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언니 Vs 못된 언니
나는 큰언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이번 부모님 돌봄 문제에 있어서 의견이 갈린 부분이 있었는데, 아빠가 장기요양등급을 받는 문제 때문이었다. (부모를 보는 각각 다른 시선이 있다는 것)
나를 크게 격분케 한 것은 언니의 이런 반응 때문이었다.
언니: 난 부모님 댁에 낯선 사람이 오는 게 좀 그래...
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내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말이었다)
언니: 우리가 할 수 있지 않아?
그냥 우리가 하면 안 돼???
나는 안다. 만약 부모님 때문에 언니가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면, 언니는 그것조차 심각하게 고민해 볼 사람이란 것을. 하지만 자신의 전통적인 잣대로 동생까지 싸잡아 넣는다는데에 문제가 있던 것이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 내 인생에서 의미하는 게 너무 컸기 때문이다.
난 안 해본 것이 많고, 아직 이루고자 하는 게 많이 남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할 수 있기까지(가령, 이렇게 글 쓰는 시간 등) 수년의 세월을 기다려왔다. 가능성만 맛본 수년 전의 기억이 나를 집어삼킬 뻔한 적도 있었다. 이런 내 폭풍과 기대와 희망을 내 가족은 모른다. 그저 착하고 성실한 딸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안 도와줘도 자기가 충분히 다 알아서 하는 사람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내 인생의 위중함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그나마 감정적인 지원을 해줬던 큰언니의 반응이 이런 식이 었던 것이다.
나: 언니가 다 책임질 수 있어? 그럼 그렇게 해.
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게다가 현실적으로 부모님을 디테일하게 챙기고 있는 건 나였다. 부모님 챙기기에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언니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 바람에 전화통화 한번 하고 나면 감기가 악화되었던 기억이 난다.
이런 대화를 하느니 차라리 이기적이고 대화에 뜸한 작은언니 편이 나를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셈이었다.
그러다가 심청전을 판소리 극으로 올린 요나 킴이라는 연출가의 연출철학을 접하게 되었는데, 좋은 대척점이 생기자 큰언니와의 대화에서 뭐가 그리 답답했는지 트랜스적으로 비교/정리할 수 있었다.
- 큰언니는 부모 돌봄을 당연한 자식의 도리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시각)
- 요나 킴은 나를 희생자로 봤다 (개인주의적 시각)
개인주의적 시각에서 봤을 때, 큰언니의 시각 (내가 하니까 너도 해야 함)은 폭력적이다. 그 행함이 선한 것이라도 말이다.
요나 김은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장면을 단순한 효심의 상징이 아닌, "사회가 가장 약한 존재를 희생시켜 양심의 불편함을 덮어버리는 '구조적 폭력'으로 해석했다. (발췌 - 하단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250911033200371
게다가 직접 돌봄을 진행하고 있는 나에게 가족 카톡방을 통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만 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가족구성원의 행태에 구토감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 질문들 하나하나가 가령, 자신은 휴가 중이나 병원에 직접 방문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하면 자신의 심적인 불편함을 덮어줄 거라고 믿고 있는 듯했다.
나는 각자의 심적 불편함을 덮어주는 반복 답변 기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나는 급기야 가족카톡방을 나왔고, 직계가족만으로 구성된 카톡방을 새로 만들어 지침을 전달했다.
- 병원(혹은 부모님 댁) 방문이 가능한 날에 이름 기재할 것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 주요한 문제는 부모님께 직접 문의하고, 주변에 여러 번 확인 후 나에게 문의할 것 (그 외는 직계가족을 통해서만 나에게 연락할 것)
- 중요하지 않은 문제는 개인 SNS에 올리거나 할 것
약간의 소란 끝에 큰언니는 나를 이해하는 듯했고 분위기는 많이 진정되었다.
난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비한 나머지 감기에 걸렸는데, 이후 부모님 댁 방문 횟수를 줄여나가고 있다. 계속해서 큰언니는 부모님 댁에 방문할 때 모든 것이 진심이다.
요나 킴이 우리 집 큰 언니였다면, 난 더 편했을까?
아님 오히려 이기적이라며 욕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