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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햇살 Feb 15. 2024

똑똑하지만 차가운 아이

동생과의 차별로 인해 상처받은 아이

 희주는 3학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똑똑하고 야무진 아이였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한 뼘 정도 키가 크고, 행동이나 말도 의젓해서 고학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3월 초 진단평가에서 희주는 국어, 수학, 영어 모든 과목에서 하나도 틀리지 않고 모두 100점을 받는 올백을 기록했다. 어릴 때부터 쌓아온 독서 습관으로 글도 잘 쓰고, 길쭉한 다리로 달리기도 잘하는 희주는 그야말로 만능 재주꾼이었다. 그런 희주에게 딱 하나 고칠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지나치게 차가운 말투'였다.


 "넌 그것도 못하니? 완전 쉬운데."

 희주는 자신에게 쉬운 과제를 아직 끝내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는 친구에게 이런 식으로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여자 친구들에게는 상냥한 희주가 꼭 남자 친구들에게만 이렇게 차갑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희주야. 사람마다 잘하는 분야가 다른 거란다. 친구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 사과하고, 앞으로는 예쁘게 말해주렴."

 "네, 선생님."

 다행히 희주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조언에 따르는 모습을 보였으나, 다음 날이 되면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참 이상했다. 여자 아이들에게는 양보도 잘해주고,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인기 있는 희주가 왜 남자아이들에게만 차갑게 구는 걸까. 아이들이 하교하고 난 뒤 교실을 서성거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나에게 거북이가 말을 걸었다.


 "그건 희주가 집에서 남동생과 차별을 받아서 그래."



 "희주가 남동생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는 말을 많이 하긴 했는데.. 차별을 받는다고?"


 "희주는 첫째인데 부모님이 늘 남동생에게 양보하라고 말씀하셔서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더라."


 "흠.. 그럼 남동생과 차별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 반 남자애들한테까지 까칠하게 구는 걸까?"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 동생과의 관계 때문에 이성에 대한 적대심까지 생겼다는 건데.. 희주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고마워 거북아!"


 나는 거북이가 있는 수조에 사료를 한 스푼 더 넣어주었다. 거북이는 입을 크게 벌려 사료를 맛있게 먹었다.





 다음 날, 나는 희주를 쉬는 시간에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희주야, 전에 희주가 동생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혹시 요즘도 많이 힘드니?"


 "네 선생님! 완전 짜증 나요. 집에서 남동생 편만 들어주니까 얘가 요즘 아주 더 기어올라요! 어제는 학교 가다가 동생이 신발주머니로 저를 때려서 제가 쫓아가서 똑같이 때렸거든요? 그랬는데 집에 와서 엄마가 저만 혼내는 거예요! 동생이랑 똑같이 그러면 안 된다면서. 너무 억울해요 진짜!"


 "그랬구나. 희주가 정말 속상했겠네. 희주는 엄마가 동생 편을 들지 않고 희주의 말도 들어주길 바랐을 텐데 동생의 말만 듣고 희주를 더 혼내셔서 억울하고 화도 났겠다."


 "맞아요 선생님! 진짜 짜증 나요! 남자 애들 진짜 싫어요!"


 "그런데 희주야, 동생과의 일 때문에 남자아이들 전체를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야. 왜냐하면 희주도 엄마가 희주 말을 안 듣고 동생 말만 들어주시면 속상하듯이, 남자아이들도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희주에게 오해를 받으면 속상할 수 있거든. 희주가 남자아이들이라면 어떨까?"


 "음.. 속상할 것 같아요."


 "그렇지? 내가 겪은 속상한 일 때문에 다른 관계까지 망쳐버려서는 안 돼. 희주의 고충은 선생님이 잘 알았으니까, 다음에 학부모 상담할 때 선생님이 희주 부모님께 희주의 말도 들어주셨으면 좋겠다고 꼭 말씀드릴게."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날 오후, 나는 희주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께서 어린 동생의 편을 들어주시는 마음도 이해하지만, 동생도 이제 7살이면 아주 어린 나이가 아니라 사리 분별이 가능하기 때문에 동생이 잘못한 일까지 희주가 혼나는 것은 두 아이 모두에게 교육적으로 좋지 않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동생은 항상 누나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누나에게 더 함부로 할 수 있고, 누나는 항상 억울한 마음을 갖고 자라게 되니 가족에 대해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가슴속에 분노를 키우며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어렵고 힘드시겠지만 두 아이들 사이에서 중립을 잘 지켜서 아이들이 싸울 때에도 잘잘못을 가려서 공평하게 혼을 내시는 게 좋겠다고, 진심을 다해 말씀드렸다.


 "어머님, 그리고 희주가 이제 사춘기에 접어드는데 남동생과의 관계 때문에 이성에 대한 적대심이 생긴 것 같아서 그 부분이 가장 걱정이 돼요. 동생과의 관계에서 생긴 억울함과 분노가 학교나 사회에서 이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으니 꼭, 집에서 관계를 잘 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도 학교에서 더 잘 지도할게요. 어머님도 좋은 분이시고 희주도 똑똑하고 착한 아이니까 지금부터 노력하면 분명 더 잘 자랄 수 있을 거예요."


 희주 어머니도 희주가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는 줄은 몰랐다며 집에서도 동생과 공평하게 지도할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참 어렵다며 하소연하는 희주 엄마에게 나는 "저도 그래요, 어머니. 아이를 키우는 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같아요. 우리 같이 잘 키워봐요!" 하면서 공감했다.


 부모로서도, 교사로서도 아이를 키우는 건 참 어렵다. 그렇지만 그 아이가 나의 한마디 말, 나의 행동으로 인하여 점점 더 활짝 피어가는 모습을 보는 건 꽃밭의 화단을 가꾸는 것처럼 정말 행복하고 뿌듯한 일이다. 희주 엄마와의 전화를 끊으면서 나는 '희주'라는 예쁜 꽃이 활짝 만개하여 싱그럽게 반짝일 그날이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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