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오빠의 뒤통수.
동기 오빠가 며칠 전부터 팀을 바꾸고 싶다고 아우성이다.
김용범 : 88년생, 남, 미혼, 입사동기, 예비신랑
용범 오빠는 유일한 우리 실 동기이다. 용범 오빠랑 나랑은 팀은 다르지만 같은 실 소속이라 같은 공간에서 근무한다. 자리가 떨어져 있어서 얘기는 자주 못하지만, 그래도 동기랑 같은 공간에서 일한 다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곤 했다. 용범 오빠는 나랑 입사를 같이 했지만, 나이가 나보다 많다는 이유로 자발적으로 막내일을 하지 않았다. 난 이런 오빠가 얄미웠지만, 그래도 든든한 게 커서 좋았다.
동기 오빠는 김 팀장님 밑에서 일을 한다. 정기적인 업무보다는 그때그때 새로운 사업이 생기면 이를 운영하는 일을 한다. 오빠는 입사 초반부터 업무에 불만을 가져왔다. 가끔 술자리에 가면 본인 일은 대중이 없고 주변에 사공이 너무 많아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입사 3년 차인 지금도 똑같은 업무를 계속하고 있다. 가끔씩 오빠랑 술도 같이 마시고 메신저로 같이 욕도 해주면서 서로 의지하였다.
최근 들어 용범 오빠의 업무 불만이 더 커졌다. 결혼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이 업무는 바쁜 시즌에는 퇴근도 못하고 내내 일만 해야 한다고 속상해했다. 예비 신부님도 이런 업무에 불만이 많다고 하였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루틴 한 업무를 하는 나는 업무 강도가 높지만, 칼퇴가 가능하였고 고, 업무 자체에 대한 만족도도 높았다. 오빠가 업무에 대한 욕을 할 때마다 난 팀 사람들에 대한 욕으로 맞받아쳤다.
그러던 어느 날, 화장실을 가다가 회의실에서 용범 오빠가 실장님이랑 단둘이 얘기하는 것을 보았다. 팀장님도 없이 평사원이 실장이랑 단둘이 할 얘기가 뭘까 궁금하였지만, 일이 바빠 물어보지 못하였다. 그때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다음 날 하사원 님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다.
> 서현 씨~? 용범 씨 팀 바꿔달라고 했다면서요?
>> 네? 용범 오빠 가요?
> 네. 어제 실장님한테 면담 요청했다는데요? 업무 너무 힘들다고. 서현 씨한테 얘기 안 했어요?
>> 일 힘들다고는 했는데, 바꿔달라고 한 지는 몰랐어요. 너무 힘든가ㅠㅠ 제가 요즘 바빠서 물어보지를 못했네요.
> 아 근데, 서현 씨. 내가 듣기로는 서현 씨 자리 가고 싶다고 했다는데? 진짜 말 안 했어요?
>> 네? 제 업무랑 바꿔달라고 한 거예요?
자세히 들어보니 용범 오빠는 실장님께 면담 요청을 했다고 한다. 현재 본인 팀에 인원도 부족하고, 업무도 적성에 맞지 않아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업무를 바꿔주거나, 팀에 증원 신청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사팀에 정식으로 요청한다고 반 협박을 한 것이다. 김 팀장님에게도 이 사실을 사전 공유하지 않았고, 팀장님도 실장님에게 소식을 들어서 매우 화가 난 상태라고 한다. 하지만, 실장님은 인사팀에 정식 요청이 되면 우리 실의 부서평가에도 악영향이 있을 것이고, 이는 보직자들의 인사평가에 영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웬만하면 용범 오빠의 의견을 받아주라고 지시한 것이다. 실장님은 평소에 어떻게 팀원들을 관리했길래 사원이 이런 말을 실장한테 직접 하냐며 오히려 용범 오빠를 두둔하였다. 이에 김 팀장님은 화가 났지만, 딱히 어떻게 할 도리를 찾지 못하여서 팀 분위기가 매우 좋지 않은 것이었다.
난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실 사람들은 모두 나와 용범 오빠의 업무가 바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용범 오빠랑 내가 친하니까 사전에 나도 동의한 사항이라고 소문이 난 것이다.
