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단편소설

by 설민

빈집

설민


선홍빛 붉은 노을이 도로 위로 내려앉았다. 덩달아 마음이 차분해졌다. 눈이 부셨다. 차 유리창에 빛이 반사되었다. 문득 낯선 외국의 도심으로 진입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유로우면서도 순간 두려움이 느껴졌다. 심장이 두런거렸다. 다리를 건너 아파트 빌딩이 늘어선 도시로 들어간다. 눈살을 찌푸리면서 노을을 응시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지 않으려고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니 코끝이 아렸다. 눈물이 고였다. 햇빛 가리개를 내리려고 손을 들다가 곧바로 내렸다.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문을 두드리는 듯 쿵쿵쿵 거리는 익숙한 시그널 음악과 함께 라디오 디제이의 인사말이 들린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입니다.’ 오후 6시에 시작하는 음악 프로그램이었다. 하나가 좋아 보이면 다른 모든 게 좋아 보이고 거꾸로 하나가 나빠 보이면 다른 모든 게 마음에 안 든다. 개인의 한 가지 특성이 워낙 강렬한 나머지 다른 측면들을 덮어버려 전체 그림을 완전히 왜곡시키는 현상을 ‘후광효과’라며 시작 이야기를 했다. 귀에 익숙한 팝송이 첫 곡으로 흘러나왔다.

[연인들도 멀리 떨어져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이제 날 잡아 달라.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힘들다. 단지 당신이 머물기를 원한다. 우린 많은 걸 겪었지만 잘하겠다. 그렇게 말하고 결국 끝나버렸지만 나의 일부인 당신을 보낼 수가 없다.]

헤어지는 연인을 향해 애절한 음색으로 부르는 게 좋아서 반복적으로 들었던 기억이 났다. ‘시카고’라는 그룹의 리드싱어 특유의 허스키하면서 감미로운 음색이 좋았다. 또 시카고라는 장소가 주는 환상이 있어서 지도를 찾아보았다.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문득 이곳이 시카고의 어느 거리인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 팝송을 들으며 눈물 흘렸던 시절이 있었다. ‘나를 잡아줘, 미안하다는 말은 너무 어려워.’ 노래의 후렴구를 따라 부르는데 그때 그 감성으로 바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고교 시절 사랑하고 이별을 경험해 본 것도 아닌데 슬픔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었다. 헤어지는 아픔은 굳이 연인의 이별이 아니더라도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기에 그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가 보다. ‘미안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그 음악이 더 좋았던 것은 마지막 변주 부분이었다. 다소 서정적이던 앞부분의 음악과는 다르게 경쾌하게 진행되는 게 마치 자유를 찾아 행복한 느낌이었다. 이별 후 느끼는 해방감을 표현한 듯했다. 물론 이별은 힘들고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오히려 인연이 다한 경우라면 홀가분할 수도 있다고 여겨졌다.

진혁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집에 오기로 했는데 연락도 없다. 재촉을 하면 화를 낼까 싶어서 전화하려다 그만두었다. 잠결에 현관문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 실내등이 켜지면서 깜깜한 거실에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바퀴 끄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 미닫이 중문이 열리며 시커먼 물체가 들어섰다. 두려운 마음으로 일어나 나가보았다. ‘진혁이니?’ 집에 오기로 한 사람이 그뿐이기에 물어보려고 했지만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좀 늦었어요.”

진혁이 말없이 캐리어를 옷방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아들이구나. 기다리다 깜빡 잠들었어.”

막혔던 숨통이 트이듯 말이 나왔다.

“엄마가 비밀번호를 알려줬었나? 그런데 웬 가방이야?”

대꾸도 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진혁에게 다시 물었다.

“이제 엄마랑 살려고 짐 챙겨가지고 온 거야?

언젠가는 내가 먼저 끝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선수를 쳤다. 다시 생각하니 무심결에 분노가 생겼다.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라디오에서 음악이 끝나갈 즈음 다리를 건너 터널로 들어갔다. 나이가 들어도 날 선 감각은 무뎌지지 않았다. 더 이상 눈이 부시지 않았는데 눈물이 흘렀다. 아무런 일없이 있다가 이렇게 눈물이 흐르면 난처하기 일쑤다. 그런 눈물은 뭉클뭉클한 심장의 압박과 함께 나오는 몸속 진액 같았다. 뻐근해지는 심장의 통증이 느껴졌다. 심폐소생술을 받으면 이런 고통일까? 하는 생각과 함께 무언가가 심장에 압박을 가하는 모습이 연상되었다. 등까지 뻐근해졌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흩어지는 노을이 몸에서 퍼져 나가는 혈액 같았다. 생각이 점멸등같이 깜빡깜빡 끼어들었다. 꿈속의 일이 현실처럼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현관문 잠금장치에서 소리가 나더니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진호도 같이 왔구나?”

