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항상 남편이 주인공인 글을 써왔다. 그 덕에 블로그와 브런치도 운영하고 있고 요즘은 그런 글들이 뜸하긴 하다만... 글쓰기를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기고 요청을 받았다. 남편의 글이 책에 실린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땐 내가 그의 글로 신청을 했던 것이었는데 이번엔 지난해 우리의 인터뷰를 보시고 성당으로 연락이 와서 연결이 되었다.
남편은 독감에 걸리고 골골대는 와중에 학기말이라 업무도 많았는 데다가 글까지 써야 해서 많이 힘들어했다. 마침내 방학을 했지만 부탁받은 글을 써야 하니 마음의 짐이 엄청났다. 마감이 있는 글쓰기란 참 어려운 일이야... 를 되뇌며 머리를 쥐어짜다 겨우 완성했다.
뭐라고 썼을까 궁금해서 컴퓨터 파일을 몇 번이고 열어서 읽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비밀은 아니지만 뭔가... 책에 실린 것을 보면 더 감동적일 것 같아서.
내 글에 남편이 등장하기만 했는데, 내가 주인공인 글을 받아 들고 보니 뭉클하기도 하고 좀 부끄럽고 머쓱하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사이좋은 부부로 잘 지내봐야겠다.
세상의 좋고 싫음을 반만 보고 반은 안 보고 살고 있다. 스무 살에 장애인 등록을 하면서 시각장애인이 되었고, 그 후로 20년을 더 시각장애인으로 살았으니 세상을 잘 보고 산 것도 반, 잘 못 보고 산 날도 반이 되었다. 오른쪽 눈은 어릴 때부터 잘 안 보였고 왼쪽 눈으로 보고 살고 있었으니 이 또한 좋든 싫든 반은 보고 반은 못 보고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나마 보이던 왼쪽 눈은 녹내장이라는 질환으로 계속 진행되어 지금은 처음으로 시각장애 판정을 받았던 스무 살 때보다 훨씬 더 못 보고 살고 있다.
이러한 나의 인생 파도에서 내 삶으로 뛰어든 사람이 있었다.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나의 짝꿍이다. 나는 '짝꿍'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무언가 어린 시절에 옆에 앉던 짝꿍 같은 느낌도 있고, 평생을 짝이 되어 살아가는 동반자의 어감도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서도 '짝을 이루는 동료, 뜻이 맞거나 매우 친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니 이렇게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 배우자는 짝꿍의 의미가 더할 나위 없이 맞는 관계 같다. 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는 짝꿍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내 짝꿍이 그리 귀여운 편은 아니지만, 이 짝꿍이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사람은 맞는 것 같다. 무모하게 내 삶에 뛰어든 나의 짝꿍은 지금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나를 선택한 사람이다. 내 부모와 형제도 나와 내 장애를 선택하지 않았고, 내 자식들도 아빠의 장애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에 던져진 순간 나의 장애를 맞닥뜨려야 했지만 유일하게 내 짝꿍은 나의 장애를 선택했다. 더 좋은 선택지도 많았을 것이며, 피해 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선택했다. 혹시 지금은 후회하고 있을까?
우리는 같은 직장에서 만났다. 나도 내 짝꿍도 처음 발령받은 근무지였으며 첫 근무지에서 같은 학년 교사로 배정받아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성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서로 스쳐 가는 동료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퇴근 시간이 겹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먼저 저녁 식사를 물어보았다. 마침 별다른 약속이 없었던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고 또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다음 약속을 잡고 있었다. 몇 번의 만남 이후 우리는 서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고 그렇게 만남을 이어 나갔다.
