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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Mar 19. 2024

가본 적 없는 편의점의 냄새와 온기

김호연 著, <불편한 편의점> [장편소설]


- 제목 : 불편한 편의점

- 저자 : 김호연

- 출판사 : 나무옆의자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구매가 늦어졌던 책이다. 몇 개월 동안 책 읽기를 미루는 동안 이 소설은 무려 100만 부가 훌쩍 넘는 판매 기록을 세웠고, 처음 감상문을 작성했는 2022년 8월 21일 일요일 시점으로는 2권까지 출간되어 이미 구매하고 정독을 완료한 상태였다. 별이 총총 뜬 저녁이 배경이었던 표지는 한정판 벚꽃 에디션으로 재탄생하여 산뜻한 봄날의 나른한 오후가 되었다. 월급 기념으로 오랜만에 구매한 책은 오래간만에 바짝 집중해서 읽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그동안 내가 읽었던 현대 순수문학 소설과는 조금 다른 결이었다. 김호연 작가의 다른 장편소설도 읽어보면 소설보다는 일상 및 힐링 장르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다. 드라마 시청하듯 잘 읽히는 소설이나 사람 사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책이다. 재치 있고 부드러운 문체와 평화로운 일상을 그린 이야기 속에 등장인물 각자의 고단하고 아픈 나날이 녹아 있다는 게, 아마도 이 책이 그토록 많은 독자를 매료시킨 이유가 아닐까 싶다. 등장인물이 나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고, 책 속의 세계가 낯설고 생경한 가상 세계처럼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려보는 편의점은 제목처럼 정말 불편한 모습이다. 나에게 편의점은 그저 간단한 아침식사나 간식거리를 살 때 들어가는 가게일 뿐이라서, 현실이라면 복작복작하고 친근한 분위기가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은 현실처럼 느껴지면서도 현실이 아니고, 그렇기에 떠날 수 없는 편의점이다. 자꾸만 기억이 떠오르는 한밤의 빛이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밝은 조명빛과 생경한 온기 같은 것들이 책을 덮고 나서도 남아 있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이다. 하나의 세계를 거치면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 등장인물과 그들에게 닥친 사건에 이입하고 '나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는 시간,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야기를 쓴 사람과 시공간을 넘어 교감하고 공감하고 고민하는 행위는 분명한 소설의 매력이다. 오직 종이에 새겨진 수많은 활자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감각, 피부에 닿는 공기가 달라지고 공간을 감싸는 냄새가 달라지는 순간은 아는 사람만 아는 짜릿함이다. 특히 사람다운 따뜻한 마음이 물씬 풍기는 후덥지근하고 바삭바삭한 이야기는 마음에 불씨를 하나 남기고 가기에도 충분한 요소다.


이 감상문에는 작품의 전반적인 줄거리, 등장인물, 결말 등 다양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고독한 사람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청파동 골목에 자리한 작은 편의점 'ALWAYS'의 주인 '염영숙' 여사이다. 염 여사가 잃어버린 파우치를 어떤 덩치 큰 노숙자 남성이 찾아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데, 덩치 큰 노숙자 남성이 바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미스터리이자 중심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통칭 '독고'. 독고는 자신의 본명도, 나이도, 과거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분명 세상에 존재하고 멀쩡히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남자. 독고(獨孤)는 이름처럼 고독(孤獨)한 사람인 것이다.


염 여사는 지갑과 신분증 등 중요한 물건이 모두 담긴 파우치를 찾아준 독고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자신의 편의점에 있는 도시락을 공짜로 먹어도 된다고 말한다.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 '시현'은 그저 지저분하고 이상한 노숙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독고를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염 여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그를 수락한다. 그러면서도 매일 도시락 폐기 시간에 찾아오는 독고가 조금 늦게 편의점에 오자 어디가 아픈가 걱정되기도 했다는 시현은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이다.


