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직장수필 13화

나의 주한몽골대사관 답사기 2

심층동인

by 화상 바오로

(나의 주한몽골대사관 답사기 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우선 그네의 생김새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대사관에서 우리를 맞아준 이들은 오가다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사님은 푸근한 이모님의 이미지였고, 참사관들 중 한 명은 동네 반찬가게 주인 아저씨의 인상, 또 한 명은 힘이 넘치는 젊은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생김새만으로는 우리네와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유사한 생김새에서 발원한 친밀감은 당연히 저녁자리의 빠질 수 없는 대화 주제였고, 술이 꽤나 거나하게 취한 후에는 각자 엉덩이 근처 몽고반점이 있던 부위를 가리키며 키득거리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생김새보다 쇼킹한 것은 대사님의 한국어 실력이었다. 몽골은 오랜 기간동안 사회주의 국가였고, 그러므로 우리보다 북한과 먼저 수교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고 대사님이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수학했다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대사님의 한국어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발음이 정확할 뿐 아니라 구사하는 어휘도 상당한 수준이어서, 그날 저녁 대사님과의 대화는 거진 한국어로 진행되었다. 경제 참사관 또한 한 대학에서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어, 영어는 전문적인 용어를 써야 할 때만 보충적으로 사용하였다. 나는 취하기 전까지는 세련된 매너까지 갖춘 직업 외교관들에 새삼 감탄하였고, 취한 후에는 나의 언어들도 더불어 취해버려 두 언어가 따로 놀지 않고 콩글리시로 어우러지게 내버려 두었다.


7년 만에 부서를 옮기고 난 후 ('티베트에서의 7년'도 아니고, 이게 뭐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공공기관에서의 잦은 인사이동이란 복지의 지극한 형태 중 하나이다) 첫 공식적인 외부 일정이 몽골 대사관 방문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 가까워질 시간도 갖지 못했던 상사 두 분과 함께하는 자리었기 때문에 꽤 긴장이 되었지만, 그들은 친근한 생김새와 유창한 한국어로 손쉽게 나를 무장해제시켰다. 외교관들이란 소금(한국인)이 각기 다른 전하를 띠는 나트륨 이온(생김새)과 염화 이온(한국어)의 결합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들 간의 이온 결합을 해체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극성을 띤 물에 그냥 담가버리면 된다는 것도 잘 이해하고 있는 이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 만찬장 대화는 즐거웠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대사님, 이거 혹시 말젖인가요? 하하, 아니에요. 한국 우유예요. 참, 우유는 몽골어로 타락이라고 해요. 어... 타락이요? 저희 어머니가 가끔씩 타락죽 끓여주시는데, 물이 아니라 우유에 넣고 끓이는 걸 신기해했거든요. 그러면, 이 타락이란 말이 몽골에서 왔겠네요? 하하, 아마 그럴 거예요.


실제로 인터넷에서 아래와 같은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타락’이라는 단어는 몽골어에서 기원하였는데, 몽골어로 ‘토라크(torak)’는 말린 우유를 뜻한다. 조선시대 타락죽은 보약의 하나여서 소주방에서 끓이지 않고 내의원에서 끓였다. 서울 동쪽의 낙산에 왕실 전용 목장이 있었고, 날씨가 추워지면 내의원에서 타락죽 처방을 했다."(문화일보, <영양학자 김갑영의 우리 음식 이야기-타락죽>, '12. 12. 5)


몽골 사람들은 포용성이 높죠. 네... 칭기스칸의 아내가 적대 관계에 있던 부족에게 납치되어 겁탈당했고 이로 인해 태어난 이가 주치인데, 모든 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칭기스칸은 주치를 자신의 첫째 아들로 인정했다죠? 몽골 사람들은 이런 칭기스칸의 통 큰 마음을 이어받은 것이 아닐까요? 오... 요즘 몽골의 젊은 사람들도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을 바오로 씨가 잘 알고 있네요?


