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쓰는 시각장애인 관련 글은, 시각장애인 당사자가 아닌 시각장애인과 함께 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쓴 글들입니다. 시각장애인 당사자와는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글에 앞서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이 글은 시각장애인과의 연애 및 결혼생활에서 겪은 경험과 그에 따른 내 생각 및 느낌을 적은 글이라 누군가에겐 흥미로울 수도, 누군가에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모든 시각장애인의 생활을 대변하는 글은 절대 아닌, 그저 에피소드들입니다.
나는 남편을 2014년에 직장에서 만났다. 하지만 그가 내가 처음 알게 된 시각장애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공부한 나는 학교에 시각장애인인 선후배 및 동기들이 많았다. 그리고 교내 시각장애인 친목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그들과 그들의 생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그러다 못해 시각장애인과 연애하고 결혼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난 친맹(親盲)적인 사람 아닐까? (전생에 심청이였을까?)
<이 정도면 전 여친을 못 잊은 것 같은데>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이전 연애에 대한 기록과 마음을 지우는 것일 테다. 연애 이전의 대화에서 전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내비치었기에 당연히 서로의 이전에 누군가를 만났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휴대폰에서 전 여친의 사진을 발견했다. 한두 개였다면 미처 지우지 못했겠구나 했을 텐데 그야말로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평소 그의 휴대폰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그날은 그의 휴대폰으로 내 사진을 많이 찍었고 그것을 내 휴대폰으로 공유하려고 사진첩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예전 사진을 보던 중... 한 여자가 찍은 셀카사진을 발견했다. 보자마자 그에게 이거 누구야?라고 물었다. 그는 누구? 하며 왼쪽 눈을 열심히 굴려 사진을 보다가 깜짝 놀라하며 후다닥 지웠다. 아니 이놈아 누가 봐도 전여친인걸? 그 한 장만 지운다고 될 것이 아니라 다음 사진부터는 함께 롯데월드에 놀러 갔고, 가서 뭘 먹었고, 무슨 놀이기구를 탔고, 어떤 옷을 입었고... 등등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녀와 헤어진 후 누군가의 눈을 빌려 사진첩을 정리했었는데 그때 안 지운 사진 몇 장이 남은 것 같다고 했다. 사실 전 여친의 사진을 보는 것이 그렇게 유쾌한 상황은 아닌데, 그의 상황을 생각하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쿨하지 못해 아직까지도 이때 일로 욕을 하곤 한다.
아,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면 상관없는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산 가방을 메고 우리 집에 온 날, 그 가방에서 그녀와 찍은 스티커사진이 나왔다. 새 가방이라며? 가방을 사고 신나서 이전 가방에 있던 물건을 다 넣어서 왔나 본데.. 그럼 그전 가방엔 왜 그게 있는 건지... 휴대폰 속 사진보다 뭔가 더 충격적이라 말을 못 하고 데이트 끝날 때까지 심통 부렸다.
아니, 생각해 보니 또 하나 있었구나! 그의 아이패드 투명 케이스 안에 그녀의 증명사진이 끼여 있었다. 당시 그의 남동생이 아이패드를 빌려 갔었는데 어디선가 그 사진이 떨어졌나 보다. 남동생은 그게 나인줄 알고 거기에 고이 끼워놓고 다 쓰고 형에게 아이패드를 주었다고... 어느 날 카페에 갔다가 꺼낸 아이패드에서 그녀의 사진을 보고 둘 다 깜짝 놀랐다. 내가 조용히 처리함. 이 정도면 그녀를 못 잊은 거 아닌가요? 이 모든 사건에서 남편의 반응은 한결같다. 정말 몰랐던 것이다. 그 표정이 너무나 귀여워서 봐줬다.
<거긴 여자화장실이야!>
남편과 데이트를 하면서 조금 민망할 때가 있는데, 바로 화장실을 갈 때이다. 화장실 앞까지 그를 안내해 주다 보면 다 큰 여성이 남자화장실을 기웃거리는 그런 모양새가 되곤 한다. (의도치 않게 뒤돌아있는 아저씨들의 뒷모습을 보기도..)
