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야사 Apr 02. 2024

살아가는 것은 왜 이렇게도 힘든 여정일까

조수경 著,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 [장편소설]


- 제목 : 아침을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 거야

- 저자 : 조수경

- 출판사 : 한겨레출판




내가 '좋아한다'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책이다. 처음 책을 펼친 건 고등학생 시절 교실이었는데,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 이 책에 빠져들었다. 기승전결 하나하나가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달까. 머릿속에서 책 속 인물들이 둥글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떠올랐고,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의 얼굴과 표정과 눈빛과 자세와 걸음걸이를 상상하다 보면 마치 책에서만 존재하는 이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 감각이 소설이라는 작품의 매력이라고 여긴다. 가상과 현실 사이 경계선을 오가는 이야기와 그들만의 세상 속에 나 또한 관찰자 혹은 손님 중 하나로 함께 머무르는 것. 누군가가 창작의 고통에 끙끙 앓으며 간신히 펼쳐낸 상상과 공상과 수만 개의 활자는 나에게 현실처럼 생생하게 존재하게 되고, 이내 마음속 하나의 장면에 남아버리는 것 말이다.


삶과 죽음. 내가 인간으로서 사람으로서 생명체로써 태어나 평생을 살다 죽는 모든 순간에 맞닥뜨리는 존재들. 아주 간단하고 명백하면서도 수십 년을 생각해도 알지 못할 것들. 이 책에는 그토록 복잡하고 단순한 단어가 붙어 있다. 사는 건 무엇이고 죽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문제는 많은데 답은 더 많아서 죽어서도 알지 못할 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읽는다는 게 좋았다.


이 책은 나에게는 그런 작품이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준 책. 무엇보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주제와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종종 '만약'이라는 부사를 붙이고 혼자 떠올리곤 했던 생각이 소설이 되어 실제로 나타났기에 미리 보기로 책 초반부 내용을 보면서 조금 놀라기도 했고, 그래서 반가운 마음이 컸고, 그렇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책을 구매했을 것이다. 적은 분량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깊고 풍성해지는 이야기다.


핵심만 뽑아내면서 은근히 호기심을 갈구하게 만드는 능력 따위 없다. 책 내용을 아는 대로 술술 말하고,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은 감상과 주관적인 이야기를 아낌없이 덕지덕지 붙일 뿐이다. 때문에 이 글에는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결말은 물론 나의 개인적인 생각 또한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스포일러를 싫어하신다면 책을 직접 사서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죽고 싶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책의 주요 배경은 '센터'이다. 완곡하지 않게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자살 센터. 센터는 죽고 싶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생을 편히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편의시설과 숙식을 제공하고, 최후에는 고통 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약을 주어 마지막 서비스를 완료한다. 느껴지는 분위기는 호스피스와 비슷하지만, 센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상당수가 육체적으로 큰 병이나 문제없이 비교적 건강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작품의 화자인 주인공 '나' ― 이름은 '이서우' ― 는 모종의 이유로 죽음을 원한다. 외출이나 외부와의 교류는 물론 가족들과도 전혀 독대하지 않는다. 너무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서 목소리조차 메마른 서우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힌 채 고독하고 어두운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산다. 집에 있는 어머니와도 문자 메시지로만 소통한다. 죽음 희망자를 위한 센터가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센터에 입소하기 시작하자 서우는 초조함을 느낀다. 센터가 없을 때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했지만 ― 서우는 몇 번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 이제는 스스로 죽을 권리가 인정된 세상이 되었고, 죽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안락한 시설과 죽음을 제공하는 센터가 있었으니. 서우는 살아 있지만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을 감당하는 어머니와 남동생 '서진'을 떠올리며 결심한다. 센터에 들어가야겠다. 이제 나는 좀 죽어야겠다.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한다.


