 전에 혜연이랑 같이 병원에 가봤는데, …둘 다 불임이래요."

  "…둘 다?"

  "네, 둘 다요. 참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죠."

  "…"

  "근데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그래도 둘 다 불임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느 한쪽만 불임이었으면 얼마나 미안했겠어요. 그래서 그냥 이제는 마음 비우고 둘이서 행복하게 살기로 했어요. 정 아이가 갖고 싶으면 입양을 고려해 볼 수도 있긴 하겠지만, 아직은 둘 다 그럴 생각은 없기도 하고요."

  "미안하다. 내가 괜한 걸 물었네."

  "아니에요 형. 먼저 말 꺼내기 애매했는데 형이 물어본 김에 얘기하는 거죠 뭐."

  "아버지께는 말씀드렸어?"

  "네, 아버지께도 말씀은 드렸어요."

  "뭐라셔?"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둘이 행복하기만 하면 됐다고 그러시고 넘어갔어요. 크게 신경 쓰시진 않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 그러면 그나마 다행이다."

  상현은 테이블의 벨을 눌러 종업원을 불렀다. 하이볼을 한잔 시켰다. 곧 도착할 혜원을 위해서였다.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자리를 비키자 상현이 입을 열었다.

  "근데 가끔 궁금하긴 해요. 아이가 있으면 어떤 느낌일지요."

  "… 좋긴 해. 좋긴 했어."

  상현의 말에 명석은 혼자 술을 한잔 들이켰다.

  "근데, 뭐. 내 아이가 아니었다는 게 아쉬울 뿐이지."

  "…"

  상현은 명석이 망한 경위와 이혼한 경위, 그리고 이혼 후 몇 년이 지난 시점인 재작년에야 명석은 자신의 아이가 친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명석의 말에 뭐라 더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뭐 아이를 키우는 기쁨은 조금 누려봤으니까 괜찮으려나."

  "…"

  "그리고 좀 좋게 생각하면 그나마 양육비를 안 주고 있었던 게 다행이다 싶어. 가만 생각해 보면 애초에 친자가 아닌 걸 알아서 필요 없다고 했었던 건가 보다 싶긴 해. 너무 지긋지긋해서 나랑 아예 엮이고 싶지 않아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뭐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양심에 찔렸던데 컸겠지."

  "… 미안해요 형,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냐, 나도 알지.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그랬어. 뭐 이제는 지난 일이니까, 나도 내 인생 잘 살면 되지."

  "…"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둘이 앉아있는 테이블 옆에서 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위기들이 왜 이래?"

  어느샌가 술집에 들어온 혜연이 둘의 테이블 옆에 서서 둘을 보고 한소리를 했다. 

  "어, 왔어?"

  혜연은 외투를 벗어 가방과 함께 의자 밑 보관함에 넣고 상현의 옆에 앉았다. 

  "이거 하이볼 내 거야?"

  "응, 미리 시켜놨었어."

  "역시 오빠 센스."

  혜연은 바로 하이볼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숨도 쉬지 않고 하이볼 한잔을 바로 다 마셔버리는 혜연의 모습을 상현과 명석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크아. 이게 불금이지."

  혜연은 잔을 내려놓고 기본안주로 나온 뻥튀기를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근데, 둘이 무슨 얘길 했길래 분위기가 그랬어? 명석 오빠, 상현 오빠랑 무슨 얘기했어?"

  "아니, 별얘기 안 했어. 얘기하다가 잠깐 공백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네가 딱 들어와서 그래."

  "그래? 별얘기 안 했다고? 그럼 뭐. 됐어. 나 하이볼이나 더 시켜줘."

  "어어 그래."

  명석이 대답하는 동안 상현은 다시 벨을 눌러 하이볼을 주문했다. 그사이 혜연은 명석에게 안부를 묻고 서로의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주문을 마친 상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둘 사이 대화를 경청했다.

  "… 암튼 그래서 담주는 좀 바쁠 것 같아가지고 오늘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일찍 나왔죠 뭐."

  "맞아 나도 다음 주는 배달 물량이 엄청 많더라고, 요새 너무 호황인가 봐."

  "그런다고 내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니지만요, 쳇."

  혜연은 혀를 차며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어먹었다. 곧이어 주문한 하이볼이 나왔고 혜연은 하이볼 잔을 들고 말했다.

  "오빠들, 잔 들고 짠해요."

  셋은 술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건배 후 각자 술잔을 비우자, 혜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암튼, 오늘 모인 이유인 인생 보험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그래 그러자. 명석이형, 형도 인생보험에 들었었다고 했죠? 혜연이 너도였고. 나는 처음에 주변에 나 같은 사람이 분명 더 있을 거라 생각해서 찾아봤었는데,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몇 년간 포기하고 말도 안 꺼내고 있었는데, 나랑 가까운 두 사람이 똑같은 일을 겪었다고 해서 많이 놀랐어요."

  "맞아. 나도 너희 둘 다 그런 일을 겪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혜연이 둘의 대화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근데, 두 사람 얘기를 듣고 보니까 좀 이상한 게 하나 있더라고요."