진호를 반기며 현관으로 나가는데 특유의 쐐한 가죽 냄새가 났다. 얼마짜리 옷인 줄 아냐며 자랑하던 세무 재킷을 입은 남편과 하단에 꽃무늬가 트레이드마크인 명품 롱 코트를 입은 시어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애초에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그들이기에 나도 똑같이 모른 척했다. 그 뒤에 진호가 두 개의 캐리어를 끌고 들어오면서 나에게 멋쩍게 인사를 했다. 진호를 붙잡고서 말을 걸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해외여행 가려고요.”

“누구랑 가는 거야?”

“할머니랑 아빠랑 형이랑 저요.”

“그런데 왜 엄마 집에 온 거야?”

진호의 얼굴에 갑자기 수심이 어린다.

“나도 몰라요.”

시어머니가 진호를 대신하여 말을 꺼냈다.

“네 집이 공항버스 타는 데가 가까워서 하루 묵으려고 왔다.”

당당하고 카랑카랑한 시어머니의 말이었다. 빠진 짐이 없는지 가방을 열어 챙기는 남편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나하고 상의도 없이?”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건성건성 말했다.

“하루 묵는 거 가지고 무슨 상의야?”

“여행을 가려면 조용히 다녀올 것이지 왜 나한테 와서 생색을 내고 난리야? 그렇게 안 해도 허세 부리는 인간인 줄 다 아는데. 정말 한심하고 뻔뻔하다. 가려면 네 엄마랑 둘이서 가지 왜 아이들까지 데리고 가니? 애들이 가고 싶다고는 했어? 그리고 여기가 어디라고 와? 여기가 네 집이니?”

“어차피 내 돈으로 마련한 집이잖아.”

그 말이 유리 파편이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가빠서 어깨를 들썩이며 내쉬었다. 턱 밑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는데 어디선가 꽝,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의례 그런 구간이라 여기며 라디오에서 틀어주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평상시보다 정체 시간이 길어졌다. 순식간에 레커차가 달려온다. 무슨 사고가 났는가 보라고 생각하는데 응급차 소리까지 들렸다. 집으로 가는데 족히 삼십 분은 더 걸리겠다고 어림짐작을 해보았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무릎이 아팠다.

졸린다는 생각과 동시에 문득 어젯밤 꿈이 생각났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쪽잠이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오락가락하면서도 눈을 뜨고는 무척이나 서운하고 화나는 감정이 고스란히 남았다.

네 것 내 것의 경계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결혼 초부터 자신의 돈에 대해 철벽을 치는 사람이었다. 월급이 얼마인지조 차도 알 수 없는 생활을 하면서 들은 말은 ‘내 돈으로 사는 주제에.’라는 거였다. 이 말을 들으면 손아귀의 힘이 풀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치 나에게 퍼붓는 저주 같았다. 이제는 휘둘리지 말자 하는데도, 다 끝난 마당에 나는 또다시 마법에 걸린 것처럼 아찔해진다.

“너희들도 가기 싫으면 싫다고 말해. 니들도 이제 성인이야. 할 말은 하고 불합리하면 따지란 말이야. 엄마가 그렇게 못하고 살았다고 너희들도 무작정 수긍하며 살지 마.”

아이들도 가장의 독단적인 태도에 대항하지 못했다. 나의 무기력이 학습된 듯했다.

에누리 같은 돈을 받으면서도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스스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발버둥 칠수록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자기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이나 하라는 말에 사육되는 닭처럼 닭장 안에서 꼼짝없이 주는 먹이만 받아먹으며 밤낮없이 알을 낳는 게 사명인 신세 같았다. 때마다 시어머니와 남편은 백화점 쇼핑을 하고 명품 옷과 차를 주기적으로 바꿨다. 지나고 보니 나는 그들의 사치에 싸구려 액세서리 같은 들러리였다. 거기에는 나의 성격도 한몫을 했을 터였다. 그들이 좋아하는 명품 귀금속, 옷이나 가방, 구두 등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책과 자료가, 답답하게 시어머니와 남편을 짓누르는 물건이라면 나는 그들의 말에 숨이 막혔다. 스스로 그렇게 된 건지 상대가 만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상하게 처음부터 약자의 편에 선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영역이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 선 순간부터 나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앞에서 불편하고 쪼그라드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생활비 카드 내놔. 필요한 만큼씩 줄 테니까.”

