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수영(이 되기까지)

수치심 가득했던 수영

by 루시아


“새벽 수영 다녀요.”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와아, 대단해요!"

정작 그 시간에 함께 수영하는 이들은 하루라도 빠지면 잔소리를 퍼붓는다.

"어제 왜 안 왔어요?"

왜 안 왔는지 말할 때까지, 꼭 묻는다.


처음 수영을 시작한 이유는 복직 때문이었다. 운동은 해야겠는데, 시간은 새벽밖에 없었다. 그전까지 이어오던 홈트는 어느 순간 재미가 없어졌고, 이제 뭘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수영을 ‘갑자기’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날, 동료가 휴대폰 화면을 불쑥 내밀었다. 화려한 여자 수영복 사진이 있었다.

"쌤, 나 수영복 살 건데 뭐가 예뻐요? 좀 골라줘요."

"웬 수영복?"

"저 수영한 지 3개월 정도 됐어요. 정말 재밌어요~"

그렇게 한참을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수영복을 구경하고, 새로운 것을 사는 그녀를 지켜봤다. 그날로부터 2주쯤 지났을까. 나도 수영장에 다니고 있었다.


사실 수영은 나에게 ‘수치심’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잠시 수영을 배우러 간 적이 있었다. 여유롭지 않던 집안 형편에 어쩌다 수영을 배우게 됐는지 모르겠다. 4살 차이 나는 언니와 함께 수영장에 갔고, 수업 장면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딱 하나 기억나는 건, 나와 언니의 수영을 바라보던 엄마의 시선이다.


어린이 수영반이 다 그렇듯, 부모들은 유리 너머로 아이들을 지켜봤다. 부드럽게 헤엄치는 언니와 달리, 나는 아니었다. 엄마는 내 수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같이 배웠는데 왜 그러냐~"


수영을 못해서 속상했다기보다, 내 모습이 웃기게 보였고, 누군가 그걸 봤다는 생각이 정말 부끄러웠다. 주목받는 걸 싫어하는 지금의 나를 보면, 그때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어린 나에게 수영은 ‘부끄러움’이 되었다.


두 번째 수치심은 대학 시절.

졸업반 무렵, 나는 또 수영장을 찾았다. 왜 그랬을까? 어린 시절의 수치심을 극복해보려고 했던 걸까? 무식하게 성실한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했고, 두 달간 자유형과 배영을 배웠다. 수영장은 대부분 회사원이나 어르신들이었고, 내가 가장 어려 예쁨을 많이 받았다. 처음 두 달은 즐거웠다.


세 번째 달, 평영을 배우던 날이었다. 선생님이 물 밖으로 나와 바닥에 엎드리라고 했다. 엎드린 채로 발차기 자세를 배웠다. 자세도 민망했고, 앞으로도 잘 나가지 않았다. 마음이 점점 시들해졌다. 아르바이트비로 강습비를 냈기에, 가기 싫은 마음은 곧 "돈도 없고..."라는 핑계로 바뀌었다. 결국 세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뒀다.

그래서 수영은 나에게 또다시 수치심이 되었다.


어릴 적 수영을 떠올리면, 그 부끄러움은 ‘남에게 보이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것’이었다면, 두 번째 수치심은 ‘끝까지 도전하지 못하고 포기한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의 나는 새벽 6시 수영을 4년째 하고 있다.

‘오늘의 수영’이 되기까지, 그 긴 감정의 시간들을 지나왔다. 내 수영은 여전히 어설프고, 새벽길은 여전히 피곤하지만 이제는 부끄러움이 아닌,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