그저 불청객에 가까웠던 노숙자 독고는 어느 날 편의점 ALWAYS의 식구가 된다. 편의점 야간 시간에 일하던 '성필'이 지인의 중소기업에 운전기사로 취업하면서 갑작스러운 인력 부족이 발생한 탓이었다. 염 여사가 혼자 야간에 편의점에서 일할 때 찾아온 양아치 무리를 독고가 막아서고, 상처 하나 입히지 않은 채 무사히 경찰에 넘긴 공을 세우며 염 여사의 믿음을 얻은 독고는 폐기 도시락을 공짜로 얻어먹던 노숙자에서 편의점의 어엿한 아르바이트생으로 거듭난다. 물론 처음에는 늠름한 아르바이트생 시현도, 함께 편의점에서 일하는 염 여사의 지인 '오선숙' 여사도 말을 심하게 더듬거나 행동이 굼뜬 노숙자 출신 독고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독고를 신뢰하고 호의적으로 대한다. 독고가 편의점에 수시로 찾아오는 진상(JS)을 태연하게 처리하고,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습득력으로 수월하게 업무를 배우고, 오 여사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기나긴 갈등을 해결할 힌트를 제공하는 등 묘한 힘과 능력을 발휘한 덕분이다. 그건 그가 만들어내는 편의점의 이야기 속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변화이기도 했다.


140p - "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


등장인물 중 하나인 '인경'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부분이다. 전체적인 스토리와 큰 관계는 없어 보이지만 이 책은 수상한 아르바이트생 독고를 만나며 변화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만큼, 독고와 주변 사람들이 가지는 미묘하고도 끈끈한 관계성이 흥미롭다. 동시에 책의 등장인물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소중한 가족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의 진정한 삶을 찾기 위해 살아가는 여정을 떠난 이들이므로 이 대사는 단순히 한 에피소드만이 아니라 <불편한 편의점>이라는 작품을 잇는 모든 이야기에 적용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은 1권에 거쳐 2권까지 많은 사람이 나온다. 그만큼 각자의 사연과 에피소드도 가지각색이다. 이 책은 염 여사의 지혜로운 편의점 운영 스토리나 수상한 남자 독고의 기억 찾기 프로젝트가 아니다. 염 여사와 독고, 시현과 오 여사를 비롯하여 편의점을 찾는 손님들, 그들의 가족이나 지인 등 크고 작은 이야기가 나오면서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이 존재하되 에피소드 형식으로 전개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흘러가는 동안 불편한 편의점은 어느덧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일상'처럼 다가온다. 누구나 말하지 못하는 비밀과 무거운 짐을 지니고 살아가듯이, 불편한 편의점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를 모금함에 넣는 동전 하나처럼 두고 갈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불편한 편의점에 등장한 고독한 남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보다도 고독하고 힘겨운 일상을 버티듯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덤덤하게 작은 온기를 나누어 준다.





사람 사는 이야기


나의 어머니께서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가 이 작품이다. 이 외에도 어머니가 재미있게 읽으신 책은 황보름 작가의 장편소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이도우 작가의 장편소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이 작품과 같은 김호연 작가의 장편소설 <망원동 브라더스>가 있다. 사람 사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의 취향은 금세 파악했다. 불편한 편의점은 커다란 사건이나 무서운 악역이 존재하지 않는 대신 각자의 사연을 껴안은 평범한 사람들이 힘겹지만 나름대로 단단하고 평탄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 중 '경만'이라는 사람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내년에 중학교에 입학하는 쌍둥이 딸을 둔 집안의 가장인 그는 집안에서는 은근히, 직장에서는 대놓고 따돌림을 당하지만 마음 기대어 쉴 수 있는 곳이 없어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티는 현대인이다. 위에서 짧게 언급된 등장인물 인경은 전직 배우이자 현직 극작가인데, 처음에는 이래저래 수상쩍은 언행으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독고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연극을 구상하고, 자신이 배우를 은퇴하게 했던 김 대표와 함께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킬 새싹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염 여사의 아들 '민식'은 염 여사의 표현을 빌려 못난이에 준사기꾼인 인물이다. 선후배 집을 전전하며 염 여사에게 장사도 잘 안 되는 편의점을 팔아 자신의 사업에 투자하라는, 설득력 하나 없는 설득을 반복하는 골칫덩어리 같은 아들. 민식이 편의점을 지키는 독고를 해고시킬 작정으로 고용한 전직 형사이자 현직 흥신소 직원인 '곽'도 등장하지만, 이 인물은 책의 결말과 독고의 정체와도 연관이 있어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독고가 지키는 편의점에는 자연스럽게 여러 사람이 방문한다. 일시적으로 왔다가 물건만 사고 떠나는 손님이 대부분이겠지만 어떤 이들은 독고가 얼굴을 익힐 정도로 자주 방문하기도 하고 아예 단골이 되기도 한다. 운이 좋으면 독고와 일 대 일로 조금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손님 대부분은 심상치 않은 말투와 생김새 때문에 정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독고를 경계하거나 미덥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이내 독고의 우직하면서도 순박한 이야기와 목적 없는 호의에 마음을 열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본다.


