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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Mar 12. 2024

어쩌면, 내가 바라는 사랑의 형태와 색깔을 그려낸 모습

박선우 著, <우리는 같은 곳에서> (소제:빛과 물방울의 색) [소설]


- 제목 : 우리는 같은 곳에서 (소제 : 빛과 물방울의 색)

- 저자 : 박선우

- 출판사 : 자음과모음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문득, 퀴어 소설에 관심이 생겼다. 그동안 읽었던 책은 장르소설보다는 순수문학이나 에세이로 분류되는 것들이어서 내가 읽은 로맨스 소설은 많지 않았다. 당시 내 책장에서 '로맨스'로 분류할 수 있는 도서는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지구에서 한아뿐>, 이도우 작가의 장편소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와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 전부였다.


어린 시절부터 로맨스나 연애라고 한다면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정의가 보통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만 해도 드라마에 동성 커플이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궁금해졌다. 이성 사이 사랑을 토대로 한 소설이야 찾아보지 않아도 많겠지만, 동성 사이 사랑을 토대로 한 소설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중학생 때부터 이성애만이 '정상적인 사랑'으로 통용되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기 시작했기에 ― 지금의 나는 사랑에 나이는 상관있어도 성별은 상관없다는 가치관을 가졌다. ― 동성애를 비롯한 퀴어 문학에 호기심이 생겼다.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키워드를 검색했다. 퀴어. 그렇게 알게 된 책이 바로 이 소설집이다. 서정적인 제목과 부드러운 표지만으로도 신기하게 나의 눈길을 끌었던 책.


책은 여덟 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어떻게 감상문을 써야 좋을지 고민했다. 모든 이야기를 하나씩 짧게 소개하듯이 써야 할까 싶었지만, 사실 이 책에서 나의 마음을 너무 강하게 사로잡은 단편이 하나 있다. 그래서 고심 끝에 그 단편 하나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로 결정했다. 나는 인간관계처럼 다양하고 넓게 무언가를 포용하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다. 인간관계든 취미든 좁고 깊게 동굴 파기를 좋아한다. 이것저것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아한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밤새도록 토크를 하고 싶다. 그저 말을 잘하지 못해서 쓸데없는 문장을 아낄 뿐.


어쩌면 이 책은 '내가 바라는 사랑의 색'을 그려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빼곡한 활자로 이루어진 글의 세계에서 다채로운 풍경을 보고, 온도가 다른 색깔을 느끼고, 코끝을 스치고 사라지는 향을 맡고, 바람과 햇빛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어난 이유는, 책을 매개체로써 내가 바라는 사랑의 색을 상상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누구에게나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모든 문장은 100%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과 의견이다. 전문성이라곤 조금도 없다. 또한 세밀하지는 않아도 글의 전반적인 스토리가 쓰여 있다. 혹시나 이런 스포일러를 싫어하는 분들께서는 그냥 '이 글을 쓴 사람이 이 소설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만 알고 나가주셔도 괜찮다.





빛과 물방울의 색


이 글의 주인공이 된 세 번째 단편소설의 제목이다. 나 역시 아주 단순하고 아주 어렵게 이런저런 글을 쓰는 사람인만큼, 제목을 짓는 순간은 수많은 고민에 휩싸인다. 글의 전체적인 내용을 담으면서도 내가 전하고 싶은 의미를 떨어뜨리는 것. 수많은 문장을 고작 몇 단어로 함축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고뇌이다. 그래서 많은 작품의 제목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왜 이 작품은 이런 이름을 달고 세상에 태어났을까.


제목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줄거리가 필요하다. 소설 자체는 물 흐르듯 읽을 수 있다. 그다지 난해하지도 장황하지도 않고, 내가 느끼기엔 지나치게 은유적인 표현이나 생소한 메타포가 많지도 않았다.


어느 날 주인공 '나'의 앞에, 5년 전 연락이 끊기면서 연애도 끝을 맺었던 전 애인인 '너'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는 생(生)과 사(死)의 경계선 어딘가에 머무르는 위태로운 존재가 된 채였다. 처음에는 '너'를 못마땅하게만 여기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너'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끝내 '너'는 사라진다. 장마는 이걸로 끝이라는 말을 남기고서. 그리고 '나'는 다시 살아간다. 우산 끝에 맺힌 빗방울은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자신이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난다.


