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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속처럼 깊어진 눈

두레박을 드리워도 닿지않을...

by 흰꽃 향기 왕린


우리의 현재를 증명해줄 물건들이 속속 도착한다. 뜯어볼 수가 없다. 아니 보고 싶지 않다. 소변 통, 대변 통, 기저귀... 닥친 오늘을 외면하듯 빈방에 밀어 넣는다. 남편 침대는 환자용 전동침대로 바꾸고 휠체어는 포장을 뜯지 않고 구석에 세워둔다.

퇴원해서 집에 돌아온 남편은 안정을 찾은 듯하다. 섬망도 없어 보여 이런저런 말을 시켜본다. 그런데 세상에, 병원에 다녀온 사실 빼고 웬만한 건 다 기억하지 못한다. 물리치료사가 시키는 대로 운동한 것도 팥죽을 먹으며 오래 이야기한 것도 침대에서 낙상한 것도.

퇴원 전, 수간호사님이 보자고 하더니 호스피스병원을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 싶어 뒤로 물러서자 다시 바짝 다가서며 소곤대듯 말했다. 예약한다고 바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막상 가려고 할 땐 갈 병원이 없으니 지금 해두는 게 맞다는 것이다. 환자 상태는 예측할 수 없다고도 했다.

집에 오자마자 호스피스 병원에 예약했지만 입원 날자는 미지수. 적극적으로 가정간호를 알아본다. 가까운 대형병원은 진료도 2개월 후에나 가능하고 정작 가정간호를 받으려면 진료 후 3,4개월은 기다려야 한다. 간절하면 통한다던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 덕에 조건이 맞는 가정간호 전문 병원을 찾았다. 이틀에 한 번 영양제를 맞기로 한다.

일전에 신청했던 장기요양보험은 3등급 판정을 받았다. 사회복지사는 2등급은 받아야 할 분 같은데 3등급 나온 이유를 모르겠다며 의아해한다. 검사받을 때와 지금 상황을 감안하면 이해가 안 될 것도 없다. 3등급이면 하루 3시간 요양보호사가 방문해 주니 보호자가 잠시 쉴 짬을 얻는다나. 오로지 환자와 보호자를 위해 일한다는 관계자 앞에서 나는 자꾸 딴생각에 빠져든다. 나중 생각해서 보호자의 힘을 좀 비축해야 한다고 하지만 유독 나만 찾는 남편 옆에 생판 낯선 사람만 남겨 두고 집을 벗어날 수 있을까. 그를 떠나서 과연 나는 편할까.

남편이 딸에게 전화해서 지금 우리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느냐고 묻더란다. 장기 요양과 관련된 집기가 오고 가정 간호 신청 건으로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가 연신 드나드니 놀란 모양이다. 귀는 잘 안 들리는데 자기만 빼고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었을까. 얼마나 불안하면 딸의 번호를 눌렀을까.

아빠 병간호를 엄마한테만 맡기는 게 걸린 딸은 진즉 휴직한 상태다. 수시로 아빠 곁을 지키고 내 점심을 도맡아 만들어다 준다. 주말이면 으레 딸네 식구가 몰려와 왁자한 시간을 보낸다. 남편은 뜬금없이 애들을 불러들이는 날도 있다. 무슨 중요한 말을 준비한 듯 폼을 잡으며 헌법이 어떻고 경제가 이렇고...가설이 장황하다. 당첨된 복권이 어딘가 있을 거라고 해서 아닌 줄 알면서도 당신 책상을 뒤지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한다. 어쩜 그렇게 우리 관심사와 무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는지 매번 놀란다. 남편 잠재의식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의외의 모습에 놀랍지만 한편 재미있다. 남편과 함께 할 때면 그가 위병 중인 걸 잊고 떠들썩 유쾌한 시간을 보낸다.

남편이 부른다. 급히 소변 통을 들고 들어간다.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나 좀 하자고 한다. 의자를 침대 가까이 가져다 놓자 “차도 한 잔 가져오지” 한다. 한참 짬뽕을 먹으러 다닐 때 어느 중국집 茶가 마음에 든다고 해서 향 좋은 걸로 구해다 놓은 재스민차를 우린다. 남편이 오늘따라 유난히 차분해 보이는 게 좀 신경이 쓰인 나는 차를 준비하면서 가슴이 좀 두근거린다. 통증에 시달려도 안타깝고 아무렇지 않아도 가슴이 뛰니 나는 정말 걱정인형을 끌어 안고 사는 팔자인가. 남편이 마실 차는 좀 식혀서 빨대 컵에 담아 온다. 남편은 일어나 앉지 않고 누운 채 재스민차 향을 들이켠다. 모처럼 섬망도 망상도 없는 남편 얼굴이 혈색은 없지만 편해보인다. 그는 두레박을 드리워도 닿지 않을 우물 속처럼 깊은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당신은 내가 어서 좋아져서 함께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자는 말을 자주 하더라. 내가 진짜... 그리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지. 그래야 하고.”

“아이고, 아니야. 이 사람아. 날 보면 모르나. 나는...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해. 그러니 그런 꿈은 꾸지 마. 당신도 너무 애쓰지 말고... 그냥 진통제만 강력한 걸로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호스피스도 알아보고. 자기가 더 잘 알 거 아냐. 내가 한... 한 달쯤 남았다고 하던가? 의사가 말 안 해줬어?”

“아냐, 아냐! 그런 말 안 했어. 정말이야. 자기 왜 그래?”

남편은 정색하는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내 쪽을 향해 손을 뻗는다. 알았으니 그만하라는 듯.


“우리 두려워하지 말자. 렇게 지내다 보니 삶과 죽음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될 것 같애. 지 다리 저편으로 건너간다고 생각해.”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느릿느릿 띄엄띄엄 그러면서도 단어에 힘을 주고 말하는 남편. 저런 말을 하려고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까. 또 얼마나 망설였을까. 정말 다리 저편으로 가볍게 건너갈 사람처럼 의연한 데에 놀라면서도 나는 그의 눈을 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울지 말자고, 울어서는 안 된다고 나를 틀어막는다. 그가 뻗은 손을 마주 잡으며 입술을 감쳐물고 고개만 흔들다 끄덕이다 한다.

새벽이면 통증이 더 심해진다. 약을 찾느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냥 수시로 나를 불러대는 통에 잠을 거의 반납하고 밤을 지새운다. 진통제 용량도 늘리고 횟수도 많아졌다. 진통제를 먹어도 잔통이 남는다고도 하고 자기를 빨리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빨리 데려가라고 기도하라고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의 남편 상태를 인정해야 할 때가 된 것일까.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느냐고, 어떻게든 먹고 어떻게든 걸어야 살 수 있지 않느냐고 혼자 악다구니를 쓰며 속을 끓일 때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라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도 나도 더 힘들고 아플 것이다.


남편이 베개 아래로 고갤 떨구고 있다. 가만히 보니 말똥히 눈을 뜨고 있다. 잠만 자는 것도 걱정이더니 잠을 못 자고 눈 뜬 채 초침을 헤아리는 그가 안쓰럽다. 무슨 생각에 저리 골똘할까. 눈 뜬 고요가 너무도 처연하다. 다리 저편을 들으면서도 울지 않았는데 울컥 치밀어 솟는 눈물을 주체 못 하겠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그의 볼에 내 볼을 갖다 댄다. 내 눈물이 그의 눈물과 엉킨다. 서로 부둥켜안고 엉겨 붙어 울기는 처음이다.




사진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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