이런 대화가 오고 갈 즈음 나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경제 참사관은 한 손으로는 나와 보드카 러브샷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손은 또 다른 대사관 직원에게 보드카 더 꺼내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최근 만나본 어떤 이보다 덩치가 컸다. 지난해 말 롯데호텔에서 만나봤던, 마치 유도 선수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사르도르 우무르자코프 우즈벡 투자대외협력부총리 겸 투자대외무역부 장관(헥헥... 길다)을 왜소하게 보이게 만드는 체격이었다. 그런데 말짱한 정신이었다면 포권지례를 한 후 손 속에 사정을 보아 달라고 부탁해야 마땅한, 금강불괴의 몸을 이룬 이에게 나는 술 마시기 비무를 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관리의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대사관 직원 중 한 분이 슬그머니 내게 와서 술이 독하니 음식을 든든히 먹어두라는 충고를 해줬다. 그렇지만 어릴 적 창원의 몽고정 앞에서 놀던 기억, 할머니께서 몽고간장으로 음식의 간을 맞추던 추억까지 길어 올려 보드카와 함께 버무려 그와 더불어 함께 마셔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몽고정 얘기는 제주의 몽고 주둔지로 이어졌고, 또 제주 조랑말의 어원이 되는 조로모리로 이어졌고, 조로모리는 활로 이어졌고, 활은 우리나라 양궁으로 이어졌고... 이어진 것들은 모두 몰골 대사관의 보드카로 매듭이 지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얘기를 그날 과음의 심층동인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 표층동인(?)이라고나 할까? 분위기에 휩쓸려 과음을 한 경험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심층동인이란 어둠 속에서 깜빡깜빡 빛을 내는, 심지를 따라 타오르며 스스로의 지방과 주변을 녹여내는 촛불과 같은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것들은 대사관, 대사, 외교관과 같은 단어들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어린 시절을 중동의 작은 나라에서 보낸 내게 이러한 단어들은 특별하다. 당시 대사관은 몇 안 되는 재외 한국인들의 구심점이었다 - 아쉽게도 좋은 쪽 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으로. 여전히 독재의 잔재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던 그 시절, 대사관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곳이었다.* 공무원인 아버지뿐 아니라, 공무원의 아내였던 어머니에게까지도. 그만큼 가슴속에 쌓이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랬을까,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 틈만 나면/거나하게 취하실 때면 외교관이 되라고 하셨다.


* 글을 쓰는 오늘도 우리 회사 해외 주재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그는 그곳 대사님이 현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업에 우리 기업을 '끼워 넣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 뭔가 좀 해보라'라고 했다며 진한 푸념을 했다. 나는 '우리 기업이 깍두기냐? 그냥 끼워 넣게...'라고 답했다.


이후 나는 혼자 귀국해서 이모님 댁에 얹혀살면서 대학 입시 준비를 했다. 모든 것을 혼자 준비하자니 모든 것이 부족했고, 이 때문에 시간이 흘러 수학능력 시험을 칠 때까지도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판에 법대로 진학하라는 할아버지와의 갈등을 빚은 후 나는 충동적으로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자, 전공은 정했고, 학교는 어디로 가야 하지? 지금이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수 있겠지만(하긴, 세상사 뭐든 그렇지 않을까?) 나는 신촌에 있는 학교를 선택했다. 아버지가 가고 싶어 하셨던 학교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가정형편 때문에 서울에 있는 학교로 진학하는 꿈을 접어야만 했기 때문에, 내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여 당신의 못다 한 꿈을 이뤄주길 바라고 계셨다.*