약 25페이지가량의 소설을 간추리고 간추리면 대충 저런 형태의 줄거리가 나온다. 사실 제목의 의미를 고민하기 시작한 때는 책을 전부 다 읽고도 많은 시간이 지난 후다. 빛과 물방울의 색. 저기에서 빛은 무엇이고 물방울은 무엇일까. 그리고 빛과 물방울의 색은, 왜 하필 이 글의 제목이 되었을까?


그 설명은 조금 더 자세한 줄거리와 감상을 이야기하며 가미해야 할 듯하다.





나와 너의 사랑은 끝내 물방울이 되고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첫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 이유는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나의 어머니가 "애초에 퍼레이드 같은 데는 뭐 하러 나가"라고 말하며 핀잔하는 것이나, 전 직장 선배가 새 직장을 소개해주며 "이번에는 들키지 말라"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나는 동성애자이거나 동성연애를 한다는 사실을 직장에 들켜 해고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 글은 첫 문장이 유독 인상 깊었다.


73p - 우거진 이파리들 사이로 잘게 부서져 내리는 빛. 그 아래에서 두 눈을 감고 있으면 네가 떠오르곤 했다. 아마도 살갗에 내려앉은 온기가 내 안의 물기를 뭉근히 데워 증발시키는 감각 탓이었겠지.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바삭해지며 너를 잃었다. 잊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소설의 시작점이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순식간에 소설 속 '나'가 되어 무성한 나뭇잎 아래 바삭하고 맑은 햇빛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너'를 떠올렸다. 이 글이 기억에 남는 이유 중 하나다. 분명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흘러가는 글이지만 소설은 '너'로 시작한다. 마치 글이 시작하자마자 이미 무의식에 너를 향한 그리움을 심어진 것처럼. 실제로 나는 소설이 끝난 이후에도 잠깐 계속 존재하지 않는 너를 그리워하는 듯한 착각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너를 향한 나의 그리움에서 시작한다. '일반적인 상식' 안에서 통용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성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나와야 했던 나의 억울함이나 복수심 같은 감정은 애초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마치 쓸데없는 일이란 것처럼. 나는 당장 너와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듯이.


'너'는 '나'의 애인이다. 정확하게는 애인이었다. 이름은 이유영. 성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이름은 아니다. 비가 내리던 날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나는 무려 5년 전 갑작스러운 연락 두절로 쓰라린 연애의 끝을 맺었던 전 애인 유영을 만난다. 그것도 몸은 혼수상태에 곧 있으면 죽기 직전이지만 영혼은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나이프로 가슴팍을 찔러도 쓰러지기는커녕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유령 같은 몸이 된 유영을. 나는 유영의 이름이 죽은 사람의 혼령을 뜻하는 '유령(幽靈)'이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는 뜻의 '유영(泳)'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갑자기 이상한 존재가 되어 불쑥 나타난 유영을 반기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나와 유영이 헤어진 이유는 유영이 소위 말하는 잠수를 탔기 때문이다. 나에게 유영은 가장 배려심 없고 허무한 마지막을 선물해 준 전 애인이므로 날을 세우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은 반응이다. 다만 나는 유영을 격하게 밀어내거나 대놓고 비난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앞자리에 앉은 유영과 전 애인치고는 제법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중간중간 떨떠름한 태도와 불유쾌한 감정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유영은 그런 나의 태도에 일말의 타격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나 ― 책을 읽는 현실의 나 ― 는 자연스럽게 소설 속 '나'와 유영의 모습을 가만히 상상하게 되었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유영을 가만히 바라보는 나와, 다리를 편안하게 벌리고 등을 등받이에 기댄 채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는 유영을.




그날 이후로 유영은 갑자기 '나' 앞에 불쑥불쑥 나타나게 된다. 어느 날 유영은 '나'의 집에 찾아와 당당히 방까지 들어오는데, 그곳에서 나 ― 책을 읽는 현실의 나 ― 는 비 온 뒤의 무지개처럼 흐릿하고 모호하면서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고 잔상처럼 남은 나의 사랑을 느꼈다. '나'가 유영과 처음 다시 마주쳤을 때 유영은 '나'에게 무슨 책을 읽고 있었으냐고 묻지만 '나'는 유영에게 일말의 정보로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대답하지 않는데, 이 방 안에서 '나'의 생각이 바뀐다.


89p - 왠지 책의 제목을 확인하는 순간 네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아, 그거였구나. 알았다. 이제 알았어. 혼자 기뻐하는 얼굴로 성불해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유영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고, 유영이 갑자기 사라질까 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현실의 나는 책 속의 나와 유영을 볼 수 없지만, 유영이 말을 할 때마다 항상 웃는 얼굴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분하고 섬세한 느낌의 나와 달리 유영은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느낌이 있다. 그것이 머릿속에 들어와 마음에서 사람과 풍경과 목소리와 말투를 만들어내면, 책 속의 유영이 어떤 상황에서든 실없는 농담 하나를 던지고 혼자서 실실 웃을 것 같은 사람이 되어 있다.


