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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Dec 31. 2018

시작은 설거지

리스본 여행 에세이 #1. 리스본 맥주



작은 가방. 그것만으로도 어깨가 뻐근했다. 아직 생수는 사지도 않았다.

아마도 청소 후의 피로감 때문이리라. 

이런 나의 상태를 위로해주기에 호시우 광장은 더없이 좋은 장소다. 이곳은 리스본에서 몇 안 되는 평지이며, 일곱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이 도시를 위한 완벽한 베이스캠프다. 물론 이것은 나만의 주장은 아니다. 

얼마 전, 이곳에 머물렀던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페소아의 말을 떠올려 보자. 


“오늘 안에 리스본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면 
여기야말로 묵을 호텔을 고르기에 적당한 곳이다.” 


그의 말처럼 이곳은 이방인이 도착할 기차가 서는 곳이고, 각자 다른 주머니 사정에 맞는 숙소를 구하기 좋은 곳이다. 그뿐인가. 도시의 시간을 기록한 오래된 카페와 당장의 목마름을 해소해 줄 작은 마트도 이곳이라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 한 그곳을 들른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간판을 보고 들어간 가게는 아니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아우구스타 거리를 따라 걸어 테주강을 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눈보다 가방을 채워야 했다.



일단은 생수다. 

언제 길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리스본은 골목으로 빼곡하다. 아무리 좋은 스마트폰과 GPS를 가지고 있다 해도 이곳의 좁은 골목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때 가장 필요한 것은 지도 보다는 생수다. 만약 리스본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면 일단 지금 산 생수를 꺼내자. 그리고 충분할 정도로 마신 다음 기억해보자. 내가 가려고 했던 곳이 높은 곳이었는지, 낮은 곳이었는지를. 


그렇게 목마름도 해결되었고 가고자 했던 곳도 떠올렸다면 이젠 감각을 믿어 본다. 이 길이 위로 향한 길인지 아래로 향한 길인지.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감각만으로 선택해도 리스본은 여유로운 선생님처럼 정답의 동그라미를 그려줄 테니까 말이다. 실제로 리스본 골목은 복잡하기는 해도 속이려 들지 않는다. 내리막 골목에 들어서면 반드시 아랫동네가 나오고, 오르막 골목을 향하면 반드시 윗동네가 나타난다. 

이런 사실에도 불안하다면 그럴 땐 잠시 서서 주변을 둘러보자. 

리스본이라는 도시는 우리가 목적했던 곳보다 훨씬 멋진 광경을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탄산이 들지 않은 생수를 고르자 옆으로 두 종류의 맥주병이 보인다. 타지에서의 첫 맥주라면 당연히 그 지역 생맥주를 파는 술집으로 향하는 것이 좋겠지만 이미 냉장고 문을 연 이상 어쩔 수가 없다. 맥주를 사야 한다. 


고민할 것은 종류다. 다행인 점은 리스본의 맥주는 크게 두 종류뿐이라는 점이다. 하나는 슈페르 복(Super Bock) 다른 하나는 사그레스(Sagres)다. 어차피 한 병으로 이 여행을 마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택은 신중해진다. 이름만 봐서는 슈페르 복이 광장의 햇볕과 잘 어울릴 것 같지만 ‘사그레스’는 왠지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말 같아서 고민이 된다. 이럴 때는 진열 상태를 보는 것이 좋다. 둘 중 어느 줄이 더 짧은지를 살피자. 줄이 짧을수록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맥주일 것이다. 여기엔 함정이 있다. 너무 안 팔려서 진열을 자주 하지 않기에 짧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함정에 빠져 맛없는 맥주를 고를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열된 병 위의 먼지를 보면 좋다. 긴 줄로 정렬해 있는 맥주병 위에 먼지가 한 톨도 없다면? 일단 가게 주인의 위생 관념을 칭찬해주자. 그리고 다음으로 할 일은 그 중 한 병을 꺼내는 것이다. 아마도 그 맥주는 먼지가 쌓일 틈도 없이 팔려나가는 맛있는 맥주일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이런 복잡한 셜록의 추리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맛있는 맥주를 고르는 방법은 있다. 바로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나의 선택은 슈페르 복이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Bock’이라는 글자에서 물고기 느낌이 났기 때문이다. 바다의 나라 포르투갈에서 물고기 느낌이 나는 맥주라. 더없이 완벽할 것만 같은 선택이다. 물론 조금 더 고민했다면 사그레스를 골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그레스는 동명의 포르투갈 지역이 있기도 한데 리스본의 수호성인인 빈센트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지역이다. 그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냉장고 앞 고민은 조금 깊어질지도 모르겠다. 


빈센트 성인은 그리스도교가 금지되어있던 로마 제국 시절 사람이다. 그는 현재의 스페인 지역에서 순교했고 유해는 배를 통해 지금의 포르투갈 사그레스 지역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800년이 지나서야 포르투갈에서 첫 번째 왕이 탄생한다. 그는 빈센트 성인의 유해를 리스본으로 옮기길 원했다. 다만 시간이 너무 지나 그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도움을 준 것이 까마귀다. 그들은 빈센트 성인의 유해가 있는 곳을 찾아 주었고 유해가 리스본으로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동행했다. 덕분에 빈센트 성인은 비로소 리스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정도 이야기면 사그레스 한 잔을 길 가던 까마귀에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작은 가게 냉장고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다가는 의심받기 딱 좋으므로 일단 가게를 나서자. 