서우가 센터에 들어가고 싶으니 돈을 조금 보태달라는 의사를 밝히자 어머니는 화를 낸다. 당연한 반응이다. 자식이 "죽으러 갈 테니 돈 좀 보태 주세요."라고 말했을 때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부모가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서우의 어머니는 여느 부모처럼 자식의 죽음을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서우는 죽고 싶었고, 무엇보다 삶이 두려웠고, 어떻게든 어머니를 설득할 방법을 찾던 중 기사를 하나 발견한다. 서우와 같은 아파트에 살던 대학생이 가족을 설득하지 못해 센터 입소에 실패하고 결국 아파트에서 투신하여 죽었다는 기사. 그 대학생은 서우의 어머니가 몇 년 전 방문했던 집의 딸이었고, 과일을 예쁘게 잘 깎고 반달 모양이 된 눈으로 생그르르 잘도 웃던 사람이었다.


서우의 어머니는 그 소식을 접한 후에야 서우에게 말한다. "너도, 내가 막으면, 결국 그렇게 하겠지?" 간절하게 죽음을 원하는 자식을 앞에 둔 어머니가, 벅차오르는 울음과 서럽고 괴로운 마음을 억누른 채 간신히 가다듬은 호흡으로 내뱉는 말. 사는 일이 괴로움 그 자체가 되어버린 자식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부모의 무력함. 서우의 어머니는 1년만 센터에서 살아보자는 조건을 내건다. 그리고 1년이 지나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보내주겠노라고.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죽음'을 종종 생각했었다. 안락사를 허용하는 스위스에서 편안하게 죽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스위스로 향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된 후에는 그 빈도가 늘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나의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진 세계가 배경이다. 흥미가 돋았다.


죽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생과 사가 동시에 머무르는 센터에는 특이한 모순이 존재한다. 자율적인 안락사와 존엄사가 합법이 된 한국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센터는 매끼마다 모든 방에 직접 식사를 넣어주는데, 서우가 센터에서 처음으로 만난 남자이자 룸메이트인 '김태한'은 그 이유를 "밥 냄새를 맡으면 살고 싶어지니까."라고 말한다.


센터는 금액을 지불하면 죽지 않고도 계속 센터 내에서 생활할 수 있다. 따뜻하고 뭉근한 밥 냄새를 퍼트려 살아가고픈 마음을 만들어내야 센터도 지속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어른들의 사정이 관여했다.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막중한 일을 하면서도, 그저 평범한 영리 단체에 불과한 센터. 이중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센터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돈을 벌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죽음을 택한 사람들과 삶을 택한 사람들이 지불하는 돈이 있어야 시설을 관리하고, 임금을 지급하고, 계속해서 센터 사업을 운영할 수 있을 테니.


각자 다른 이유로 삶을 등지고 죽음을 선택하거나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 막연히 떠올리면 그들은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도 없을 만큼 불행하고 우울한 사람들일 것 같지만,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지극히 평범하고 적당히 활기차다. 그저 그 사이에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이 머무르고 있을 뿐. 생명은 모두 소중하다. 타의와 악의에 의한 죽음은 이 세상에 결코 존재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죽음을 무가치하고 두려운 존재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편협한 사고일지도 모른다. 어떤 이에게는 삶이 죽음보다도 괴롭다. 사는 게 버겁고 아픈 사람에게 생명의 소중함, 목숨의 귀중함, 삶의 감사함 따위는 눈에도 귀에도 마음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건 호의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무지한 고문과 같다.


죽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그들도 죽기 직전까지는 모두 살아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죽으려는 사람들이 각자 남은 시간을 느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있기에 생을 다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서우는 센터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가장 많이 마주치는 사람은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남자 김태한. 특유의 넉살과 친화력으로 많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태한을 통해 서우 또한 의도치 않은 만남을 수시로 가진다. 그중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언제나 우아하고 점잖았던 '한예경' 여사인데, 한 여사가 자신이 죽기 전 마지막 날에 연 장례 파티는 떠들썩하다. 디제이가 빠른 템포의 음악을 틀고 그 앞에서 사람들이 춤을 출 정도로. 가나에서 댄서들이 관을 어깨에 짊어지고 흥겹게 춤을 추는 영상 ― 단, 가나의 모든 장례 문화가 즐거운 분위기는 아니고 호상으로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장례식이라고 한다. ― 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하다. 한 여사의 장례 파티 또한 그런 분위기였다.