만약 이 소설 속의 나와 유영이 서로를 그리워하고, 이별을 슬퍼하고, 한 순간 한 순간이 애절하게 쓰였다면 오히려 작품이 남긴 여운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영은 영영 사라지기 전까지도 봄바람처럼 가볍고 선연하게 나의 곁에 머물고, 나는 유영이 사라진 후에도 계속 전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토록 굴곡 없는 일상적인 모습이 오히려 쓸쓸한 감정의 농도를 짙게 만들어 주었다.




82p - 마른 잎사귀 하나가 가지 끝에 매달려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로웠다. "혹시 너." 고개를 돌려보니 너는 사라지고 없었다.


90p - 나는 손사래를 치며 콜록거렸다. "너 가만있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침대 아래의 먼지를 두 손으로 긁어모았다. 단숨에 한 주먹 가까이 모을 수 있었다. 반격하려고 일어서보니 너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장면들이 문득 마음에 깊게 스몄다.


유영이 사라지는 순간, 한때 사랑했던 유영이 이제는 곁에 없다는 사실을 아주 담담하고도 선명하게 나타내는 표현. 우리는 영원히 같은 세상에 살지 않을 거라는 쓰라린 현실이다. 나는 유영과 있었던 순간을 아릿한 꿈결처럼 느낀다. 조금씩 무뎌지고 무뎌지고 무뎌지다가 어느 순간에는 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빛과 물방울처럼 너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너와 나의 사랑이 장마 끝에 맺힌 물방울이 되어버린 것처럼.





이제는 존재할 수도, 닿을 수도 없는


제목이 말하는 빛과 물방울의 색.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빛과 물방울은 분명 존재하지만, 손에 잡을 수도 가질 수도 없다. '빛'과 '물방울'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순간이 분명 존재하지만 더 이상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나'와 '너(유영)'를 빗대어 표현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색'은 무엇일까. 빛과 물방울은 어떠한 색도 형체도 없다. 평소에는 투명하고 잘 보이지도 않지만 한없이 다채로워지기도 하는 존재다. 이 소설의 전반적인 주제가 '다채로운 형태의 사랑'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이 글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랑 중 하나를 써낸 이야기이다. 빛과 물방울은 무색이다가도 어떤 색이든 될 수 있다. 마치 사랑처럼.


빛과 물방울의 색. 그러니까 이야기 속에서 사랑을 했었던 '나'와 '너'의 사랑과 이별, 그 자체는 이미 빛과 물방울의 색이다. 어떠한 색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 동시에 어떠한 색깔도 입을 수 있는 것. 이제는 존재할 수도 닿을 수도 없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들. 존재하지 않는 동시에 남아있는 것들. 흥미진진한 위기감이나 절절한 눈물 요소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여름날의 빗방울처럼 고요하게 지나가는 이야기는, 사랑에 무지한 나에게 어떠한 사랑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또는 책 뒤표지에 새겨진 문장이 힌트가 될 수도 있겠다.


우리는 그 안에 함께 있었고,
빛이 머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채로 반짝거렸다




어쩌면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 없는 ― 또는 깨닫지 못했던 ― 현실의 내가 바라는 사랑의 형태와 색깔은 이 소설이 그려낸 이야기와 제법 비슷할 것 같다. 서로에게 빛과 물방울처럼 다양한 색깔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랑. 사랑과 그리움을 마음 한편에 품고서도 각자의 삶을 단단하게 이어갈 수 있는 관계. 유영이 나에게 한 말처럼 "너는 너만 알지. 나는 나만 알고."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사랑하는 인연을 만날 수 있다면, 그건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사랑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어차피 완벽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유영은 사라지기 전에 나에게 마지막으로 말한다. 이 비가 멎으면 무지개가 뜰 것이라고. 그 무지개 끝으로 한 번 가보라고. 그 끝에 무엇이 있냐는 나의 질문에 유영은 웃으며 "아무것도. 그러니까 꼭 가봐."라는 의미심장한 대답을 남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무지개는 뜨지 않는다.


유영이 말한 무지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너는 왜 나에게 무지개의 끝에 가보라고 했을까. 어차피 무지개는 뜨지 않았는데.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어쩌면 너는 자신이 영영 사라질 것을 알고, 나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남긴 걸까. 아무것도 없는 무지개. 너는 나와 나누었던 사랑의 마침표를 뜨지 않을 무지개로 남기고 떠나버린 것일까.