이 글을 읽는 나에게도 그랬다.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편의점의 내부 인테리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들, 그들이 사가는 갖가지 물건과 음식, 독고의 생김새와 목소리와 말투, 에피소드마다 주가 되는 날씨와 시간대를 상상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나는 불편한 편의점 구석에 앉아 컵라면이나 후루룩 먹고 있는 손님이 되는 것이다. 독고와 이야기하던 손님이 떠나면 그 이야기를 아닌 척 엿듣던 나도 서둘러 쓰레기를 정리하고 짐을 챙겨 나간다. 그러면 뒤에서 독고의 굵고 낮은 인사말이 들리는 것이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좋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인생,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삶, 다른 이의 생각과 감정을 간접적으로 느끼고 감당하고 고민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마음이 심란할 때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다. 현실에서도 갈등과 고난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포기하거나 다른 길을 찾아 떠날 때가 많다. 그것을 극복하거나 잊어버리거나 짐가방에 구겨 넣더라도 '어쨌든 계속 살아가는 이야기'는 좀처럼 인상 깊지 않은 삶을 살아온 나에게 심심한 ― 단조롭다, 깊다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 ― 위로와 재미를 안겨준다.


이 작품이 유독 많은 사랑을 받은 이유도 이렇게 사람 사는 이야기가 좋은 방향으로 작용해서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작품 자체의 안온한 분위기와 평화로운 세계관, 그렇다고 마냥 지루하지 않고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재미,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모습에 나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을 대입하여 상상할 수 있는 다채로운 이야기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어떤 작품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이러쿵저러쿵 단정 지어 설명이 명확한 부분은 아니다. 애초에 나는 그런 요소를 철저히 분석하며 평론할 정도로 문학에 일가견 있는 전문가도 아니다.


불편한 편의점과 비슷하거나 분위기가 전혀 다른 작품이라도,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더 많이 찾아보고 싶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땅속에 숨겨진 원석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유명하지 않은 문학 작품이라도 눈여겨보면 의외로 명작이 많다는 사실. 2권에는 1권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반가운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며 등장하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나타나기도 한다. 2권은 등장하는 인물이 늘어난 만큼 현재 시점과 과거 회상 시점이 오가는 부분이 있다. 집중하지 않으면 시점을 놓칠 위험이 있으니 주의하시길.


2권에는 편의점 ALWAYS의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이 된 상큼 발랄한 '황근배'를 비롯해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새로운 회사로 취업한 前 자갈치 現 가물치 '소진', 황근배가 인정한 상꼰대 겸 코로나 시대의 힘겨운 자영업자 '최 사장', 외롭고 고단한 일상 속에서 책과 이야기로 삶을 찾는 중학생 밍기뉴 '민규' 등이 새로운 얼굴이 등장한다. 여전히 올바른 사람 구실을 못하는 염 여사의 아들 민식에 관한 이야기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물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지만 사실 등장인물 중에서는 민식을 가장 불호한다. 여러모로 비열하고 지질한 모습을 보여준 캐릭터라서 개과천선한다고 해도 좀처럼 정은 가지 않을 듯하다. 반대로 누군가는 염 여사와 아들 민식의 이야기를 가장 감명 깊게 읽었겠지. 그분께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어쨌든 모든 이야기는 무언가의 삶에 관한 것들이다. 산 존재는 살아있거나 살아가거나 죽어가고, 죽은 존재는 죽어있거나 죽어가거나 살아간다. 이 작품은 분명히 '살아있고, 살아가는 이야기'이기에 삶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에 다른 이야기보다 진한 흔적을 남기고 가는 게 아닐까 싶다. 살아있거나 살아간다는 사실을 잊었던 사람은, 이 책을 통해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읽어가면서 잠시 잃어버렸던 과거나 일상이나 마음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죽어가는 이야기였다면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연을 받고 마음을 주는 인물들