세상 모든 화장실이 모두 똑같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대부분의 화장실은 왼쪽이 남자, 오른쪽이 여자인데 건물의 구조상, 아니 구조와는 상관없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안내인 없이 혼자 화장실을 찾은 시각장애인들이 실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화장실 입구 쪽 벽 점자 표시가 있지만.. 급해죽겠는데 그걸 다 어찌 확인할까? (사실 이건 장애의 유무를 떠나 나도 오른쪽이 여자화장실인 줄 알고 진입했다가 놀라 나왔던 적도 많다)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프러포즈를 받은 날이라 마음이 몽글몽글한 상태였다. 그러다 남편이 화장실에 가겠다 했고, 몽글몽글한 마음에 여운이 많이 남아 혼자 그 상황을 즐기고 싶었기에 직전에 화장실에 다녀온 나는 화장실로 가는 길이 그리 복잡하지 않아 남편에게 설명해 주고 혼자 보냈다. 직진 쭉 하다 왼쪽에 있는 통로로 들어가면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그는 여자화장실로 들어갔다. 통로로 진입하는 발걸음이 뭔가 여자화장실로 들어갈 것 같아서 (남자화장실은 그 통로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옆에 있어서 통로에 들어가 주춤하게 될 텐데, 통로로 들어가는 남편의 발걸음은 아주 당찼다.) 혹시나 해서 급하게 따라갔더니 남편은 당황해서 나오고 있었다. 소변기를 찾았는데 없어서 혹시나 하고 나왔다고...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큰일이 날 뻔했다. 가끔은 내가 오른쪽 왼쪽을 잘 못 얘기해 줘서 잘 못 들어갈 때도 있었다... 미안하다 여보
<니가 잡은 그 손, 그건 내가 아니야>
남편이 화장실에 다녀와야 해서 내가 화장실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거나, 넓은 쇼핑몰 공간에서 서로 알아서 구경을 하다가 다시 날 찾아야 할 때 가끔 비슷한 인상착의를 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남편을 발견한다. 그를 발견하면 다행이지, 내가 식겁해서 달려가서 잡아 세우거든. 그런데 나도 미처 그런 그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면 모르는 사람 팔을 잡으려고 손을 뻗거나 이미 팔을 잡았거나 등등의 그런 일들이 종종 생긴다. 나중에 남의 아기 데리고 갈까 봐 걱정이다(라고 아이를 낳기 전에 쓴 글이었는데.. 놀이터에서 종종 다른 아이를 보고 딸인지 알고 따라갈 때가 있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남편이 어릴 때 친구와 쇼핑을 하며 둘러보다가 진열대에 멋진 모자가 있길래 오 이거 괜찮다! 하고 집어 들었단다. 그런데 그것이 진열대 반대편 의자에 앉아있던 어떤 아저씨가 쓰고 있던 모자였다고 한다. 아저씨는 앉아 계시다 모자를 뺏길 뻔했다는 쇼핑 갈 때마다 하는 웃긴 이야기.
<내 우는 얼굴이 얼마나 못생겼는지 알려주고 싶지 않아>
엉엉 울지 않더라도 눈물 찔끔하고 울고 싶은 그런 날이 있다. 눈물을 흘리면 흘린다고 눈앞의 그에게 중계해주고 싶지 않은 그런 날. 알아서 보고 위로를 해줬으면 하는 그런 날. 소리 없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나는 그는 당연하게도, 모른다. 가끔은 우는 걸 알아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나는 눈물이 나면 코를 같이 훌쩍이는 편이라 언젠가부터 남편은 내가 코를 훌쩍이면 우는 줄 안다. (그래서 감기 걸린 날엔 자꾸 우냐고 묻는다.) 그렇지만 우는 모습이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처럼 예쁘지도 않고, 우는 이유가 어이없을 때면 그냥 혼자 울고 말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의도치 않게 그는 눈물 흘리는 여자친구를 매정하게 내버려 두는 남자가 되기도 한다.
글이 길어져 2편으로 나누어 써보려 한다. 많고 많은 이야기들 중 순한 맛으로만 적어본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