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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작가 Oct 29. 2022

죽을 때까지 시골에서 살 수 있을까

우리 집 귀촌 생활의 종작치는 어떤 모습일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곳에서 살 수 있을까. 평생을 하나의 풍경을 보며, 하나의 잠자리에서 잠을 들 수 있을까. 나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새로운 것을 마주하면 주저하고 주춤한다. 하지만 물살 하나 없는 고요한 호수 같은 삶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적당히 안정적이고 균일한 리듬이 있는 삶 속에서 지루하지 않을 만큼의 적당한 다양함이 있으면 좋겠다. 물론 이건 모두의 이상이고 바람이겠지. 대게 인생은 적당히를 허락하지 않으니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겠지. 고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안정적이고도 지루하게 한 곳에서만 사는 것은 아주아주 힘들겠지.



  적어도 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곳에서 살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이사를 다녔고 도시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시골로, 스무 살이 되어서는 다시 시골에서 도시로 잠자리를 옮겼다. 5년 정도를 주기로 내 주소지는 바뀌었다. 그렇지만 우리 집은 10년이 넘어도 그 자리에 있다. 내 잠자리는 다시 도시로 옮겨졌지만 엄마와 아빠가 있는 우리 집은 옮겨지지 않았다. 수풀이 우거진 밭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이래로 아직까지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황량했던 땅에서 집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우리 집이 옮겨질 일은 이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는 아니어도, 마지막 우리 집은 이곳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스물두 살의 본가에서 보낸 오후의 어느 날, 나는 엄마의 무심한 대답을 들었다. 아마 별 시시한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집의 미래까지 그 대화가 뻗었던 것 같다. 내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엄마가, 글쎄? 언제든 다시 도시로 갈 수도 있고. 라는 대답을 했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 대답은 깊은 고심과 고민 끝에 나온 것도 아니었고 으레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는 듯이 무심히 툭 튀어나온 것이었다. 너무 당연한 말을 하는 엄마를 보면서 나는 꽤 당황했었다. 그리곤 내가 무엇을 보면서 우리 집 귀촌 생활이 끝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나는 왜 우리 집이 평생 시골에만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을까. 엄마와 아빠가 도시에 염증을 느껴 시골로 왔듯이 언젠가는 다시 시골에 염증을 느껴 도시로 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엄마가 언제든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도시로 갈 수 있다고 한 것은 아마 불편함이었겠다. 시골은 당연스레 불편하다. 그런 불편은 대부분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데 우리는 사람이 드문 곳을 찾아왔으므로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불편함이 사람으로부터 오는 불편함보다 더 커진다면 아마 우리 집은 다시 도시로 가지 않을까. 엄마와 아빠는 누구보다 도시의 편리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편리함이 그리워진다면 다시 도시행을 택할지 모른다. 



  그리고 시골이 지루해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결국 도시에서의 삶이 쳇바퀴 돌 듯 돌아가는 거이라지만 시골도 만만치 않게 쳇바퀴 돌아가는 삶이다. 두 곳의 다이내믹함의 종류야 다르겠지만 결국 도시도, 시골도 틀에 맞춰진 삶이라는 것은 동일하다. 농사에 재미를 붙였던 두 사람이 농사가 지루해질 수도 있다. 키워볼 것은 거의 다 키워보고, 풍년도 흉년도 모두 맛 본 엄마와 아빠는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농사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릴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농업에 대한 열정을 마음속에서 쑥쑥 키웠던 그 시절처럼. 누구도 모르게, 아주 작고 은밀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집이 다시 도시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에는 엄마와 아빠가 여전히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늘상 행복하고, 기쁜 사람은 없다. 엄마와 아빠는 이따금씩 불행하다. 집에 문제가 생기고, 원하던 밭 계약이 틀어져 버려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농사는 늘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고,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날씨라는 존재가 미울 때도 있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내는 엄마와 아빠인 만큼 가끔 일어나는 부부싸움으로 인해 감정이 상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염증을 본 적은 없다. 이것들은 모두 일상에서 오는 작고 사소한, 혹은 당연히 일어날 불행이자 서운함이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아빠가 시골 그 자체에 대한 싫증과 귀촌이라는 삶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잘 없는 아빠지만 자신의 재능을 맘껏 꽃 피울 수 있는 무엇을 키우고 돌보는 일에 만족감을 느꼈다. 나에게 우리 집 닭이 낳은 첫 달걀로 만든 프라이를 권할 때, 어쩌면 자랑과 뽐내기에 가까웠을 그 순간에 아빠는 행복해 보였다. 늘 좁은 곳에서 비집고 들어가듯 살았을 아빠가 그냥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면서 일한 만큼의 뿌듯함을 보상받는 시골의 삶을 나름의 표현을 하며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한다. 이것은 엄마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지루하고 답답하고 외로웠을 도시의 삶보다 할 일이 있고 목표가 생기며, 그것을 달성했을 때의 벅참과 하고픈 것을 누구도 말리지 않는 삶을 좋아한다. 



  아마 엄마의 대답은 아주아주 먼 과거를 상정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모르겠다. 당장에 내년이 될 수도, 10년 후가 될 수도, 아니면 아예 시골에 눌어붙을 수도 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나도, 심지어는 엄마와 아빠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이 좋다. 내가 자라온 시골집이, 성인이 되어 내려갈 시골이 있다는 것도, 남들이 쉽게 경험하지 못한 삶의 방식도, 그리고 행복한 두 사람도 좋다. 당장 내일의 일도 모르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우리 집이 당분간은 시골에 있었으면 좋겠다. 죽을 때까지 시골은 모르겠다. 당분간 시골은 확신한다. 엄마와 아빠는 당장 이사를 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거면 됐다. 별 일이 없다는 것이니 그거면 됐다. 우리 집 귀촌의 종착지는 모르겠고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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