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내 연구실 동료였다. 나와 그 사이에 겹치는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로 첫인사를 나눴고 동학년이라는 공통점도 있어서 수업과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더 가까워졌다. 그래도 살짝 멀었던 나와 그의 사이를 가깝게 해 준 그의 한마디는 “퇴근하고 뭐 하세요?”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지하철역으로 함께 갔던 퇴근길을 어떤 대화로 채워야 했던 그가 내뱉은 말이 “퇴근하고 뭐 하세요? 였는데, 당시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척)하는 기간제 교사였던 나는 “독서실에 가요.”라고 답했다. 그냥 던진 말에 그렇게 대답한 내가 짠해 보였는지 그는 밥 먹고 가서 공부하라며 맛있는 저녁을 사주었다. 그런데 밥만 얻어먹기 미안했던 나는 커피를 사주었고 그렇게 이야기하며 놀다 보니 9시가 훌쩍 넘어 그날 공부는 접어야 했다. (그렇게 연애하는 내내 공부는 접었다...) 우리는 그 후에도 종종 퇴근길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고, 주말에도 몇 번 만나다 보니 어느새 연인이 되어 있었다. 아 이런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와 동료보단 가깝지만 연인은 아닌, 사람들이 말하는 ‘썸’을 타고 있을 때 내 나름의 고민이 많았다. 당시 나의 나이는 스물여섯, 그는 서른둘이었다. 30대는 엄청난 어른 같이 생각되던 그때. 사귀면? 혹시 결혼하자고 하면 어쩌지? (정작 그는 아무 생각 없었다.) 그의 장애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땐 장애보단 나이가 더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가까이 살던 친언니에게 그의 존재에 대해 말했다. 언니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내 앞에선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나중에 들으니 생각이 많아졌다고 했다.
나는 남자친구가 생기면 늘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엄마께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당장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게 아니니 남자친구를 만나는지 굳이 말하지 않으면 모를 텐데.. 싶었지만 주말을 맞이하여 집에 내려갔을 때 엄마와 대화 도중에 남자친구의 존재를 밝혔다. 남자친구의 직업과 나이를 이야기할 때까진 보통의 반응이었지만 시각장애인임을 알렸을 때부터 엄마는 많이 당황했다.
엄마에게 이야기를 하고 후련한 마음으로 집을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온 나는 여느 때처럼 일하고 데이트하며 지냈다. 그러다 며칠 뒤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김치 있냐는 말로 시작된 통화에서 말을 빙빙 돌리던 엄마는 결국 남자친구에 대해 물었다. 나만 집을 떠나오며 마음이 후련했지, 엄마는 고구마 먹은 듯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엄마가 무엇을 걱정하고 우려하는지 알았지만 당장은 그런 걱정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엄마에게 “엄마, 나 지금 행복해.”라고 했다. 경상도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엄마에게 나의 감정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조차도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싶어 지금도 놀랍다. 엄마는 “그래, 네가 행복하다면 됐어.”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그를 1년을 만났다. 이대로라면 우린 결혼을 할 것 같은데, '반대를 무릅쓰고' 그 상황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내가 무엇부터 해야할까_ 생각하다가 문득 남자친구를 엄마아빠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앞서 말했듯 ‘당장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생각을 했나 싶다. 아마 여전히 그에 대한 의구심이 가득할 부모님께 그를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렇게 4시간을 달려 고향집으로 그와 함께 내려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가자고 따라온 그의 속이 궁금하다...) 만난 지 1년하고 세달쯤 되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서울에서 부모님 동네까지 4시간을 달린 시외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고, 엄마가 나를 데리러 정류장에 나와 계셨다. 부모님은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1박을 하고 다음 날 집을 떠나는 시간까지 그에게 아주 친절히 대해주셨다. 나는 그의 장애보다 그가 잘하는 것을 더 내세우고 싶었기에 이런저런 얘기를 유도하며 뭣도 모르고 헤헤하고만 있었다. 엄마아빠 속은 답답한 줄도 모르고 말이다.
사실 엄마는 버스에서 그가 내리는 순간 실망스러웠다고 했다. 내가 이전에 한 말로는 시각장애인이라지만 이것저것 다양한 활동을 한다니 어느 정도 잘 보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버스에서 내려 더듬더듬하는 것을 보고 ‘아...’ 하고 탄식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대화를 해보니 너무 바르고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그의 장애가 더 아쉽고 안타까웠단다. ‘눈만 잘 보였다면...’ 그가 평생 누군가에게 듣고 스스로 내뱉었던 그것을 내 부모님도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던 것이다.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서울로 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부모님께 숨기는 것이 없고 이 남자를 보여주기까지 했으니, 당장 결혼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의 관계가 큰 문제없이 흘러갈 것이라 생각했다. 이 관계에서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다. 그 후부터 약 반년간 그는 우리 가족에게 해리포터 시리즈의 ‘볼드모트’ 같은 존재였다. 존재함을 알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가끔 하는 통화에서 엄마는 나의 근황을 물으며 그와 아직도 만나고 있는지 슬쩍 물어보고, 나는 나의 근황과 함께 그의 근황도 함께 대답하는 그런 나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랬음에도 결혼을 한 것에는 생각보다 큰 어려움이 없었다. 엄마아빠를 붙들고 눈물을 흘린 적도 없었고 부모님이 큰 소리로 내게 반대를 외치지도 않았다. 물론 그와 부모님, 그 중간에서 내가 마음 앓이를 했었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속상함이 딱히 생각나지 않을 정도, 딱 그 정도의 마음 앓이였나 보다.
엄마는 나와 싸우고 싶지 않아 ‘포기했다’고 하며 결혼을 허락해 주셨다. 애초에 아빠는 ‘내가 좋다는 데 어쩌겠냐.’는 포지션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있지만, 내가 부모님을 ‘이겼다’고 표현하고 싶지 않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그렇다. 부모는 자식이 생각하지 못한 몇 미터 밖의 일까지 생각하기에 엄마도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많은 일들이 걱정되었을 테다. 가끔은 그때 엄마가 아니라 내가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엄마가 걱정하던 일에 엄마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까지 참 많지만, 이 또한 내가 결정하고 선택하였기에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후회하지 못한다. 엄마에게 ‘힘들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거봐! 내가 그럴 거라 그랬지!’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이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ㅎㅎ
시작이 조금 그랬지만 내 부모님과 내 남편의 사이는 아주 좋은 편이다. 그건 엄마아빠도, 남편도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 때문도 있지만... 그 사이에서 내가 제일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 누구도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종종 블로그 글에 집안의 반대는 없었냐는 댓글이 달렸던 것이 기억나 tmi가 가득한 이야기지만 9년 전의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써보았다. 엄마아빠의 믿음에 나와 그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에 대한 보답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