책의 맨 마지막에는 신샛별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실려있다. 신샛별 평론가는 <빛과 물방울의 색>은 '사랑은 삶에 물기를 더하는 일이다'라는 아포리즘을 따라 서서히 서사의 규모를 갖춘 이야기라고 말한다. 갑작스러운 연락 두절로 제대로 이별하지 못하고 그대로 전 연인을 죽음 너머로 떠나보낸 나의 마음에는 깊은 슬픔과 그리움이 스며 있다고. 또한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문단은 애도가 끝난 뒤 '너와 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던 물방울'이 나에게서 완전히 떠나가면서 '나'가 이전과는 다른 색으로 물들기 가장 좋은 상태가 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날 나는 손을 뻗어 낙하하는 빗방울을 쥐어보려고 했다. 추락의 궤적을 자꾸만 낚아채려고 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손아귀에서 맑고 차가운 액체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꽉 움켜쥐었다. 쥔 채로 입술 가까이 가져왔을 때에야 내가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 박선우 著, <빛과 물방울의 색> 마지막 문단 -


전문가의 탄탄한 분석은 되레 문학에 무지한 나에게 복잡한 해설로 보이기도 한다. 굳이 어렵게 글을 해부하기보다는 그저 내가 생각한 직관적인 감상을 붙여놓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진정한 작가가 되기 힘든 이유가 이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쓴 모든 글이 전부 나의 과대한 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을 것이고.





특별한 퀴어 작품의 평범함


이제는 퀴어 작품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동성애, 양성애, 트랜스젠더, 퀴어 같은 키워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은밀한 시도에 가까운 분위기였지만 ― 특히 우리나라는 유독 그쪽으로 보수적이고 갈등이 많기에 더욱 ― 지금은 영화, 드라마, 소설, 만화, 노래 등 다양한 대중매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단순히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비롯해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범성애, 무성애,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등을 함부로 설명하고 정의하기에는 나의 지식이 미흡하기에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상적인 사랑'은 오직 이성애 하나였다. 나 또한 그랬다. 어린 시절의 나는 당연히 남자와 여자만이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어떤 게 옳은 것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사실 가르친다고 해도 학교에서는 동성애나 양성애는 잘못된 성적 지향이라며 전 세계의 '잘못된 사랑의 사례'를 학생들에게 보여주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나는 더욱 혼란스러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신중한 판단과 폭넓은 생각이 가능하다. 누군가는 여전히 동성애는 '비정상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다. 소아 성애, 근친혼, 수간, 사물 성애를 이상 성욕이라고 칭하며 본능적으로 거부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누군가는 "동성애가 정상이라면 소아 성애와 근친혼, 수간이나 사물 성애도 모두 사랑의 형태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하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와 그렇지 못할 범위는 정해야 하고, 동일화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별할 수 있기에 우리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나라는 사람은 무지하고 편파적이다. 그저 "내가 정답이고 네가 오답이다"를 가르는 게 아니라, 모두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이 상대방의 사상을 공격하지 않고 ― 물론 윤리적으로 어긋나거나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진 사상은 제외하더라도 ― 배려하고 이해하며 공존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게 진짜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그렇기에 점차 대중 앞에 등장하는 퀴어 작품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이성애든 동성애든 다른 형태의 사랑이든, 그저 사랑으로 존재한다는 것. 형태도 색깔도 부피도 밀도도 모두 다른 사랑의 형태. 세상은 그런 사랑으로 이루어져서 촘촘하게 수놓아져 있는 게 아닐까. 그 사실이 부서진 틈새에 살며시 들어온다는 건,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진다는 의미다. 이해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고 좀 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짧은 소설이었지만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 이야기였다. 특별한 퀴어 소설은 평범한 사랑의 형태 중 하나가 되었다. 생각보다 글이 많이 길어졌다. 확실히 해석할 여지도 상징적인 의미도 많은 소설은 혼자 분석하고 고민하기도 좋다. 어떤 색으로든 칠할 수 있는 사랑이 언젠가 세상으로부터 '정상적인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정상과 비정상을 따지지 않고, 그저 서로를 사랑하는 이들이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인 동시에 지금 바로 우리 앞에 있는 가까운 미래이기도 한 그 순간이 너무 오랜 갈증에 메말라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랑은 빛과 물방울의 색처럼, 아주 분명히 존재하는 그리움으로 남아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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