호시우 광장의 고른 햇볕 속을 걷다 보면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금세 잊게 된다. 리스본 중앙역이 근처에 있어서 누구나 짐 가방을 들고 다니며, 사방에 나와 같은 외국인이 마치 안무를 맞추기라도 한 듯 지도를 한 번, 정면을 한 번, 그리고 좌우로 휙휙 거리며 거리를 거닐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모두가 이방인이자 리스본의 햇볕을 고르게 나눠 가진 포르투갈인인 것이다. 


그것은 광장 중앙에 서 있는 저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이름은 동 페드로 4세. 사실 호시우 광장은 두 개의 이름이 있는데 다른 하나가 바로 ‘동 페드로 4세 광장’ 이다. 왜냐하면, 그의 동상이 광장의 중앙에 서 있기 때문이다. 리스본을 대표하는 광장에 서 있는 동상이라면 당연히 포르투갈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위대함의 크기를 이방인인 내가 판단할 수는 없으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지나갈 여유 정도는 충분히 있다.



동 페드로 4세는 포르투갈의 왕이었다. 그것도 무려 2개월이나 통치한. 이 놀라운 사실도 사실이지만 그의 족적이 더 깊이 남아있는 것은 브라질이란 사실도 놀랍다. 지금 말한 족적은 묘사로서의 족적이 아니다. 실제 그의 발자국은 브라질에 더 많이 남아있다. 그는 나폴레옹의 진격을 피해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피난을 떠났다. 당시 나이가 10살 정도였는데 그때부터 23년간 브라질에 머물며 브라질 제국을 세우고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35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말하자면 포르투갈에 머문 시간보다 브라질에 머문 시간이 더 길었던 셈이다. 

그런 인물이 호시우 광장의 중앙에 서 있다. 포르투갈에 대한 애정이나 기여도를 본다면 지난 유로 축구 대회에서 새벽잠을 포기하고 포르투갈의 우승을 기원한 나 역시 그에 못지 않을 테지만 일단은 자리를 양보하도록 하자. 광장의 이름으로도 잊혀 가는 왕에게 그 정도의 자리는 허락되어도 괜찮으니까. 


나의 자리는 여기다. 겨우 거실의 먼지를 치운 나의 집. 

내일을 위해 생수를 냉장고에 넣어둔다. 맥주의 자리는 거기가 아니다. 그는 지금 바로 활약을 해주어야 한다. 

한참을 뒤져 오프너를 찾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부엌 찬장을 하나씩 열어본다. 역시나 있다. 슈페르 복 전용 잔. 평균 온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맥주잔의 크기는 작아진다. 리스본의 경우에는 200mL 정도의 작은 맥주잔을 주로 볼 수 있다. 이 이상의 크기라면 다 마시기도 전에 맥주가 식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애써 머리를 굴려 슈페르 복을 산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나에게는 반드시 이 전용 잔이 필요하다. 

문제는 잔의 상태가 영 미덥지 못하다는 것이다. 마신 것이 언제가 마지막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하얀 먼지가 잔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겠지. 집에서 맥주 한 잔 마시지 못할 정도의 버거움은 아니지만 전용 잔을 꺼내 들 여유는 없는… 그 정도의 하루를 쌓으며 지내왔던 것이리라. 

“전용 잔, 그까짓 거 없어도 맥주는 맥주다. 시원하고 쌉싸름한 맛의 넘김 끝에는 감탄사를 제외한 모든 생각을 지워줄 것이다. 전용 잔 없이도 말이다.”


평소라면 그런 생각으로 전용 잔을 다시 찬장에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먼저 맥주를 잠시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전용 잔에 물과 세제를 뿌렸다. 전용 잔이 놓일 자리. 그 정도는 허락 받는 게 당연했다. 그 자리를 위해 설거지를 시작했다. 슈페르 복 전용잔은 특별할 것이라고는 없는 모양새다. 아래가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지름이 커지는 형태의 잔이다. 손잡이도 없고(있을 필요가 없겠지. 손의 열이 맥주에 영향을 미치기 전에 맥주는 사라져 버렸을 테니까) 상단에 상표가 찍혀 있을 뿐이다. 이런 모양의 전용 잔이라면 슈페르 복은 향이 중요한 맥주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전용 잔은 무엇을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오프너로 병마개를 열자 하얀 맥주 기운이 허공에 잠시 올랐다. 특별하지 않은 모양이기에 따르는 법도 특별할 게 없었다. 그저 거품이 넘치지 않게 조절을 하면 그만이었다. 가득 담긴 잔을 들자 맥주의 탄산이 함께 올랐다. 목이 따끔해지기 직전까지 슈페르 복을 목으로 넘겼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둔 전용 코스트 위로 잔을 ‘탁’ 하고 내려놓았다. 


지금의 나에게 그 정도의 자리는 허락되어도 괜찮았다.




글 | 최동민

제작 | Studio 1.9.8.4

메일 | groscalin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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