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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많은븐니씨 Aug 16. 2021

앗, 잠시만요. 전산오류 아닌가요?

이대로라면, 캠퍼스 박제입니다. (feat. 핫식스)

<학교의 전산망에 올라온 기말고사 시간표>

시험 날짜가 왜 이러는 걸까

난 시조새 선배 조상 학번이다. 이제 대학생 시절은 과거 유년시절만큼 멀어진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내게 공부가, 대학이 남긴 Trace는 대단하다. 당시에는 내가 필기도 잘하고, 발표도 잘한다는 소문이 떠돌아서 아예 열람실에 24시간 살면서 생활했다. 그냥 그 칭찬이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나의 최소한의 노력이었다. (Fact: 당시에는 필기도 많이 빌려주고, 발표도 비교적 잘 처리해냈다. 하지만 외국어에 취약한 나는 영어로 된 발표를 맡을 때에는 발음이 신경 쓰여, 조금 힘들었다는 추억) 


열람실은 정말 24시간 내내 오픈이었는데, 여기서 한 학기를 공부하면 학교 캠퍼스가 비교적 소규모라서 어떤 학우가 언제쯤 오는지 모두 다 알게 된다. 그래서 잘못하면 내적 친밀감 상승으로 나도 모르게 인사를 건넬 뻔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오늘도 보니 반갑네 >_<"라는 사람을 좋아하는 나의 강아지 같은 성격이 그 사람을 향해 인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말시험을 준비하려고 시간표와 장소를 확인하는데 내 눈을 의심했다. 이틀 연속 세 과목 시험으로 그것도 쉴틈 없이 몇 시간 간격으로 여섯 과목이... 시험이 진행되는 시간표를 발견한 것. 흠, 처음에는 그냥 허탈해서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다음으로는 내가 시간표를 너무 타이트하게 짠 것인가? 홀로 과목을 다시 확인하며 정신줄을 챙겼다. 당시에 남자 친구는 회사원으로 이미 졸업을 했기에 나를 잘 돌봐줄 틈이 없었다. 회식도 많아 보였다.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걱정되었는지 "너, 저거 준비하다 진짜 늙어 죽을 수도 있어.."라고 걱정해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시험 준비에 철두철미하고 잘 준비해왔던 나인데, 이 연속된 시험의 시간표 앞에 내 지성을 무릎 꿇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빨리 집에 가서 그냥 자라는 사람들의 말을 제쳐두고 꼭 알아야 할 정보들을 취사선택해서 무서운 속도로 읽어넘겼다. 그리고 비슷한 전공의 과목은 그 학기가 끝나면 비교적 공통된 내용과 연구동향을 파악할 수 있어서 그 점을 잘 활용하여 답안을 제출할 때 참고했다. 그러면 대충 A-와 B+의 성적은 유지할 수 있었다. 정말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은 Summa Cum Laude를 받았는데 부러웠다. 나에겐 Summa가 없다. (성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캠퍼스의 낭만과 토론시스템은 인상적인 학교의 부분이었다.)

아직도 꿈에서 시험기간 중인 꿈을 꾼다 | 공부란

나는 소위 말하는 엘리트코스를 밟은 최상위권의 학생은 아니었다. 그냥 운이 좋아서 공부하는 친구들과 함께 토론하고, 공부하고, 좋은 교수님들을 만나고 그랬던 것 같다. 그냥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좋은 성적 받아오면 좋아하고, 나도 선생님과 친구들의 인정을 받으니까 공부하는 시간이 좀 힘들어도 좋았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니 공부도 그냥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지능지수로 삶을 나누고 비교적 가치를 높게 두었던 나의 생각이 언젠가 부끄럽게 느껴진 날이 있었다. 그런 것보다도 EQ가 좋아서 타인을 자신처럼 예의 있게 대하고 삶에 대한 공동체 지향적인 이타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공부와 삶, 최고의 결과와 일류, 성과지향주의와 과정론적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결국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나의 만족감으로 공부에 큰 가치를 두었던 나에게 부모님은 "너 그렇게 공부만 생각하고 기고만장하면 성공 못해!!"라고 혼을 내었다.


난 지금 많은 실패의 과정과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을 조금이나마 깨닫고 있다. 공부가 전부가 아니란 걸. 이제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IQ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감성지수 EQ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약간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공부라는 어떤 무형의 잡히지 않는 목표를 사랑했던 건, 공부를 해서 좋은 결과를 얻고 친구들에게 보다 더 자존감 높은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더불어 공부와 관련된 사회생활의 스펙트럼이 넓어진다는데 매력이 있었다.


아직도 나는 가끔 어린 시절, 시험기간에 내일은 국, 영, 수가 있는지 준비는 완벽하게 다했는지, 진도는 다 볼 수 있는 시간인지, 피곤한데 잘 공부할 수 있을지 꿈에서조차 고민하는 꿈을 꾼다. 그러다 이게 꿈인걸 알고 나면 다행이다 안도가 되었다가도, 이런 꿈을 아직도 꾸는 게 좀.... 불쌍해서 그 잠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멍을 때리면서 누워있는다. 좋지도 않은 머리 붙잡고 이런 꿈을 십수 년 꾸고 있는 게 무슨 일인지. 그래서 이제는 사람과 사회를 향한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공부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다시 들 때 대학원 과정도 밟아보고 싶다. 그래도 신물이 나도록 펜을 놓지 않은 나의 성실함에는 조금 격려를 해주고 싶다. 이제 이런 슬프고 준비에 대한 강박이 찬 꿈을 그만 꾸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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