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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윽고 슬픈 독서가 Jan 03. 2019

볕을 담을 준비

리스본 여행 에세이 #3. 칼사다 포르투게자



아직 익숙지 않은 도시를 거닐려 현관 앞에 서면 까먹은 것이 잔뜩 생각난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챙겼던 관광지도와 스마트폰, 그리고 여분의 배터리까지. 가방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이들을 하나씩 부른다. 그렇게 체크를 했음에도 불안감은 마찬가지. 무언가 놓고 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것이 무엇이든 관광 중에 반드시 필요해져서 나를 곤란하게 할 것만 같다. 몇 번을 가방과 주머니를 살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그럴 때는 우선 미리 신었던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곧장 화장실로 향한다. 대부분의 불안감은 화장실을 다녀오면 해소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봐도 유럽은 거의 유료화장실이기 때문에 관광을 떠나기 전에 화장실을 들르는 편이 좋다)


화장실에는 신경 쓰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작은 창문이 딸려 있다. 눈높이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한 이 창문의 역할은 환기일 것이다. 습기가 금세 쌓이는 곳이기에 이 작은 창문이 없다면 속절없이 곰팡이가 피어나고 말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있다 하더라도 곰팡이는 생긴다. 아무리 애써봐도 나의 온몸을 뒤덮는 그것처럼 말이다. 신경 써 보지 않았음에도. 아니, 일부러 보지 않으려 애썼는데도 화장실 바닥 타일에 낀 곰팡이가 보인다. 그것을 없애야 한다.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 않았을 때 생기는 무서운 일과 그것의 무게가 짓누를 많은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손끝부터 등 뒤까지 곰팡이가 가득 차 있다. 그렇기에 청소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곰팡이의 면적이 "청소하기 싫어!"의 마음을 넘어서거나, 짧은 순간, 화장실 바닥 타일 위로 햇볕이 비치는 것 같은.



리스본 거리에 나서면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곳은 바닥이다. 눈을 돌릴 때마다 특색있는 건물이 보이고 걷다 보면 언덕이, 조금 더 걸으면 강이, 한 걸음 들어서면 골목이, 그리고 그 끝에서 바다를 마주하게 되는 리스본. 그런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 시선을 두는 곳은 과장을 보태지 않고도 바닥이다. 리스본에 온 이방인들은 누구나 바닥을 보고 걷는다. 그곳에 '칼사다 포르투게자'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포르투갈식 포장길을 뜻하는 것인데 우리의 일반적인 보도블록과는 전혀 다르다. 리스본의 바닥은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그들은 숙련공의 손길만을 허락하는데 그렇게 새겨 탄생한 것이 바로 지금 보고 있는 '칼사다 포르투게자'다.

숙련공들이 다루는 것은 돌이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영원히 남기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돌을 사용하곤 했는데 리스본 사람들의 마음도 그와 같은 것이리라.


숙련공들은 다루기 어려운 돌을 깨고 크기를 맞춘 뒤 바닥에 채워 넣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들의 마지막 작업이야말로 '칼사다 포르투게자'를 깐다고 표현하지 않고 새긴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들은 다양한 형태의 무늬를 돌조각의 모음으로 새긴다.


특별하지 않은 집 앞 골목에도 '칼사다 포르투게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의 것과 호시우 광장의 것이 다르다. 브라질레이라 카페 앞도, 상 도밍구스 성당 앞도, 알파마도, 벨렝도... 모두 각기 다른 '칼사다 포르투게자'를 새겨 놓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칼사다 포르투게자'가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이다.


바닥이, 그것도 돌이 빛을 내는 현상. 이것은 듣기만 해서는 절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그런 마법 같은 일을 선보이는 이들이 리스본에는 즐비하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지금 걷는 거리는 석회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석회석은 리스본 사람들의 발길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을 완성해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리스본 사람들의 걸음이 닿으면 닿은 만큼 석회석은 매끈해진다. 그것 외에는 매끈해질 방법이 없다. 닿고 또 닿는 방법 말고는 도무지 매끈해질 수가 없다.

그렇게 매끈해진 표면은 리스본의 풍부한 햇볕을 담고는 그것을 자랑하듯 내보인다. 그 순간 '칼사다 포르투게자'는 빛이 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리스본의 거리는 해가 비칠 때면 두 배는 밝아진다. 그리고 그 밝아진 거리를 즐기며 리스본 사람들과 이방인이 걷는다. 그렇게 리스본에서는 모두가 숙련공이 되곤 한다.



작은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볕이 화장실 타일 위에 닿는다. 이제 막 숙련공의 마음이 된 나는 바닥에 닿고 또 닿으며 타일을 문질렀다. 그러자 거리의 ‘칼사다 포르투게자’처럼 화장실 타일이 햇볕을 반사해낸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빛을 반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타일이다. 하지만 1평 남짓의 작은 공간을 비추기에는 충분하다 느껴졌다. 모처럼 나의 공간이 빛으로 가득 차는 순간의 경험. 이 경험이 많은 것을 보게 한다. 매일 쓰는 화장실 바닥이 무엇으로 덮여 있는지, 창은 어디에 있는지, 그곳으로 들어오는 것은 바람인지, 혹은 햇볕인지. 그것이 닿는 곳은 나인지 바닥인지… 그 쉬운 진실이 숙련공의 마음을 가지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가지기 위해 나는 현관을 나서기 전 화장실을 청소했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리스본의 거리를 걸었다.



글 | 최동민

제작 | Studio 1.9.8.4

메일 | groscalin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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