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직장수필 20화

수염

경계

by 화상 바오로

수염이 자랐다. 느낄 수 없는 수염의 시간이 목과 얼굴의 경계를 자아냈다. 얼굴의 형태를 가리지 않고 오히려 얼굴의 경계를 드러내는 딱 그만큼의 수염이다. 불현듯 어린이들이 도화지에 그리는 얼굴들을 생각해본다. 연필로 꾹꾹 눌어 굵은 선을 만들어 윤곽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들의 눈엔 그림의 주인공이 되는 이와 나머지 세상은 투과성 없는 굵은 선으로 경계 지어져 있다. 아이들에게는 피아 경계가 매우 소중하며, 경계가 무너질 경우 생존에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나이가 들면서 경계는 희미해진다. 얼굴과 목이, 목과 어깨가, 볼과 귓불이, 배와 허리가 경계를 허물듯 말이다. 옳고 그름도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자가 처해있는 상황에서 서로를 다름으로 지탱하기보다는 비슷함으로 서로 섞인다. 문득 까슬까슬한 촉감으로, 원초적 말단 신경으로 여기와 저기를 구분해주는 수염이 고맙다.

희미한 것은 육체적인 경계만이 아니다. 그리움의 경계 또한 희미하다. 기억들은 녹아내릴 듯 이글대는 아스팔트 위를 냉방이 잘 되지 않는 낡은 승용차로 달릴 때(그리고 퀴퀴한 에어컨 바람을 피해 코를 돌릴 때), 높은 탑 위에서 낯선 시내를 내려다볼 때, 무더운 날 땀범벅인 추레한 모습으로 호텔 로비에서 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릴 때, 땅거미가 질 때까지 회의를 하다 비로소 일어섰는데 갑작스러운 허리 통증이 찾아올 때 살짝 얼굴을 들이밀고는 곧 흩어져 일상과 섞여버리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순간을 영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립기 때문에 붙잡으려 하는 순간 그리움이 아닌 다른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립거든 바라지 말고 떠나야 한다. 하염없이 걷다 수염이 돋아난 것이 느껴질 즈음 다리에 맥이 풀리고 숨결에서 통증이 돋아날 때, 비로소 다른 모든 순간들과는 구분되는 아늑한 그리움의 순간이 안식처럼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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