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교에서 4학년 혹은 취준생으로 불린다. 뭉뚱그려져서 불리는 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교수님이 스펙을 쌓는 것보다 진정한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셨다.
‘나는 누구일까 ‘
칠판에 쓰인 질문을 속으로 읊조린다. 데자뷔다. 이 질문을 고삼 날이도 받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는 졸업 문턱에 서 있는 막학기에 꼭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내가 누구인지 공식적으로 고민해 볼 시간은 이때만 주어진다.
“이제 이론 공부보단 실무가 중요한 때이니 다들 학교 공부보다는 다른 거에 더 집중하세요. “
맞는 말이긴 한데 틀린 말이다. 한 학기를 시작하는 첫 수업에서 들은 이 말은 내 사기를 완전히 꺾어놓았다. 그간 쌓아온 학문이란 퇴적물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1학년 땐 그렇게 공부해라 하더니 대학도 끝은 결국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은 학생들을 상대로 학위를 거래하는 거대한 공장이 되어버렸다. 초기 생산 과정에서 우리는 다 똑같이 만들어지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생산 가치가 없는 상품은 걸러진다.
지하철에 탄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펴본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가. 저마다의 가치로 살아남은 존재들이니 그들은 갈 곳이 있다. 굴러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할까.
고삼 날이도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는 일이 잦았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공부하는 대학생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대학생도 날이에겐 모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어떤 표정을 하든 당장의 날이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붐비는 출근 시간에 몸을 지하철에 간신히 욱여넣는 이들도, 무표정으로 유튜브를 바라보며 허송세월 지하철에서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지금 날이에겐 부럽기만 한 존재이다.
‘평범’하게가 아닌 ‘특별’하게 살고 싶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소외를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된 지금 평범한 일상을 담담하게 반복하는 이들이 존경스럽다. 하루를 버틴 그들의 수고스러움, 그걸 조용히 지탱시켜 주는 무덤덤함. 그런 그들의 무딘 한 세월을 나도 가지고 싶다고느끼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