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썩 우수한 면도사
통증이 있는지 가슴까지 무릎을 구부린 자세로 배를 움켜쥐고 있는 남편. 한 시간 전에 마약 진통제를 먹었는데도 진정이 되지 않나 보다. 다른 진통제 하나 더 먹자고 해야 할 것 같아 꺼내 들었다가 도로 넣는다. 좀 참아 보겠다고 할 게 분명해서다. 아침으로 준비한 단호박 수프는 식을 대로 식었고 달걀프라이와 과일 조각들이 말라가고 있다.
통증이 심해지면 신음이 엄청나게 크다. 통증은 유독 밤중에 창궐하는가. 소심한 나는 이웃에 피해를 줄까부터 걱정이다. 다시 처방받아 온 진통제 병사들도 통증을 잡지 못하는지 그놈이 올 때는 무엇도 통하지 않는다. 온갖 정성을 들여 먹을 걸 준비했는데 먹기 직전에 진통제를 찾을 땐 맥이 풀린다.
하루하루 건너는 게 참으로 힘에 겹다. 그는 도무지 뭘 먹으려 들지 않고 나는 어떻게든 먹이려 하고. 먹지 않겠다고 등 돌리고 누워 꼼짝하지 않는 사람과 먹이려는 일념으로 이론을 읊어대는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어처구니를 틀어쥐고 죽어도 못 먹겠다고 버티는 사람한테 아무리 훌륭한 음식을 들이댄다 한들 그 음식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돌덩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참 씁쓸하다.
급기야 나는 이런 말까지 하고 말았다. 항암을 하는 이유가 뭐냐, 암을 물리치고 예전처럼 살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냐, 아니 더 바라지도 않고 혼자 화장실에라도 가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막말로 항암을 하는 건 더 살고자 하는 바람이 아니냐, 약도 안 먹겠다 밥도 안 먹겠다고 하면 어쩌라는 것이냐, 당장 다음 주로 예정된 항암을 어찌할 것이냐...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다. 어쩜 이미 안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눈빛을 잡으려 나는 자세를 바꿔가며 앵글을 들이대듯 그의 눈을 향해 돌고 돈다.
어제부터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버거워한다.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것은 무리가 없었는데 애만 쓰지 일어나 지지 않는 듯해서 손을 잡아끌었다. 잠시 앉는가 싶더니 다시 무너져버리는 그의 몸. 그렇게 되면 침대에서 내려와 걸어서 화장실 가는 건 꿈에 불과할 것이다. 그동안 그 몸을 하고도 혼자 움직여 주는 게 진짜 고마웠는데...
따듯한 물을 받고 수건 몇 장 챙겨 그의 방으로 들어간다. 욕실에서 하면 편할 텐데 아무런 의욕이 없는 사람한테 씻으러 욕탕에 가자고 할 수가 없다. 그를 위해 욕탕 간이 의자까지 샀건만 딱 한 번 사용하고 그마저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현재 그를 침대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까진 진짜 무리다. 내가 좀 번거로우면 된다. 내 팔뚝 정도밖에 안 되게 변해버린 그의 다리. 뼈만 남아서 주무른다는 것도 조심스럽다. 따뜻한 물에 담근 발을 살살 주물러 준다. 손과 발은 엄청나게 부어 있다. 혈액순환이 안 되어서 그렇다고도 하던데 효과가 좀 있기를 바라며 열심을 내본다.
쇠고기 시금치죽을 끓인다. 다른 때보다 푹 퍼지도록 눌러가며 저어준다. 여태 그의 침대까지 가서 뭘 먹으라 하진 않았는데 이젠 다르다. 어떻게든 그의 속을 채워야 한다. 급한 대로 큰 쿠션들을 모아 와서 그의 등에 받쳐 편하게 앉힌 다음 죽을 떠 넣어 준다. 그것마저 마다할 수 없는지 입을 벌린다. 너무 빈속에 처음부터 많이 주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더 먹이고 싶을수록 느긋할 필요가 있을 듯해서 작은 잔 하나 분량만을 떠먹였다.
며칠 사이에 남편 얼굴이 달라졌다. 똑바로 누우면 등짝도 배도 아프다며 꼭 왼쪽 볼을 대고 무릎을 가슴께로 구부리고 있다. 하루 20시간 정도를 그렇게 누워 있으니 당연히 왼쪽 눈두덩이 붓겠지. 부은 눈 뜨기가 거북해 보여 수시로 물수건을 대주고 닦아 주곤 한다.
얼마 전 형님네가 남편을 보고 돌아가면서 하는 말이 “생각했던 것보다 얼굴은 좋네”였다. 남편의 증세가 궁금해서 전화한 그분들께 내가 느끼고 보는 대로 말했는데 와서 보더니 생각보다 얼굴이 좋다는 것이다. 내가 좀 오버하는 스타일인가. 나하고만 있으면 한없이 처지고 곧 못 일어날 사람처럼 굴다가도 딸이나 손자, 사위가 오면 목소리부터 달라진다. 형, 형수가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실에 머문 적이 언제인가 싶은데 그날은 소파에 한참 동안 앉아서 어릴 적 추억을 되새기며 웃곤 했다. 보는 나도 기분 좋았지만 문병 온 그들도 안심하고 돌아간 듯했다.
깎지 않아 더부룩하게 솟은 남편의 수염을 쓸어보았다. 의식하지 않을 땐 몰랐는데 면도가 연례행사가 된 후 검은색보다 흰색 털이 더 많다는 걸 알았다. 기력이 없으면 수염도 힘을 잃는 건가. 아기 새의 깃털처럼 부드럽게 쓸렸다. 수염을 깎자고 몇 번 말해보았지만, 그 일마저 버거운가 알았다고 하고 그만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면도기 쥐는 건 미덥지 않은지 수염 밀어볼 기회를 주지 않았다.
수염이 더부룩한 걸 보았는지 사위가 자동 면도기를 가져왔다. 아무래도 수동이 시원하다고 수동을 고집하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남자의 수염을 깎는다. 드르륵드르륵 남편의 턱을 옮겨 다니며 터럭을 민다. 그는 내가 하기 편하도록 이리저리 턱을 치켜들고 이쪽으로 저쪽으로 턱을 돌려준다. 나는 꺼칠꺼칠한 부분이 있나 손으로 만져가며 면도기를 움직인다. 그가 씩 웃는다. 왜 웃느냐고 물으니 그가 말한다.
“그냥 웃겨서... 자긴 수염을 밀어본 적도 없으면서 은근히 잘하네. 전생에 면도사 아니었나 잠시 생각했어.”
하하하 하긴 내가 했다 하면 뭐든 잘하지, 하려다 만다. 내가 전생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나 남편 수염을 밀어주면서 병이 깊은 한 남자를 케어한 경험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남편이 내 손길에 의해 깨끗해진 턱 주변을 쓸며 웃었으니 그만하면 썩 우수한 면도사가 아닌가. 소리도 없이 눈은 입꼬리를 향하고 입꼬리는 눈을 향한, 핼쑥한 그의 웃음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지금의 그와 나처럼 서로를 향해 있지만 그리고 잘 웃기도 하지만 서로가 안타까워 짓는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