여느 남녀가 데이트를 하면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코스 중에 가장 흔한 것이 밥 먹기와 차 마시기가 아닐까 싶다. 그 외에 영화 보기, 산책, 더 나아가 공연 관람 등이 있으나 이 모든 것이 계속되다 보면 경제적, 물리적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나 역시도 그랬는데, 어느 날 데이트 코스를 모색하다가 주말에 성당에 가서 같이 미사를 드림이 어떠한지 권고해 보았다. 내가 대단한 열정 신자여서도 아니었고 이미 오랜 기간을 냉담하고 있던 나로서도 궁여지책과 같은 제안이었다. 그냥 주일을 지키지 못하던 내 한편에 무거운 돌덩어리도 있었고 언젠가는 성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기에 그냥 던져 봤던 말일지도 모른다. 그녀도 호기심이 있었는지 나와 함께 가 주었고 몇 번 가다 보니 그녀가 역으로 내게 제안을 해 주었다. 본인이 세례를 받고 싶은데 세례를 받으려면 교리를 받아야 하니 교리를 받는 동안 같이 성당을 가자는 것이었다. 주님이 그녀를 부르시면서 미천한 냉담자도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을까? 그 이후 나는 6개월을 빠지지 않고 주일의 의무를 다했다. 내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고, 한번 시작하면 그래도 끝을 보는 그녀의 성격상 정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성당에 나갔다. 난 당시에 교적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서 한참 내 교적을 추적해 보니 아직도 내가 세례를 받았던 충청도 쪽 성당에 내 교적이 있었고 이때쯤에서야 교적도 다시 옮겨 왔던 것 같다. 그녀가 교리를 받는 동안 함께 여러 성당도 가 보고 절두산 성지도 가 보고 잠깐이지만 성경도 읽어 보았다. 어쩌면 무늬만 신자였던 내가 신부님의 강론에도 귀를 기울여 보고, 좀 더 나아가 교회의 흐름을 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내가 또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다닌 곳은 우리 집 근처에 있던 B 성당이었는데 그곳에는 찬양 팀이 있었다. 물론 성가대도 있었지만 밴드로 찬양을 하는 '라우다떼'라는 찬양 팀이 있었고 미사 시간에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녀에게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나도 저런 찬양하는 팀에서 노래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만 꺼내고 늘어놓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그 말을 주워 담아서 실천에 옮기는 편이라 그녀는 곧바로 그 팀에 찾아가 보자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라우다떼의 일원이 되었다. 참 간단했던 일이고 순간에 이뤄진 일이긴 했지만 늘 큰 용기가 없었던 내게 그녀는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추진력을 주었다. 그리하여 교리 공부로 인해 6개월 지속되었던 나의 신앙생활은 다시 청년 활동으로 이어져 더욱 지속되게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이 내 인생에서 계획된 일들이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기대도 없이 그렇게 우리는 결국 주말을 계속 함께 보내게 되었다.
찬양 팀에 합류하면서 처음으로 청년 모임을 해 보았다. 또래의 가톨릭 청년들과 교류할 일들이 없었던 내게 이 또한 새로운 일들이었다. 내 주변에 또래들 중에서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신앙 아래서 또 같은 목표를 위해서 함께 하는 일들이 새로운 기쁨이자 도전이었다. 청년 활동 역시 그녀와 함께하면서 모든 주말을 거의 같이 보내게 되었고 그렇게 우리의 주말이 계속되었다. 계속 함께 하는 주말은 서로가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게 노래 가사를 읽어 주었고 나는 열심히 노래했다.
어느덧 그녀가 교리를 마치고 세례를 받는 순간이 다가왔다. 한참을 세례명을 고민하던 그녀가 선택한 세례명은 루시아였다. 보통 자신의 생일이 있는 달이나 맘에 드는 이름을 고르기 마련인데 그녀의 생일과 멀리 떨어져 있는 루시아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가 말하길 루시아 성녀는 평생을 '맹인을 위해 기도한 성녀'라고 했다. 빛을 의미하는 룩스(Lux)라는 라틴어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성녀 루시아는 '어둠을 밝히고 빛을 내는 빛의 전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램프나 초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름 그대로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동정 순교자로서, 시력이 약하거나 시력을 잃은 이들과 눈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특별한 공정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해 성녀를 그린 성화나 상본을 보면 보통 성녀가 자신의 두 눈알이 담긴 쟁반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1995)에서도 등장하는 루시아 성녀는 그렇게 눈먼 나를 위해 그녀를 보내주셨나 보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녀가 내 짝꿍이 될 것이란 절 직감했을까. 어느덧 우리는 결혼을 약속하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프러포즈하기 위해 묵주 커플링도 맞추고, 함께하기 위한 여정을 준비하기로 했다. 물론 순탄지 않고 험난한 여정이 준비되어 있다는 걸 서로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역시도 우리가 함께 지고 갈 십자가라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식구가 더 늘어서 두 아이까지 함께 지지고 볶으며 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만 육아를 하다 보면 그 간의 역경과 고통은 또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지금이 정말 힘들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우리 역시 그러한 친국과 지옥을 오가는 순간을 매일 맛보고 있으며 이 속에서 지혜를 찾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아마도 짝꿍 역시 그녀의 무모했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지금의 우리는 지금의 과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면서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세상의 모든 면을 반만 보고서라도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 분명한 것은 전체 인생의 반 정도밖에 살아 보지 못했을 나에게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가려고 한다. 물론 이제는 혼자가 아닌 둘이서, 그리고 넷이서. 절망과 슬픔은 안 보이는 반에 맡기고 기쁨과 희망을 보면서 살아 보자고 다짐한다. 혹시 그 끝에 해답이 없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