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럽고 향기로운 느낌의 바람...
“자기야!”
남편이 부르는 소리가 난다. 자기 옆에 머물다 나온 지 10분도 안 됐는데 또 부른다. 설거지 하다가 고무장갑도 벗지 못한 채 남편에게로 간다.
“왜?”
“뭐 해? 당신이 옆에 없으니까 안정이 안 돼.”
자세 바꾸는 것도 힘들어하는 그가 몸을 들썩이며 공간을 내준다. 자기 옆으로 와서 누우라는 얘기다. 사실 들썩이는 시늉만이지 내가 들어가 눕거나 엎드리기 옹색한 공간이다. 나는 최대한 몸의 각을 세우고 그에게 밀착한다. 세상 가벼운 이불도 무겁다고 느끼는, 그의 몸을 압박하게 될까 조심조심.
남편의 섬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예전처럼 심하지는 않아서 본연의 모습일 때가 더 많다. 나도 섬망증세쯤은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고 자꾸 말을 시키고 받아 주다 보면 섬망 중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도 있다.
요즘은 그와의 하루하루 순간순간, 또 말 한마디가 소중하게 생각되어 녹음을 자주 한다. 내가 휴대폰 조작하는 걸 보면서도 그는 내가 뭘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그의 음성이 저장되고 있다.
남편은 워낙 말이 없던 사람이었다. 뭘 물어도 단문형으로 끝내는 사람이라 요 근래 남편의 모습에서 놀랄 때가 많다. 대놓고 말하기 간지러운 이야기를 꺼내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풀어 놓는다.
나와 말하는 걸 유난히 좋아하는 남편이 "내가 당신을 부른 이유는..." 하면서 말문을 연다.
“아까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너무 좋더라. 자긴 어땠어?”
나는 예전 시어머님 흉내 내어 “말해 뭐 해”하며 웃는다. ‘이 사람 아픈 거 맞아?’ 할 정도로 남편은 또렷해 보이고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싶게 수다가 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무르익자 진짜 유치하기 그지없는 것도 주고받는다. 결혼해서 행복한 적이 언제였냐, 가슴 아픈 적은? 또 나에게 불만이 뭐였냐, 좋은 점도 말해줄 수 있느냐 등등. 말 나온 김에 또 질문한다.
“자긴 나의 어느 점이 좋았어?”
남편은 한참 뜸을 들인다. 좋은 점을 저리 골똘히 생각하는 거 보면 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다. 에구, 괜히 물어서 내 기분만 이상해지는 거 아닌가 해서 살짝 후회하는 순간, 그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뗀다.
“어 뭐랄까... 자기한테선 늘 바람 냄새가 났어. 싱그럽고 향기로운 느낌의 바람. 뭐 저런 여자가 있나 싶게 항상 그런 느낌이 들더라.”
어? 뭐라는 거야. 바람 냄새? 내 남편한테서 그런 말을 듣다니... 나는 연애할 때로 돌아간 듯 살짝 수줍기까지 하다. 오랜 세월 부대끼며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산 남편한테 들은 말 중 최고로 신박하다. 아, 달콤한데 난 왜 부끄럽지? 반찬 잘한다거나 적은 월급으로 살림 잘 살아줬다거나 하는 말 정도를 좋은 점이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다. 명사와 동사로 된 문장밖에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바람이라는 명사에 산뜻한 형용사라니..... 좋아한다보다 사랑한다보다 백배 더 감미롭다.
그동안의 내 남편은 세상이 두 쪽이 나도 그런 말 할 사람이 아니었다. 충격이다. 그는 그럴 수 있었던 자신이 좋고 편안하고 나긋하게 들어준 내가 고마웠던가 보다. 그 시간이 좋았다는 말 또 하는 거 보면. 이참에 나도 남편의 좋은 점을 말해야 했는데 내 감정에만 취해 있다가 놓쳤다. '당신은 참 너그러운 사람이지. 늘 깨끗하고 단정한 사람이었어. 어느 한 가지 성가실 게 없는 사람, 나에게 왜? 어째서? 라는 말을 써본 적이 없다는 거 당신 알아?' 빨리 기회를 잡아 내가 생각하는 남편의 좋은 점도 말해줘야겠다.
싱그럽고 향기로운 바람 이야기는 섬망 중이거나 망상 중이거나 해서 다음에 물으면 어쩜 그 말을 했다는 것도 기억 못 할지도 모른다. 그런 말을 언제 했느냐고, 나는 하지 않았다고 할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절대 절대 다시 묻지 말아야겠다.
남편은 긴 이야기에 피곤했는지 눈을 감고 있다. 다시 조심조심 몸을 일으키는데 내 팔을 잡는다. 그냥 그렇게 있어 달라는 뜻이다. 이 평화가 오래 지속되었으면..........
사진출처;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