  "어떤?"

  "보니까 상현오빠는 회사에서도 잘리고 연애도 잘 안되고 아버님도 아프셨고 그래서 보험금 받은 건 알겠어요. 명석오빠는 선후행을 바꿔서 미리 보험금을 달라고 한 바람에 회사도 잃고 이혼하고 교통사고 당하고 그랬던 거인 것도 알 것 같고요."

  "그런데?"

  "그런데 저는 말이죠, 딱히 별게 없단 말이죠. 항상 똥차 만나서 똥볼만 찼지만, 그래도 오빠들에 비하면 어디 아픈데도 없었고, 집에 우환도 없고, 회사도 잘 다니는 상태였고요. 그래서 나는 왜 나한테 보험금이 지불된 건지가 좀 이상해요."

  혜연의 말에 상현이 동조했다.

  "맞아. 혜연이 너는 인생이 망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는데, 왜 보험금이 지불되었을까?"

  "음, 내가 볼 때는 걔들이 말한 내용에 힌트가 있는 것 같긴 해."

  상현과 혜연은 명석을 바라보았다. 명석은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우리가 망했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들에 따라서 판단한다 그랬잖아?"

  상현과 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현이는 뭐 가족, 회사, 여자친구 이런 거였을 거고 나는 돈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돈, 건강, 자식, 명예 이런 것들이었던 거고. 하지만 혜연이 너는 내가 볼 때 연애나 사랑만이 제일 중요시 여기는 가치였던 거고 다른 건 아닌 게 아닐까?"

  혜연이 경악하며 말했다.

  "오빠! 그럼 내가 가족이나 친구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니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너는 나나 상현이와는 다르게 가족들에게 우환도 없었고 친구들과도 잘 지냈잖아. 그러니까 가족이나 친구들을 뭔가 특별하게 중요시 여기는 그런 가치로 생각하기보다는 삶에 당연하게 녹아있는 걸로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상현이는 어머니를 잃었고, 회사에 간절하게 들어가고 싶어 하고, 결혼도 하고 싶어 했잖아. 나는 돈도 더 많이 벌고 싶었고, 나 자신을 계속 중요하게 생각해 왔고, 자식도 나름 잘 키우고 싶긴 했고. 하지만 너는 건강한 가족들이나 좋은 친구들이 항상 곁에 있어와서 그게 너무 자연스러운 거였고, 돈도 부족함은 없었을 테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없으면 안 되고 없으면 내 인생이 망할 것 같은 그런 특별한 것까지는 아니지 않았을까 싶어서."

  "뭐, 썩 마음에 드는 가설은 아니지만 꽤 일리가 있어 보이긴 하네요."

  혜연은 상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오빠 오해하면 안 돼. 내가 뭐 가족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하는 그런 사람 아닌 거 오빠도 잘 알잖아, 그치?"

  "물론 잘 알지 네가 얼마나 가족들에게 애틋한지. 그리고 나한테도."

  상현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명석이 한마디 했다.

  "눈앞에 나는 안 보이냐? 깨는 집에 가서 볶아라 제발."

  "아, 미안해요 형."

  "뭐 이 정도 가지고 그래요. 이 정도는 깨 볶는 것도 아니에요."

  혜연의 말에 명석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 그만, 더 알고 싶진 않다."

  명석의 말에 혜연과 상현이 웃었다. 다시 혜연은 인생보험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아무튼, 내 인생보험은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우리에겐 아직 하나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있잖아요?"

  "그렇지. 대체 영혼의 1%를 가져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고,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맞아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모르겠어요."

  상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끼리 얘기한들 알 수 있을까요? 고작 3명뿐이라 영혼을 1% 잃었을 때 공통적으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확인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떻게든 발품 뛰어서 찾으면 우리 같은 사람을 더 찾아서 비교해 보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쉽지 않아 보이고요."

  "뭐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근데 알게 된다 한들, 이미 영혼은 가져가버렸으니 별로 의미는 없지 않을까?"

  명석은 반쯤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 반쯤 누웠다. 그런 명석에게 혜연이 설교하듯 말했다.

  "뭐 그렇긴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우리가 대처할만한 거일지도."

  "하지만 그렇게 허술하게 될 그런 게 아닐 것 같은데. 그래도 나름 신이 하는 일 아닌가."

  혜연은 자기 말에 물을 끼얹는 상현의 볼을 꼬집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으니까 그렇지 이 못난이 오빠야."

  명석은 다시 몸을 바로 세워 둘에게 말했다.

  "그럼 앞으로 천천히 생각해 보지 뭐. 굳이 꼭 알아내야 할 것까진 아니지만 혜연이가 말한 대로 혹시 모르니까. 우리 셋의 과거 얘기를 쭉 돌아보면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지."

  명석은 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아무튼, 이제 우리 셋은 인생 망할 일은 없을 테니 이대로 쭉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요. 형도 혜연이도 나도 셋 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불금 보내고들 갑시다!"

  혜연의 외침과 함께 셋은 술잔을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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