내일이면 이 세상에 없을 사람을 가장 즐겁게 배웅하는 이별 파티.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하며 그런 느낌을 받았다. 센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병이나 사고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살해당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 자의로 죽음을 선택하여 타계하는 것이니,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이고 행복한 형태의 죽음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날에 주변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고통 없이 삶을 끝마치는 것. 얼마나 평화로운 결말인가? 문장으로 쓰니 나도 이렇게 죽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146p - 내 방에 처박혀 있던 하루하루는 죽은 시간이었는데, 죽음과 가장 가까운 이곳에서는 1분 1초가 전부 살아 있었다.


살아있던 시간은 죽어가는 것이었고, 죽어가기 위해 온 곳에서는 살아 있는 감각을 느끼는 아이러니함. 이것을 과연 좋은 감정이라 해야 할지 무의미한 착각이라 해야 할지, 그건 내가 감히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다만 서우는 삶을 끝내기 위해 온 곳에서 살아 있음의 감각을 느꼈다. 죽음을 앞두고 삶을 체감했다. 갑자기 열심히 살고 싶다는 의욕이 치솟은 건 아니다. 그런 갑작스러운 감정의 전개였다면 되레 어색하고 억지스러웠겠지. 서우는 그저 자신과 전혀 다른 타인들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다른 모습으로, 다른 일상을 보내며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한가로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목격했을 뿐이다.


한 여사는 가족들에게 정말 행복하게 잘 떠났다고 전해 달라는 인사를 남긴다. 이 외에도 서우 주변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살거나 죽는다. 다시 한번 살아보고 싶다며 센터를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살아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죽는 사람도 있다. 찬찬히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했다. 이 속에서는 무엇이 옳고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겠다고. 사는 것과 죽는 것. 그건 모든 인간을 넘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게 적용되는 말이니까. 적어도 이 글 안에서는 사는 게 좋다거나 죽는 게 좋다거나, 그런 조건은 애초에 정해진 공식처럼 풀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수많은 고통과 외로움에 내몰린 끝에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서우를 응원하고 싶었는데, 그게 서우가 죽기를 바라는 건지 살기를 바라는 건지 나 스스로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과연 서우가 죽는다고 행복할까. 하지만 이대로 살아야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괴로울 텐데. 그래도 점점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은데 희망적인 전개가 아닐까? 아니지, 그렇다면 죽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 자체로 절망이라는 뜻인가…. 홀로 마음속으로 온갖 토론을 벌였다.


어쨌든 서우의 시선에서 변하지 않는 사실은 있었다. 자신이 머무르는 이곳에 존재하는 모두가 죽음을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모였다고. 그리고 그들은 죽음을 기약하고 있기에, 자신의 목숨줄을 스스로 쥐고 있기에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몸을 움직인다는 것. 힘겨운 삶 속에서도 아득히 숨을 쉬고 있다는 것.


179p - 하지만 이곳은. 두 시간 뒤에 죽음을 예약해둔 사람이 춤을 추고 있었다. 죽음을 앞두고 있기에 생을 다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살아간다. 동시에 죽어간다.


결말은 구태여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저 개인적인 독서 감상문일 뿐이지만, 이 책은 결말 부분을 모르고 읽어야 좋을 것 같다.


나는 평소에 '나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라는 엉뚱한 말을 자주 떠올린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나는 어제보다 하루를 더 산 사람이 되고, 동시에 죽음까지 하루 더 가까워진 사람이 된다. 오늘의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젊은 동시에 가장 늙은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 그런 이상한 모순을 떠올릴 때마다 어쩐지 참 재미가 있다. 스물두 살의 내가 인생에서 가장 젊으면서도 가장 오래 산 어른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비슷한 뉘앙스로 '젊다'라는 말은 형용사이지만 '늙다'라는 말이 동사라는 사실도 재미있다고 여긴다. 나이를 먹고 몸과 마음이 쇠퇴를 향해 전진할수록 나는 늙어가는구나, 시간을 따라 불가항력으로 흘러가는구나, 멈춰 있는 젊음과 달리 하루가 지날수록 움직이면서 늙어가는 상태구나 싶어서.


