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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Jan 02. 2019

휴지통 비우기

리스본 여행 에세이 #2. 리스본 빵집



아침이다. 눈을 뜨고 30분째 천장만 보고 있다. 말하자면 호사다. 머릿속은 아침 식사 생각뿐이다. 딱히 허기가 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외에는 해야 할 생각이 없다. 어제 먼지를 치운 덕인지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느라 고개를 돌리자 밤새 눌린 베개 솜이 천천히 오르는 것이 보였다. 다 오를 때까지 그것을 보았다. 말하자면 호사다.


대강 후드 집업을 몸에 걸치고 모자를 둘러쓴다. 10월의 아침이라 제법 쌀쌀할 수도 있지만, 목적지가 멀지 않아 괜찮다. 현관문을 열자 막 택배 박스를 연 것처럼 새것의 공기 냄새가 난다. 양말도 없이 운동화를 신어서인지 밤새 쌓인 습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럴 때는 발을 조금 더 통통 굴리는 것이 좋다. 뒤꿈치는 없다는 듯 앞꿈치로만 터덜. 또 터덜. 그렇게 몇 번을 걷다 보면 습기가 어느새 빈 뒤꿈치로 빠져나간다. 그리고는 도착이다. 집 앞 빵집에.


빵집이 집 앞에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것도 맛 좋은 빵집이 있다는 것은 말이다. 새벽만큼 부지런한 주인 덕에 거리의 공기가 구워져 올랐다. 여전히 통통 걷던 나는 그 공기를 타고 조금 더 높이 점프한다. 그러자 울리는 빵집의 종소리.


땡땡땡


리스본에서 빵집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디에 숙소를 잡더라도 근처 100m 내에 아침부터 문을 여는 빵집을 만날 수 있다. 이방인의 아침 식사. 그 모습은 다양할 것이다. 호텔에서 묵는 이라면 조식을 즐길 테고, 부지런한 이방인은 이미 관광 준비를 마쳤을 테니 근처 카페로 향할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게으른 이방인에게는 동네 빵집이 제격이다. 의자와 테이블 대신 빵 진열대가 자리를 잡은 작은 동네 빵집. 그곳에 들어가 주문을 한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포르투갈어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빵'이라는 포르투갈어를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빵(Pan)은 포르투갈어다. 우리가 너무 흔하게 써서 외국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는 않지만 말이다. 빵이라는 말을 함께 쓰는 나라 중 하나로 일본이 있다. 포르투갈의 항해 선박이 은의 나라 지팡구(Japan)를 찾아 그곳에 도착했을 때를 상상해보자. 일본에서 그들은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그리고 그들은 아침에 눈을 떴을 것이고 딱히 허기를 느끼지 않았더라도 아침 식사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이방인은 언제나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특히 배고픔에 관해서라면 더욱 철저히. 포르투갈인들은 일본인에게 물었을 것이다. "빵!"

다소 웃기는 상상이긴 하지만 그것 말고는 포르투갈인들이 일본에서 살아남아 본국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배고픈 이들을 받아줄 바다는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을 포르투갈인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빵을 찾는 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씨앗이 되어 일본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어떤 배를 타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외쳤다.

"빵!"

단지 '빵'을 가리키는 소리였다면 좋았겠지만, 일본은 엄청나게 시끄러운 '빵'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땅에서도 빵이 자라기 시작했다.


빵이 자라는 곳이 포르투갈, 일본, 한국 뿐은 아니다. 포르투갈어는 지금도 2억 6천만 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다. 이 작은 나라의 언어를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놀랄 일도 아니다. 포르투갈어를 국어로 삼고 있는 나라는 7개국이나 되는데 그것은 모두 배를 타고 닥치는 대로 '빵'을 외치던 포르투갈인 때문이다. 말하자면 빵을 알면 적어도 포르투갈을 포함해 7개국에서는 굶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이 '빵' 때문에 모국어를 잃어버린 나라에는 좋은 일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도움이 된다.



말의 닮음 덕분에 리스본의 빵집 문턱을 넘는 것은 한국 빵집의 문턱을 넘는 것과 난이도가 비슷하다. 주문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국이나 리스본이나 빵집의 주인들은 자신의 빵에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래서 단 하나도 숨기지 않고 빵을 진열대에 꺼내둔다. 우리는 그저 손짓만 하면 된다. 혹시 버릇없어 보일까 염려가 된다면 그럴 때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빵을 가리킬 땐 빵에 시선을, 개수를 말할 때는 주인의 눈을 지긋이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숫자를 보이면 된다. 리스본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화를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기에 이것만 지키면 주인은 원하는 빵을 친절히 봉투에 담아줄 것이다.

그렇게 아침 구매를 마치고 가게를 나서면 낮처럼 환한 빛이 내리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벌써 정오가 된 것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맨발에 신은 운동화에 땀이 찰 수 있으니 올 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걷는 것이 좋다.



집에 돌아와 봉투를 열었다. 빵집에서 풍기던 고소한 버터 향이 여전히 유효하다. 봉투 안에는 크루아상 두 개가 전부다. 그들은 듬뿍 품은 버터 향을 감추지 않는다. 리스본의 빵 봉투에서는 버터 향이 났다.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천천히 씹었다. 그러자 지금 내가 먹고 있는 빵이 어떻게 이 식탁 위에 놓였는지 의아해졌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아직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한국에서 한국어를 할 때,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한국어를 하는 이들과 한국어를 나눌 때. 너무 시끄러울 정도로 말을 쏟아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어려웠다. 빵 두 개 정도를 얻는 것조차 말이다.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같은 언어를 하면서도 다른 해석을 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내던진 말은 상대가 아닌, 상대의 발밑에 떨어졌다. 쌓였다. 발에 걸렸다. 넘어졌다. 말에 파묻혔다. 모두 쓸어 휴지통에 버리고 싶은 그런, 말에 파묻혔다.


한 손으로 빵을 든 채 노트북을 열어 메일을 확인한다. 읽지 않은 메일의 두꺼운 제목이 잔뜩 보인다. 모두 한국어다. 간혹 영어로 온 것은 스팸메일이다. 몇 개의 메일을 열어보다 빵을 한 입 더 먹었다. 빵 가게와 봉투를 가득 채우던 버터 향이 입안에 올랐다. 답장을 줘야 하는 메일, 남겨야 할 메일, 버려도 될 메일... 하나씩 분류를 하면서 계속 빵을 먹는다. 이미 한 개는 먹어치웠고 남은 한 개도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덕분에 혼잣말은 내뱉지 않았다. 그러니 말에 파묻힐 일도 없었다. 다만 메일 상자는 여전히 지저분했다. 차분히 남은 메일을 정리해야 했지만 그러기에는 빵이 부족했다.

"조금 더 사 올걸."

오늘의 첫 마디가 입을 타고 흘렀다. 발밑에 떨어졌다.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화면 속 '전체 선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또 한 마디.

"빵!"

단 한 마디 포르투갈 말로 휴지통이 비워졌다.

닿지 않는 말, 보고 싶지 않은 메일을 위해 빵을 더 살 필요는 없었다. 리스본의 빵은 코를 감싸는 버터 향, 입속으로 퍼지는 몇 겹의 식감, 그리고 게으른 이방인의 아침 허기를 달래줄 목적이면 충분했다.


빵과 그 외의 모든 것. 리스본에 서서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정답은 빵이다.

나머지는 휴지통에 넣고 비워도 그만이다.




글 | 최동민

제작 | Studio 1.9.8.4

메일 | groscalin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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