* 언젠가 아버지에게 '왜 연세대에 가고 싶으셨어요?'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마산고 시절 '성문영어'의 저자인 송성문 선생님에게 직접 사사받으셨는데, 송성문 선생님이 '자네는 참 영어를 잘하는데, 연세대로 진학하는 것이 어떻겠나?'라고 하셨다고 답하셨다. 그래서 연세대에 가고 싶으셨다고 한다. 사실 알고 보면 인생의 방향은 어느 한순간의 강렬한 느낌을 잊지 못하고 이를 계속 쫓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한편, 연세대는 당시 대학팀뿐 아니라 실업팀도 참여한 농구대잔치에서 전승 우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덕택에 문경은, 우지원, 이상민, 서장훈 등 스타급 선수들은 이미 연예인급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다. 고교 친구들 또한 쉬는 시간이면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레이업 슛을 연습하던 때다. 그리고...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보충학습을 위해 집을 나서던 때다. TV에서 문경은 선수가 시원하게 백덩크를 성공시키는 장면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덩크슛 대회도 아닌 실전에서. 허걱! 이건 잘 생긴 애가 공부도 잘하는 것과 같은 확률이 낮은 사건이 아니라, 통계학의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대학팀의 전승 우승이라는 것도 만화 같은 일인데, 3점 슈터의 백덩크는 '슬램덩크'보다 더 만화 같은 일로 느껴졌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학교 선택은 정말로 그렇게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바램 + 환상적인 백덩크의 조합. 멋지지 않니? 멋져 보이는 것에 쉽게 끌리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내게 유리한 것이라도, 멋없는 일엔 손이 가지 않는다. 글쓰기도 멋지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교관의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고시 공부는 커녕 학생운동에 빠져있던 나는 1996년 학내에 헬기가 뜨고 이과대 등 단과대학이 불길에 휩싸였던 한총련 사태를 겪고 입대, 제대 후엔 IMF 여파를 취업시장에서 맛봐야만 했다. 어찌어찌해서 취직은 했지만, 외교관의 일과는 사뭇 다른 일이었다. 물론 그간 몇몇 대사관 직원들을 만난 일도 있고 식사를 곁들인 업무협의를 한 적도 있었지만, 외교적인 일로 만난 것은 아니었다. 상업적인 업무에 관한 일이었고, 금융에 대한 일이었다. (그러나, UAE 원전 사업, 이집트 K-9 방사포 수출 사업 등처럼 프로젝트의 규모가 크면 이는 어쩔 수 없이 양국 간의 문제가 된다.) 상업적인 일에 대한 외교관과의 대화는 매번 초점이 어긋났다. 외교의 관점에서는 금융이 쪼잔하게 보이고, 금융의 관점에서는 외교가 모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두 부문이 두물머리의 물처럼 한 몸으로 섞이는 지점은 높은 분들의 외국 방문, 또는 방한에 맞춰 치러내야 하는 이벤트를 협의하는 때이다. 이때 외교와 금융은 비로소 같은 언어를 말한다.


그러나 몽골 대사관에서는 처음부터 같은 언어로 소통했다. 역사와 문화를 얘기했고, 상업금융이 아닌 개발금융을 얘기했다. 같은 언어로 이루어지는 소통의 힘은 놀라웠다. 외교관들을 진지한 업무 상대방, 그리고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어느 순간 탁 하고 풀렸던 것은 나의 경계심뿐이 아니었다. 남몰래 대사관과 외교관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배배 꼬인 심사도 휘리릭 하고 풀렸던 것이다. 오랫동안 꼬인 줄이 맹렬한 속도로 풀려나가는 동시에 나의 시간 또한 빠른 속도로 되감겨 과거의 한 시점을 향했다. '티베트'에서의 7년을 지나, 이번 생에는 금융 전문가가 되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게 된 기획담당 부서 및 인사담당 부서 근무 시절을 건너, 처음 취직하던 시절로. 입대 전후로 학내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던 대학시절을 통과하여 이모 댁에서 하숙하던 고교 시절로.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함께 살았던 중동의 작은 나라의 중학교 시절로.


나는 그곳 학교 등교 첫날 하교시에 탈진 상태에 빠졌다. 당시 '픽업'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던 나는 낮 기온이 40도가 넘는, 사막과 사바나가 듬성듬성 섞여있는 1시간이 넘는 길을 걸어서 집으로 가려했던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차에 태워 학교에서 데려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나를, 탈진해 쓰러져 있던 나를 수소문하여 찾은 이들은, 영어보다 더 낯설게 느껴졌던 서울말을 쓰던 대사관 직원들이었다. 탈진하여 그늘 속에 앉아 가쁘게 숨을 쉬던 나를 찾아 기뻐하던 대사관 직원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 순간 나는 이제는 나보다 어린 몽골 외교관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유레카! 그렇구나. 나는 내 아버지의 꿈이자, 한 때 내 꿈으로 꾸었던 외교관과 어깨동무를 하기 위해 그렇게까지나 술을 마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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