“무슨 말이야? 일일이 돈을 타서 생활하라고? 내가 쓰는 카드내역 문자로 가잖아. 사실 나, 그것도 숨 막혀.”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할 무렵 라디오에서 광고가 흘러나왔다. 꿀잠이라는 단어가 귀에 꽂혔다. 머리를 흔들었다. 잡념과 졸음을 쫓기 위해서. 잠을 푹 자고 싶다는 바람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기운이 떨어지고 의욕도 없어지는 이유가 잠 때문일 것이다.

사고 현장이 수습되었는지 차량 통행이 제법 자연스러워졌다. 차의 파편들이 도로에 흩어져 있었다. 이사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주차장에서 난 교통사고로 놀란 적이 있었다. 주차장 입구라서 서행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범퍼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사고 처리를 하고 정리를 하는데 부서져나간 파편에 놀랐다. ‘도로에서 속도내서 달리다가 사고 났으면 정말 죽겠구먼.’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차가 이렇게도 약한 건가 싶었다. 외형만으로 보면 튼튼하게 나를 지켜줄 것만 같았는데, 이런 어이없는 부딪힘에도 힘없이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니 믿을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지켜줄 거라 여겼던 보금자리. 그런 가정이라는 테두리도 차와 같다는 생각을, 집을 나와 처음으로 해보았다. 견고해 보이지만 실제로 차는 철판 껍데기에 불과했다. 오래된 차가 녹이 슬고 부품이 허술해지는 것처럼, 가정생활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견고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차장에 떨어진 자동차 파편을 치우면서 절실히 깨달았다. 그날 교통사고의 충격도 컸지만, 그동안 많은 착각과 허상 속에서 살아왔다는 허무함이 밀어온 날이었다. 살아온 지난날의 파편이 온몸에 박히고 내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금세 땅거미가 내렸다. 어둑해진 아파트 단지에 하나 둘 불빛이 물감 번지듯 꽃처럼 피어난다. 동시 다발적으로 터지던 불꽃 축제의 마지막처럼 서서히 뜸해졌다. 드문드문 불이 켜진다. 삭막한 아파트에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간다. 환한 낯보다 밤이 오히려 사람 사는 것 같은 동네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매번 새로웠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집의 느낌이 아닌, 어디론가 떠나간 낯선 도시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을 했다. 그런 이유로 내비게이션을 보지 않으면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아파트 주차장 입구로 진입했다. 분명히 입주자 등록을 해놓았는데 차단기가 열리지 않는다. 후진을 해서 방문자가 통행하는 통로로 갔다. 경비를 부른다. 왜 또 등록이 안 되었냐고 항의를 해보지만 묵묵부답이다. 차단기가 열린다. 비교적 주차장이 한가하다. 늘 주차하던 자리부터 서성거린다. 지정 주차구역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주차를 했으면 짜증이 났다. 괜스레 차를 흘겨본다. ‘내 자리에 먼저 주차를 하다니...’ 그런 심술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용납하기로 했다. 다소 어색하고 불편한 태도이지만 억울한 마음을 뜻 모를 차에게 투사한다. 그래놓고도 마음이 약해진다. ‘네가 무슨 잘못이겠니,’ 하며 흘러내리는 마음을 주어 담는다. 적당한 자리에 주차를 한다. 한 번에 정확하게 아주 능숙하게 주차가 되는 날은 기분이 가뿐하다. 스스로 뿌듯하게, 위풍당당하게 차에서 내리며 수고한 자신을 칭찬한다. 오늘도 잘 살아냈다. 터덜터덜 걸어 지하 현관문 앞에 선다.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 내 집에 들어가는데도 절차가 참으로 복잡하다. 경비에게 허락받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쉬운 일이 없다고 여기며 번호를 누른다. 터치스크린의 미세한 작용으로 잠시 손이 흔들리거나 다른 곳에 닿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 번에 열리지 않는 날에는 슬금슬금 화가 올라온다. 누르기 전에 다른 사람이 나오거나 들어가거나 하는 틈이 생기기를 기대하지만 이곳으로 이사를 온 이후로 도통 사람을 볼 수가 없다. 넓은 주차장에 차가 가득한데 사람들은 다들 어디에 있는 건지... 두세 번의 실수를 하고 겨우 문이 열렸다. 15층을 누른다. 몸이 잠시 허공에 뜨는 느낌을 미세하게 감지한다.

