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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작가 Jan 10. 2024

으른의 맛, 맥주

  나는 술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아하긴 한다. 없으면 죽을 것 같지 않지만 많이 섭섭할 것 같기도 하다. 내 인생 최초의 술은 언제였을까. 기억을 되짚어보면 제사 때 한입 받아먹은 막걸리였다. 그다음에는 친척들이 주는 맥주 한 모금이었을 것이다. 그 마지막은 아빠가 새우깡과 함께 줬던 소주 한 잔이었다. 


  생에서 처음으로 술을 사봤던 기억은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이었다. 친구 집에서 늦은 밤을 보내던 중학생 남자애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티비에 비친, 그리고 상상 속의 맥주였다. 당시 깡시골에 살았던 우리 주변에 편의점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을까. 그 야심한 밤에 문을 연 수퍼마켇은 연로한 할머니가 하시는 구멍가게 하나뿐이었다. 


  20분간, 칠흑 같은 밤길을 헤쳐 우리는 그곳에 당도했다. 당시 가장 키가 컸던 내가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캔맥주 6개 번들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정말이지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조금 멀리 떨어진 구멍가게였던 터라 여차하면 그냥 포기하고 도망갈 생각도 했다. 도망치고, 빠져나갈 방법은 머릿속으로 다섯 가지 정도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나에게 대학생이냐 되물었다. 나는 근처에 놀러 왔다고, 그렇다고 했다. 


  친구들과 그렇게 두 캔 씩 나눠 마셨다. 아직 여름날의 열기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날 밤에, 어둑한 마을 정자에서 달그락거리는 캔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리었다. 멀리서 차가 오면 혹시 들킬까, 맥주캔을 숨겼다. 인기척이 들리면 재빨리 몸을 돌렸다. 잘못임을 알면서도 저지른 잘못은 때로 쾌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정말이지 그때 가슴이 뛰면서도 내가 어른이 된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가끔 중학생 때의 사진을 보면 그 어디에도 어른스러움은 찾아볼 수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앳되었던 나는 고작 키 말고는 중학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어른스러워 보이던 형들도, 누나들도, 나름 성숙했다고 자부한 우리도 학생이었다. 아무리 연로했더라도, 어두운 밤이었더라도, 무자를 눌러썼더라도, 키가 컸더라도, 애는 애였다. 그날 할머니는 나에게 무엇을 보고 맥주를 내주었을까. 


  나는 스무 살이 넘고,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도 그 구멍가게를 가지 않았다. 종종 그 앞을 지나갈 때면 괜히 얼굴을 돌렸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대가 바뀌어 드디어 편의점이 마을에 입성하고 구멍가게는 자취를 감췄음에도 가끔 내 얼굴을 벌게진다. 


  술에 많이 취하지도 않았다. 운 좋게도 그 자리의 모두, 맥주 두 캔 정도는 멀쩡히 버틸 주량이 되었기 때문이다. 알딸딸하게 취한 채, 다시 친구집으로 들어가 게임을 했다. 몇 시간 후에, 술은 모두 날아가 사라졌고 잠을 자다 집으로 왔을 뿐이다. 그렇지만 맥주를 사러 가던 길부터 그 모든 과정은 여전히 붙들려 있다. 


  이제는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는 것이 자못 아쉬워졌다. 가끔가다 치킨을 시키고, 캔맥주 두 개에 축구 경기를 보고 있으면 행복해진다. 기다란 잔에 금빛 맥주를 가득 따르고 벌컥벌컥 넘기면 그 기억이 모두 씻겨나가는 것만 같다. 


  진짜 어른은 여기 있는데. 어른이고 싶었던 내가 샀던 그때의 맥주도 함께 넘겨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쌉쌀하고 상쾌한 그 맛을 나는 사랑하지만 어쩌면 내가 평생을 붙들어야 할 기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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