등장인물을 다 세려면 열 손가락을 훌쩍 넘어가지만 에피소드마다 확실한 주인공이 존재하기에 그만큼 특정 인물의 이야기에 집중하기는 쉽다. 나는 2권에 등장하는 중학생 밍기뉴 민규와 근배의 과거 이야기에 유독 깊이 집중했다.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을 읽는다는 감상을 넘어서, 마음에 깊이 스며드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규에게는 편의점이 도피처다. 친한 친구 하나 없이 빵셔틀이나 해야 하는 학교도, 방학으로 인해 오래 머무르는 집도 민규에게는 따뜻하거나 안전한 세상이 아니다. 성적 좋고 잘생긴 형과 성적이 좋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민규는 매번 비교 대상이 된다. 게다가 부모님은 매번 크고 작은 일로 다툼이 잦아들지 않으니, 한창 예민하고 외로운 시절을 홀로 견디는 민규는 비단 편의점이 아니더라도 어디로든 간절히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저 돈 없고 어린 학생이라는 현실에 부딪혀 실현하지 못했을 뿐.


답답한 마음과 시간이 흐르기 전까지 벗어날 수 없는 지겨운 현실을 향한 울적한 감정을 책으로, 유튜브 영상으로, 편의점에서 먹는 우유로 조금씩 억누르고 풀어내던 민규는 어느 순간 근배와 가까워진다. 근배는 민규가 읽는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에 나오는 오렌지 나무의 이름을 따 민규를 '밍기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편의점 손님이 없을 때마다 옆에서 독서 토론 ― 물론 근배의 일방적인 이야기 ― 를 하고 수다를 들으며 민규는 조금씩 마음을 열고, 마음에 묵혀두기만 했던 이야기를 근배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책 속의 민규는 아직 어린 나이지만 의젓한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른스럽다고 해도 아이에게는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 어른들의 애정과 응원이 필요하다.


145p - "그래도 내 안에 뭐가 있는지 찾으려고 애써야 한다니까. 내가 잘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걸 알아내기만 하면, 조금은 나답게 살 수 있다고."


근배는 자신은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없다며 풀이 죽은 민규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뻔한 조언이긴 하지만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근배가 민규에게 건넨 이 말은 자신과 비슷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민규에게 보여주는 근배의 회상이자 어느 순간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온 깨달음이며, 또한 근배는 민규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것을.


근배를 통해 알게 된 동네 도서관으로 향한 민규의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인다.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고, 배가 고프면 매점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청소년 문학교실과 독서 아카데미와 작가 특강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도서관은 외로웠던 민규에게 새로운 세상이 된다. 민규는 키가 자라고 덩치가 커지면서 마음도 한 뼘 단단하게 자라고, 부모님을 위한 옥수수수염차를 냉장고에 넣고, 소설책을 읽으며 재미있는 이야기에 불편했던 속과 아픈 마음을 달랜다. 민규라는 어떤 아이가 무사히, 천천히, 잘 성장하는 대목이 유난히 돋보이는 에피소드였다.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가장 가까운 시절에 존재하는 인물이었기에 더 애정이 갔던 걸지도 모른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새롭게 나타난 청파동의 홍금보 ― 홍콩의 전설적인 액션 배우이자 영화감독 ― , 황근배의 과거에도 눈길이 갔다. 근배는 대학생 시절 우연히 들어간 연극 동아리에서 그대로 배우가 되었다. 주연이나 조연으로 등장하는 배우가 아닌 보조출연 엑스트라였지만 성실하게 배우의 꿈을 키우며 연기했고, 그렇게 아동극단 대표 배우가 된 근배는 수많은 인형탈을 쓰며 아이들 앞에서 연기를 한다.


근배의 배우 시절이 인상 깊었던 부분은 1권에도 등장했던 극작가 정인경이 집필한 연극 대본 내용이 일부 바뀌면서 생긴 갈등이다. 말다툼 중 인경은 "아동극만 해서 따뜻한 것만 좋아하는 거냐"며 근배의 전 커리어를 모욕하는 말을 한다. 물론 근배를 의도적으로 비난하거나 모욕감을 안겨주기 위해 한 말은 아니고 인경 또한 근배와 싸우면서 쌓인 분노와 울분을 이기지 못해 반쯤 충동적으로 내뱉은 발언이지만, 그때 근배는 진심으로 분노하여 오히려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하고 화를 억누른다.