난 정말 어이가 없었다. 업무는 그렇다 치고 용범 오빠에게 너무 큰 실망을 하였다. 실장님한테 면담을 요청할 정도로 힘든 상황이고, 내 업무가 하고 싶었으면 충분히 나랑 사전 협의할 시간이 많았다. 그러면 나도 대비를 하든 설득을 하든 뭐라도 대처를 했을 것이다.
오늘도 용범 오빠는 나한테 일언반구 말이 없다. 실 사람들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당사자인 내가 가장 늦게 전해 들었고, 이에 대해 용범 오빠는 미안하다거나 어쩔 수 없었다는 등의 핑계의 말 한마디 조차 없었다. 이제는 정말 화가 났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진짜 가마니로 보이는 건가.
오전 내내 혹시나 하는 메신저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연락은 오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사실 확인 메신저들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진짜 참을 수가 없었다. 용범 오빠한테 메신저를 했다.
> 오빠. 잠깐 회의실에서 얘기 좀 해. 지금
답변도 기다리지 않고 회의실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용범 오빠가 회의실로 왔다.
>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일이 하고 싶다고?
>> 응. 너 일이 편해 보여서.
> 그럼 나한테 미리 말을 했어야지. 이게 뭐야?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내가 다른 사람한테 내 업무 변동 얘기를 들어야겠어?
>> 넌 다 잘하니까 상관없지 않아? 우리 팀 일도 노답이고, 인원 보강도 안 되는 거 알잖아.
> 그럼 내가 실장님한테 말해서 인원 보강 쪽으로 말씀드려볼게.
>> 아니야. 내가 업무는 무조건 바꿔달라고 했어.
> 하. 그럼 난 무조건 바뀌는 거네. 너무 메너가 없다.
>> 야. 나도 살아야지.
적반하장이었다. 용범 오빠는 내 눈은 마주치지 않았지만, 할 말은 다 했다. 결국 본인을 위해 한 행동이고 난 상관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화가 났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실장님께 바로 가서 의견을 말씀드리는 건 너무 실례일 것 같아서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 팀장님께 자문을 요청드렸다. 박 팀장님께 얘기해서 현재 진행 중인 일 때문에 업무 변경은 저도 힘들 것 같다며 실장님께 말씀을 부탁드린다고 하였다. 업무 변경은 어쩔 수 없지만, 지금 변경된다면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차질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고 소문만 무성한 채 일주일이 지났다. 나도 내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시점 이후 용범 오빠랑은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난 그래도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용범 오빠는 나랑 눈이 마주치면 의도적으로 피했고, 내가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았다. 혹여나 커피타임 때 같이 있게 되면 오빠는 자리를 피했다. 기분이 나빴다. 내가 피해자인데.
어느 날 실장님이 팀장들을 소환하였다. 불길했다. 한 시간 남짓 지났을까. 회의에서 돌아오신 박 팀장님이 날 따로 부르셨다.
> 서현 씨. 용범 씨네 사람 받기로 했대. 일단 당분간 대학생근로 받아서 잡일 좀 시키고, 경과보고 증원 정한다고 했나 봐. 암튼 서현 씨는 상관없을듯하네.
>> 네. 감사합니다.
다행이었다. 용범 오빠는 강력하게 업무 변경을 재 요청하였지만, 김 팀장과 박 팀장 모두 이는 반대하였고, 실장님이 증원으로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단기적으로 증원은 어려우니 근로장학생을 이용해서 단순 업무를 시킨다고 한다.
다른 동기한테 물어보니, 용범 오빠는 그냥 업무가 싫어서 막무가내로 변경을 요청한 거였고, 내 업무를 제외하고 다른 업무를 시키면 사표를 쓴다고까지 선언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했다. 내 업무가 본인과 잘 맞을 수는 있어도, 그렇게까지 탐낼 정도로 꿀 자리는 아닐 텐데. 내가 너무 좋은 얘기만 했나?
용범 오빠의 배려 없는 행동으로 인해, 난 동기 한 명을 또 잃었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회사에 친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