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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 꽃 향기 Dec 18. 2024

한오백년 살자는데...


뇌진탕 경과를 보기 위한 신경외과 외래 진료가 있는 날. 휴가를 낸 딸이 함께 동행한다. 딸이 꺼낸 엉뚱 발랄한 제 아들놈 이야기에 풀풀 웃다 보니 남편은 근엄한 표정으로 앞만 주시하고 있다. 손자라면 껌뻑하는 할아버지가 왜 저러나 싶어 돌아본다. 귀가 웅웅거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제스처다. 고속화 도로를 달리는 중에는 차 안에 있어도 울림이 큰 모양이다.  

    

다시 찍은 CT 결과는 좋다. 깨진 곳도 잘 아물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시간이 지나면 다 좋아질 거라고 의사가 강조한다. 귀울림 현상은 지켜보다가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아보라고 한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가 자주 갔던 ‘남원추어탕’에 들른다. 오심이 심해 쫄쫄 굶다가도 그 집 추어탕은 다 비우던 남편인데 세 숟갈 뜨더니 더는 먹지 못하겠다고 한다. 기운 좀 내라고 들왔더니 날 잡아 잡수  목 늘어진 남자. 그의 건강을 세상에서 가장 바라는 모녀인데 오늘따라 추어탕은 왜 그리 맛있는지. 환자를 지키려면 먹어둬야 한다고 서로를 부추기며 뚝배기 바닥까지 싹싹 긁는다.  

    

딸이 아빠 입맛을 잡아보려고 만든 알밥을 들고 왔다. 딸 요리라면 아무 소리 않고 잘 먹던 그인데 이번에는 아닌지 고갤 흔든다.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먹어주면 좋으련만 알밥을 앞에 두고 샌드위치를 찾는다. 의식이 있든 없든 일전에 먹은 게 괜찮았던 모양이다. 가까운 빵집으로 뛰어가 샌드위치를 사 왔건만 몇 입 먹지 못 하고 화장실행이다.      


남편은 딸과의 필담으로 알게 된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넘어지고 119 불러 응급실에 갔다 온 이야기를 경과 보고 하듯 간간이 했는데도 뇌에 입력이 되지 않았을까. 병원에서 차례 기다리는 동안 딸과의 필담에서 처음 알았다며 내게 말한다.   

   

“그동안 고생했겠네.”     

  

고생했겠네, 그 한 마디뿐인데 주책없는 나의 눈시울은 또 뜨겁다.  

         


    

어떻게든 먹어서 기운 좀 차려야 모든 게 순조로울 텐데 도무지 뭘 먹고자 하는 의욕이 없다. 섬망 중 먹는 행위 자체가 지워졌을까. 쇠고기야채죽을 앞에 두고 수저 들 생각을 않는다. 고개 숙인 채 마냥 시간을 보낸다. 보다 못해 내가 죽을 떠서 입 가까이 대면 입은 벌린다. 그렇게 들어간 죽은 한나절 씹을 태세다. 삼키는 게 입력되지 않은 로봇처럼. 먹을 때 뭐가 젤 걸림돌이냐고 물었더니 한참 뜸을 들인 후 모오든 게 힘들다고 한다.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힘이 든다고.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몸을 어쩌지 못하겠는지 남편은 그릇을 밀어놓고 그대로 엎드린다. 나는 그를 위한다는 탈을 쓴 마녀. 고개를 다시 들게 해서 수저를 들이민다. 입에 물린 곡기를 물리치지 못한 그가 울며 겨자 먹기로 입 안에 들인 죽을 하염없이 머금고만 있다.    

  

‘이래서 어떻게 항암을 하겠어’      


나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남편은 말이 없다. 항암만이 살 길이라고 굳게 믿는 그는 당신 컨디션 생각 않고 당연히 하겠다고 할 것이다. 밥 한 수저 제 손으로 들 힘이 없는 사람이 항암 해서 받을 고통 뻔히 알지만, 남편이 하겠다면 말릴 수 없다. 말려서도 안 되고. 의사는 검사 수치만으로 모든 걸 판단한다. 혈액검사는 매번 잘 통과한 몸이라 지금 상태가 바닥처럼 보여도 결과는 잘 나올 것이다. 다음 주 11차 항암 예정인데 마음 복잡하다.     


넘어진 지 일주일째. 한숨도 못 잔 사흘, 잠만 잔 사흘. 오늘은 어쩌려나. 의사는 오르다 내리기를 반복하다 점점 평온을 찾게 된다고 하던데 현재 괜찮아 보인다고 안심할 단계는 아닌듯하다. 낮에 귀가 웅웅거려 안 들린다는 말이 신경 쓰여 남편 얼굴을 마주 보며 천천히 말했더니 들린다고 한다. 온갖 소리 집합체인 바깥에서는 안 들려도 조용한 실내에서는 괜찮은 모양이다. 성치 않은 몸에 귀까지 비정상이니 어떤 기분일까. 뇌진탕 아니래도 청력이 안 좋을 나이이니 극도로 쇠약해진 몸 생각하면 남편의 귀 그러는 거 수긍이 간다. 기력 되돌리는 게 급선무다. 그래야 밀어 두고 바라만 보는 대금을 다시 잡을 수 있다.    

 

남편은 꽤 오래 대금을 했다. 초보 땐 남편이 대금만 손에 들면 이웃에 신경이 쓰였다. 귀마개를 사다 돌려야 하나 싶을 정도로 조마조마했다. 세월 흘러 제법 품위 있는 속소리를 뽑아내고, 내가 들어도 엄지 척을 누르고 싶어 지자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나 ‘바람의 노래’ 같은 귀에 익은 곡을 연주할 때면 창 활짝 열어 이웃에 더 잘 들리게 하고 싶었다. 대쪽 같이 마른 사람이 꼿꼿하게 앉아 대금을 부는 남편의 모습도 보기 좋았지만, 대금 향한 열정이나 시간의 축적 또한 무시할 일 아니라는 듯 어느 곡이든 막힘이 없어졌다. 산을 타고 달릴 때 못지않게 남편 삶의 윤활유가 되어 준 건 대금이다. 항암 차수가 늘어나자 그렇게 즐기던 대금도 손에서 멀어졌다. 어느 날부터인지 자신이 연주해서 녹음한 것으로 위로 삼는 것 같았는데 귀가 좋아지지 않아  즐거움마저 없어지면 어쩌나.      


일찌감치 암과의 격전에 지친 남편이 삶의 전투에서는 한 발 물러서자 싶었을까. 남편은 온갖 잡사 욕망에서 벗어나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다는 듯 대금을 불어댔다. 좋은 소리도 삼세번, 나는 남편의 대금소리가 지겨울 때가 있었다. 생산적인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량처럼 앉아서 대금이나 부는 남편이 못마땅했다. 저 놈의 소리 귀에 박히겠다고 혼자 투덜댔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한오백녁 살자는데 웬 성화요

   

남편은 알까. 그렇게 속물인 아내에게도 그가 즐겨 연주하던 ‘한오백년’을 한 오백 번쯤 반복해서 들어도 좋을 것 같은 날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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