205p - 근배는 아동극을 폄하하고 낮춰 보는 사람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자신들 역시 아이들이었으면서, 아이들만큼 연극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줄도 모르면서, 그러니까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여겨왔다.


근배는 사랑하는 연극을, 자신이 마음을 다해 몸담았던 순간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순수하게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꿈을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거나 별것도 아니라며 치부한 적이 있을 것이다. 부끄럽게도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분명 그런 순간은 존재한다. 근배의 과거를 보고 있으니 내가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의 과거와 꿈을 폄하하는 주제에, 어떻게 자신의 꿈을 찾아갈 수 있을까. 지금 와서야 반성하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여겨야 할 일이다.


근배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저 책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인물이 아니다.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이 작가의 상상과 창작으로 생명과 인격을 부여받았지만, 그들의 인생은 작품 속에서는 분명한 진실이다. 나는 그들에게 사연을 받고 마음을 준다. 책을 쓴 작가와 이야기하고 책 속 인물에게 공감하며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이야기를 알아가는 것이다.





지나치게 온화한 세상이더라도


요즘 틈틈이 읽는 <자음과모음 계간지 2023 겨울 59호>에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강상준이 쓴 '위로하는 소설의 함정'이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의 한 부분을 차지한 작품이 이 <불편한 편의점>이다. 강상준 칼럼니스트는 불편한 편의점을 '착한 세계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 소설'이라고 말하며 전반적인 아쉬움을 드러냈다. 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안다. 불편한 편의점은 절대 배드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강상준 칼럼니스트 또한 이 사실을 유심히 들여다본 모양이었다. 그는 "아무런 긴장감도 동요도 없이 그저 적당히 아는 길을 따라가다가 접하는 결말은 심히 공허했고, 독자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는 안전한 소설이 조금은 당혹스러웠다"라고 말하며 "위로만 받기엔 소설의 세계가 너무나도 넓다"는 평을 남겼다.


그러니까 이 책은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각자의 상처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독자에게까지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소설이고, 그게 바로 소설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말하거나 전개와 결말이 너무 뻔하다고 느낄 가능성도 다분하다. 요즘에는 역사적 사건이나 사회적 문제를 중심으로 쓰인 한국 소설이 외국에서 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고, 슬픔이나 외로움 등 우리가 '부정적이다'라고 말하는 감정을 풀어내며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보다 인간 내면의 성찰, 성장에 초점을 맞춘 순수 문학 소설이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시로 통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온화하고 부드러운 '위로하는 소설'은 다소 평면적인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워낙 깊이 있고 웅장한 문학 작품이 많이 존재하는지라 대체로 명랑하고 밝은 분위기로 전개되는 소설은 가벼운 로맨스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다만 강상준 칼럼니스트는 "그렇다고 '위로 소설'의 효용을 무시하거나 완전히 등한시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며, 단지 소설을 읽으면서 수반되는 다양한 감정 변화와 사고의 확장, 무수한 상상과 경험에 등을 돌린 채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 자족하도록 독려만 하는 건 굉장히 아쉽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소설이라는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이 어디까지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본 사람, 혹은 그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라면 비단 안전하고 바르고 맑은 세계에서 머무르기보다는 더 크고 넓고 새로운 세상에서 인간과 문학의 다양한 가능성을 발견하기를 고대한다. 또한 그런 마음으로 책을 읽고, 또 글을 쓰며 사니까.


