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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쿰척 Aug 20. 2021

#17. 점심시간

점심시간을 정하시려거든 제 배꼽시계한테 양해 좀 구해주세요.

코로나의 여파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내 출근의 이유 점심시간이 늦춰졌다. 말로는 한 번에 많은 사람이 밀집하면 코로나 감염의 위험이 높아서라는데, 차라리 도시락을 배급해주지. 아무튼 우리 층의 점심시간이 기존 12시에서 12시 30분으로 30분이나 미뤄졌다. 내 배꼽시계는 입사이래 11시 30분만 되면 울려대는데, 도대체 12시 30분까지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12시 점심시간 시절 관례상 11시 40분 정도에 밥을 먹으러 갔다. 항상 주축은 실장님이셨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한 시간 이십 분의 점심시간을 누렸다. 하루 종일 자리에만 앉아있는데, 20분 정도 휴식시간을 더 갖는 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기본으로 자리 잡은 듯하였다. 


이제 12시 30분에 점심을 먹기로 하였으니 당연히 12시 10분쯤 사무실을 나서겠거니 기대하였다. (참고로 우리 회사는 부서끼리 점심을 먹는다.) 근데 무슨 일인 지 실장님이 15분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으셨다. 정확히 18분에 실장님이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셨다. 그 이후로도 계속 20분 정도에 점심이 허락되었고, 우리는 강제적으로 점심시간이 40분 미뤄졌다. 늦게 먹는 것도 서러운데 점심시간이 짧아진 건 더 짜증 났지만, 그동안 20분의 추가 점심시간을 잘 누렸으니, 앞으로의 점심시간을 잘 적응해보자며 배꼽시계를 다스렸다. 


8/9(월)

 여느 때와 다름없이, 12시 15분쯤 점심을 먹으러 갈 채비를 하였다.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실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셨다. 정대리가 실장님께 식사 가자고 말씀드리자, 실장님은 "네? 아직 30분 안됐잖아요. 보는 눈도 있는데 30분에 가시죠. 지난번에 저기 김실장님이 30분에 먹자고 하더라고"라며 일어나서 점심만을 기다리는 배고픈 어린양들의 시선을 깔끔히 무시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12시 30분에 사무실을 나섰다. 


늦어진 점심시간에 간신히 적응을 하였는데, 실장님의 갑작스러운 점심시간 단축 제안이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점심을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점심이 특별히 맛있는 것도 아니고 부서 사람들이랑 먹는 게 달가운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나마 9시간 중 내가 가장 기다리는 소중한 점심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난 실장도 아니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막내니까, 그리고 뭐 사내 규율이 그렇다니 군말 없이 적응해 나아가기로 하였다. 


8/10(화)

출근하자마자 사내 홈페이지에서 "Today's Lunch"를 보았다. 나름 중복이라고 삼계탕이었다. 안 그래도 늦게 먹는데 오늘은 식당 줄이 훨씬 더 길 것 같았다. 아침부터 우울했다. 오전에 바삐 일하다 보니 어느새 11시 30분이었다. 아직도 굶주린 배를 채우려면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빨리 가는 건 나쁘지 않았다. 


시계를 봤는데 아직도 11시 55분이었다. 점점 배에서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그때 실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오늘 특식으로 삼계탕 나오나 봐요. 줄 엄청 길 것 같은데 지금 가시죠!"라고 말하시면서 사무실을 박차고 일어났다. 충신들이 쪼르르 군말 없이 달려 나갔다. 난 밥맛이 뚝 떨어졌다. 30분에 먹자고 할 때는 언제고 특식이라고 35분이나 빨리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다니. "어제는 저희가 20분에 드시러 가자고 할 때도 너무 이르다고 거절하셨는데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이제는 도대체 몇 시에 밥을 먹으러 가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난 다 큰 성인인데 밥 하나 주체적으로 먹지 못한다니, 비참했다. 내일은 몇 시부터가 내 점심시간일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매일 실장님의 마음이 메일 달라지니 그냥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8/11(수)

오늘은 출근하자마자 기분 좋은 소식을 들었다. 실장님이 반가를 내셨다고 한다. 반가는 2시에 퇴근하는 건데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지 않고 근무를 하면 1시에 퇴근해도 되었다. 그래서 모두들 점심시간에 근무를 해서 1시에 퇴근을 하였고, 실장님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우리는 실장님 빼고 점심을 제때 먹으러 가면 되니까 오늘은 적어도 점심시간이 12시 30분으로 정해져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12시 00분에 실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 저 오늘 반가 냈어요. 오늘 일찍 밥 먹고 일찍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 분 있으신가요?

같이 가자는 얘기였다. 우리는 다 같이 12시에 밥을 먹으러 갔다. 실장님의 휴가 때문에 우리도 1시까지 점심시간을 보내면 되는 건가. 실장님은 식사를 하시고 2시에 퇴근할 계획이신 것 같았다. 어쨌든 배가 고픈데 일찍 밥 먹는 건 나쁘지 않았다. 더군다나 밥도 내가 좋아하는 비빔밥이었다. 점심을 먹고 부서 사람들이랑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고 1시에 사무실에 복귀하였다. 사무실에 불을 켜고 업무를 하려고 보니 실장님이 자리에 안 계셨다. 회의 가셨나 했는데 30분이 지나도록 오시지 않으셨다. 


실장님은 식사를 하시자마자 퇴근을 하셨던 것이다. 점심을 먹으면 2시에 퇴근하는 게 사내 규율이고, 점심시간은 30분 단위로 쪼개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점심시간이 짧았다 한들 이가 근태에 반영되지는 않았다. (내가 점심시간에 일을 한다고 초과수당을 신청하지 않는 것처럼) 실장님은 식사까지 하시고 12시 20분에 곧장 퇴근한 것이었다. 12시에 밥을 먹으러 갔으니 실제 근무시간은 3시간이었다. 이건 정말 용납이 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반가를 쓰는데 식사까지 하고 바로 퇴근하려고 하면 실장님이 잘 가라고 해주실까 의문이었다


이제는 정말 점심시간이 지긋지긋했다. 그냥 혼자 따로 먹고 싶었지만, 딱히 명분이 없었고 튀는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는 정말 내일의 점심시간이 궁금했다. 이제 배꼽시계는 제대로 울리지 않았다. 매일 알람을 달리 맞춰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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