그래서 이 넓은 세상에는 살아가는 사람도, 죽어가는 사람도 아주 많다. 비단 육체가 건강하고 나이가 젊다고 해서 모두 살아가는 건 아니다. 반대로 몸이 쇠약하고 병을 앓고 있다고 해서 모두 죽어가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답은 무수히 많아져서 삶과 죽음의 정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멀쩡한 몸으로 거리를 달리는 사람 속에 살아가는 시간이 있는지, 기침마다 힘없이 객혈하는 사람 속에 죽어가는 시간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삶을 택한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고, 죽음은 아무리 피하려고 발버둥 쳐도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찾아온다. 어찌 보면 죽음은 삶을 위해 존재하는 축복이다. 죽지 않는 존재는 살아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329p -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죽음은 꽤 소중하지. 필요한 거고. 그렇다고 해서 삶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잖아.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삶이 더 간절한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래서 더 아픈 건지도 몰라. 삶이, 진짜 살아 있는 삶이 너무나 간절해서.


나는 '살아 있는 삶'이 살고 싶다. 아직 어린 나이에 많은 가능성과 시간을 지닌 채 심하게 아픈 곳 없이 그럭저럭 멀쩡한 몸으로, 화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불우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나름대로 괜찮은 ― 적어도 악덕 기업으로 분류되지는 않는 ― 직장에 다니는 사람.


이런 주제에 살고 싶다느니 삶이 간절하다느니 그런 말을 하기엔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삶은 평범한 삶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특별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무난하고 무던한 사람으로 살아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럭저럭 지금과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을까. 원래 적당히,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요즘 세상은 위로 조금 더 올라가려다가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는 무서운 세상이라 데굴데굴 떨어지지 않으려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그렇지만 죽어 가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살아가는 삶. 살아 있는 삶. 다가올 앞날을 향한 기대와 호기심을 품은 채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이 조금 더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 좀처럼 평화롭고 따뜻한 품을 내어줄 생각이 없는 과격하고 냉랭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주 짧은 생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진짜 살아 있는 삶이었다면 나름대로 괜찮을 것 같다. 그런 이상적인 꿈을 꾼다.


지금까지는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 잘 살아 있는지, 내가 나를 시름시름 앓아 죽게 만드는 게 아닌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허황된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었다. 당장 내일 학교 가기 싫고, 공부하기 싫고, 숙제하기 싫고, 발표하기 싫고, 집에서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기 싫은 게 문제였지. 이제는 출근하기 싫고 일하기 귀찮고 암울한 미래를 걱정하는 게 가장 커다란 문제라고 농담처럼 말할 뿐.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도 있다. 어차피 실컷 고민해 봤자 달라지는 현실은 없지만 적어도 내 마음은 조금 달라질 수 있을 테니까.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잘 살아 있었으니 대견하다.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날들은 불안하고 두렵지만 막상 맞닥뜨리면 시시할 정도로 별거 없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번 겪어보았다. 의외로 좀 커다랗고 험난해서 무섭다고 해도…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힘든 날은 힘들어하다 보면 지나가고, 나는 또 살아 있고, 내일을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고. 휘황찬란하게 변하는 건 없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나는 여전히 나인 채로 살아갈 테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다.


해마다 유서를 업데이트한다는 작가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묘비 명이랄지 유언 같은 문장만 어설프게 생각했을 뿐 ― 무려 2년도 더 전에 썼던 글이다. (https://brunch.co.kr/@simyasa/22) ― 본격적으로 유서를 써두지는 않았다. 다만 유서를 미리 차곡차곡 써두는 건 살아가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된다. 내가 죽고 나서 남은 사람들이 읽게 될 글이라니. 설령 내 주변에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죽음을 생각하며 쓰는 글은 무엇보다 삶을 가장 깊고 길게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살아가는 동시에 죽어간다. 지금도 멀쩡하게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다. 이 책은 나의 삶과 죽음, 나의 시작과 과정과 결말, 나의 세상과 끝, 나를 구성하는 아주 작고 세밀한 요소들,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아주 가까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어쩌면 나의 삶은 그다지 소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의 초라하게 마모된 생명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테지만, 죽기 전까지 나는 살아 있으니 그 볼품없는 존재를 소중하게 품에 안아버리고 싶다.


이전 04화 부모와 자식, 가족과 나, 모두의 성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