불편한 편의점은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세상에 속하는 작품이다. 안전하고 따뜻하지만 슬픔과 아픔이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도 아니다. 어쨌든 모두가 그 슬픔을 이겨내고, 아픔을 극복하고 사랑을 되찾거나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아가는 해피엔딩으로 귀결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런 부분이 소설의 가치를 깎아내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강상준 칼럼니스트의 평론처럼 '사람의 삶을 위로하는 마음'을 담아 쓰인 소설이니까. 코미디 영화가 난데없이 새드엔딩으로 끝나면 관객의 비난과 뭇매를 맞듯이, 불편한 편의점도 해피엔딩을 위해 만들어진 세상이므로 모든 인물이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해피엔딩이 되지 않았을까. 소재의 아쉬움과 이야기의 부족함은 별개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크나큰 시련도 갈등도 없이 유유자적 흘러가는 소설에는 지루함과 아쉬움이 남더라도, 시트콤은 모든 등장인물이 조금씩 부족하거나 얼빠진 개성을 갖추었기에 보는 것처럼 이런 소설도 지루함과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유려하게 흘러가기에 그만큼 환기된 마음으로 읽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강상준 칼럼니스트의 평론은 이 책을 비롯한 '위로하는 소설'을 다른 관점으로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되었다. 은유적인 표현이나 주제 자체의 메타포, 인간의 비관과 절망을 극대화하면서 오히려 인간 세상의 희망을 드러내는 작품이 존재하듯이 이렇게 따뜻한 직관으로 독자를 위로하는 소설도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작품이든 저마다 장단점은 존재한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역시 전문가의 글은 구성부터 문장까지 남다르다. 그는 "착하고 바르고 맑은 세계는 안전하다. 그건 바로 내 방 같은 곳이다. 방 안에 틀어박혀 아무와도 접하지 않으면서 모니터 너머로 모든 걸 발산할 수 있다 착각하면 곤란하다. 소설은 본래 불안정하고, 우리 삶 역시 그렇다. 은둔하는 외톨이가 되기보다는 방 밖으로 나가 풍파와 맞서는 게 당연하다. 그러라고 등 떠미는 것 역시 본디 소설의 몫이기도 하고.(45p)"라는 글로 평론을 마무리했다.


이 작품의 평론과 직접 연관된 글은 아니지만, 인상 깊게 읽은 평론이기에 내용을 추가했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과거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작품과 등장인물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는 폭이 아주 조금은 더 넓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직장인이 된 나는 여전히 비슷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생각하는 방식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좋은 쪽으로 달라졌는지 제대로 성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더 후퇴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산다. 어쨌든 살아지긴 한다.


글이 더 장황해지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큰 굴곡 없이 살아왔으면서 지나치게 '인간의 삶과 관계'라는 거창한 주제에 집중한 것 같아 머쓱하다. 사실 사는 일은 즐거운 날보다 지루한 날, 무료한 날, 걱정스러운 날, 슬픈 날, 괴로운 날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즐겁게 살아가지만 다른 누군가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고 외로워서 내일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 또한 하루를 버티듯 살아가는 편이다. 소중하지 않은 날도 없고 피곤하지 않은 날도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한다. 읽지 않고 책장에 꽂아만 둔 책이 많고,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은 그보다 몇 배는 더 많고, 아직 무수한 별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은하수를 목도하지 못했고, 보송보송한 아기 고양이를 쓰다듬지도 못했고, 내가 열심히 쓴 글로 책을 출간하지 못했고, 히사이시 조의 <summer>를 다 연주하지도 못하고, 그림도 그리지 못했고 쓰고 싶은 글을 다 쓰지도 못했으므로 계속 살아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했다.


186p - 살았다. 살아지더라. 걱정 따위 지우고 비교 따위 버러니, 암 걸릴 일도 독 퍼질 일도 없더라. 물론 근배에게 산다는 건 걱정거리로 가득했고 사람들의 하대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엄마가 남겨준 말을 꼭꼭 씹었다. 하대는 상대방의 시선에서 나온 비교였고, 비교를 거부하자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조금은 생각 없이 살고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생각 없는 사람은 되기 싫다. 대책 없이 살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기 어렵다는 사실은 잘 안다. 어쩌면 지금도 나는 충분히 생각 없고 대책 없이 살아가고 있다. 생각이 없는 대신 걱정이 많고, 대책이 없는 대신 상상이 많아서 삶이 버겁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라고. 어떻게 생각하든 살기 피곤한 성정이라는 건 확실하다. 그조차 '나'라는데 내가 어쩔 도리가 있나.


어쨌든 계속 살아가야겠다. 이 작품은 좋은 소설이고, 좋은 이야기가 되었고,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나의 방문을 잠시나마 흔쾌히 허락해 준 편의점이니 계속 그 자리에 존재했으면 좋겠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쌓았던 감정을 조금씩 털어낼 수 있었다. 역시 소설의 힘은 대단하다. 문학은 평생 인류의 역사에서 떠날 수 없는 존재다. 불편한 편의점은 앞으로도 불편하고 따뜻하고 시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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