집 현관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른다. 또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다. 빈집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닦는다. 잔 꽃무늬가 있는 펑퍼짐한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이 날따라 휑뎅그렁하게 거실에 놓인 자전거가 눈에 띄었다. 방으로 옮길까 하다가 답답한 느낌이어서 거실에 두었다. 이사 오면서 텔레비전 설치를 하지 않았다. 그 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자전거가 보면 볼수록 생뚱맞다. 매일같이 운동하던 열정을 잃은 지 오래다. 냉장고를 열어본다. 먹을 게 없다. 엄밀히 말하면 곰팡이가 난 된장, 누군가 집에서 담갔다고 주었던 간장, 고추장, 고춧가루 범벅인 김치 한쪽이 전부다. 그것들은 밥을 먹을 수 있는 보조이지 주요 식품은 아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다. 생각만 해도 구미가 당기는 쫄면과 김밥 재료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가졌을 때 먹고 싶었던 쫄면을 친구가 만들어줘서 두 그릇이나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예민한 때라서 기억력도 오래가나 보다. 새콤 매콤한 양념과 쫄깃한 면발, 거기에 콩나물 양배추 등 갖은 야채까지... 참, 쫄면에 달걀과 단무지가 빠지면 안 된다. 어느새 종이에 장 볼 것들을 적으며 맛을 상상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먹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생각이 더 확장되어 간다.

아들 진혁이, 진호가 중학교 때쯤인가? 사춘기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근교로 드라이브를 갔었다. 운둔봉이라는 곳에 축소된 한반도가 있다는 것을 듣고 무작정 그곳을 가자고 데리고 나왔다. 지금처럼 길 찾기 프로그램이나 내비게이션이 잘 안 되었던 시절이라서 이정표를 보고 갔지만 결국 보지 못했다. 먼지 날리며 터덜터덜 걷다가 막다른 길에 다다라서야 되돌아왔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물 쫄면으로 유명한 분식집이었다. 그 덕에 기다리지 않고 바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희멀건 한 국물에 들어있는 노란빛을 띤 쫄면은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추위가 남았던 터라 따뜻한 국물을 마시니 몸에 온기가 돌았다. 멸치 육수의 진한 맛이 깔끔했다. 면발을 풀어헤치고 먹어 보았다. 소면의 부드러움과는 다른 쫄깃한 그 맛이 색달랐다. 뭐 이런 것을 먹느냐고 투덜거리던 진혁이가 한 입을 먹어보더니 먹을만하다며 거의 국물까지 다 먹었던 기억이 났다.

그 후로 10여 년이 흐른 후에 우연히 그 동네를 가게 되어 물 쫄면을 먹어 보았다.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었다. 더 확연한 차이는 찐 달걀 반 개가 아니라 메추리 한 알로 바뀌었지만 맛은 그대로인 듯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연이어 떠오른 생각을 좇아 운둔봉의 뒤집어진 한반도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예전이야기를 하면서 물 쫄면을 먹은 것도 내가 주도한 것이었다. 친구는 나이 들어 무슨 분식점에서 밥을 먹느냐고 불만을 표했지만, 허름한 분식집 앞에 늘어서있는 대기 줄을 보고는 지레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봐, 여기가 맛집이라니까,’ 하며 생색을 내기에 딱 좋았다. 음식 위에 올라온 메추리알을 보고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전과는 다르게 이제는 길 찾기 안내가 잘 되어있는 인터넷 서비스를 활용하여 어렵지 않게 그곳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곳에 올라가 보니 아이들과 걸었던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언저리에서 돌고 나간 거였다. 언제까지 걸어가냐며 투덜대던 풋풋한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아이들이 어렸을 때가, 애들에게 미안하다 말하기는 더 어렵지만...... 그때가 헤어질 좋은 타이밍이었을까?’

문득 그 생각에 다다랐다. 아니다. 지금도 좋은 때다. 인생에 좋은 시기라는 게 있을까? 다 자기 합리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기 위한 방편이다.

헤어지기 좋은 기회는 살면서 숱하게 찾아왔지만, 그것을 외면한 것은 나였다. 헛된 희망이 모진 마음을 마모시켰다.

나른한 느낌이 순간적으로 온몸에 퍼져나갔다.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누우려고 방으로 들어갔다. 잔잔한 꽃 이불이 펼쳐져 있다. 무엇인가가 방에 있다. 말라비틀어진 커다란 흑장미 한 송이가 놓여있는 듯했다. 이불에 꽃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사물의 경계가 불분명하거나 색이 흐릿하게 보이는 시력이 나쁜 내가 자세히 보려고 이불 가까이로 다가갔다.

피로 범벅된 내가 누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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